• 케인즈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2009년 03월 16일 06:0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이 글의 필자는 상해재경대학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북경 인민대학 박사과정에 들어갈 예정이다. 필자는 현재의 경제위기 해법으로서의 케인지안적 정책이 가진 한계점을 지적면서, 사회 공적 소유기업의 확대라는 소유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진보진영이 소유제 개혁에 대한 강령을 갖지  못하는 한, 보수 야당이나 나아가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들러리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섞인 경고를 하고 있다. <레디앙>은 5차례 걸쳐 ‘경제위기의 정치적 해법’이라는 제목으로 필자의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2.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당면한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를 맞이하여 케인즈주의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고 하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1945년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자본주의의 비교적 긴 호황을 이끌었던 케인즈주의도 70~80년대에 들어서 누적하는 재정적자, 인플레이션의 만연, 그리고 기업투자 부진에 따른 경기침체의 수렁에 빠져 결국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그 주도적인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케인즈주의를 경제정책에 적극 활용한 북유럽 복지국가 모델의 선두주자격인 스웨덴의 경우를 보면, 1991~1993년 기간 정부지출이 GDP의 67%(참고로1996년 OECD 15개국의 평균치는 39%였음)를 차지하는 가운데 경제성장률은 -5%, 실업율은 1.5%에서 8%까지 상승했다.

    당해년도 재정적자는 GDP의 12.3%, 누적국채 규모는 GDP의 42.3%에서 77.9%까지 확대되게 되어 더 이상 기존의 성장모델로는 체제유지가 힘들게 된 상황에 부딪치게 되었다.

    결국 스웨덴 정부는 90년대 후반부터는 기존 복지 모델에 대한 각종 수정조치를 통하여 전통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그 정책기조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시장에 대한 국가의 적극 개입과 부자에 대한 세금징수를 통해 빈곤층에로 부의 직접적 이전을 특징으로 하는 케인즈주의는 왜 실패하게 되었을까? 케인즈주의가 실패한 원인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비판하는 바와는 달리 국가의 적극 개입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한 오늘날의 시장경제에 있어서도 국가의 개입은 재정정책, 화폐정책, 복지정책 등을 통해 여전히 전방위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케인즈주의가 실패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부자에 대한 세금징수를 통해 빈곤층에로 부의 직접적 이전을 특징으로 하는 케인즈주의적인 정책이 자본주의적인 소유관계와 근본적으로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부문을 중심으로 한 공공부문의 확대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추세이며, 환경 위생 교육 주택 등에 대한 국가의 투자는 현대 시장경제가 존립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그 중요성이 날로 부각되고 있다.

    이렇듯 자연스레 확대일로에 있는 공공부문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는 현대 시장경제가 안고 있는 큰 숙제이기도 하다. 케인즈주의가 종국에 가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러한 공공부문의 재원을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존하여 조달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공공부문 재원의 이러한 사적 소유에의 전적인 의존은 자본주의적 소유 관계와 심각하게 충돌한다. 점점 높아지는 세율은 ‘세수초과부담’ 을 낳는데, 이것은 부유층의 세수저항이나 투자 기피, 혹은 자본의 해외도피와 같은 형식으로 표출되게 된다.

    ‘세수초과부담’ 은 현대 경제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정부의 징세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납세자의 손실이 정부의 세수수입보다 크게 되어 사회적으로 세수 이외 추가부담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수학적으로는 “½EwL₁t² ”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여기서 주목할 것은 t (세율) 가 2차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U자형의 2차 곡선이 보여 주듯이, 세율이 일정한도 이상 올라가면 세수초과부담 역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납세자의 조세저항도 커진다.

    이것이 현실에서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게 되면 “투자해서 모두 세금으로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놀고 마시는데 써버리자” 라는 식으로, 생산에 투자되어야 할 돈이 소비에 쓰여지든지 또는 해외로 대량 유출되게 된다. 이렇듯 부유층의 투자 회피와 사보타지는 다시 경제성장의 둔화와 실업률의 증가를 낳고, 이는 결국 실업자 구제를 위한 사회보장재원의 확대 등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부유층에 대한 추가적인 세율 인상은 곧 한계에 도달하기 때문에, 정부는 부족한 재원을 메꾸기 위해 부가세 등 간접세의 비중을 확대하거나 공채발행을 확대하게 되는데, 전자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원인으로 복지재정의 추가적 확대 요인이 되며, 후자는 누적적이고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귀결되어 국내 인플레이션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이러한 경기침제와 인플레이션의 결합이 바로 스테그플레이션이다.

    최근 일부 국내외 좌파학자들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의 관철을 저지하지 못한 것이 케인즈주의의 실패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즉 공공복지의 확대를 통해서 충분할 정도로 과잉자본을 퇴출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정 부분 케인즈주의의 역사적 한계에 면죄부를 주고, 이미 실패한 정책에 대해 대중으로 하여금 다시 일말의 희망을 품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이들의 주장대로 만약 공공복지를 더욱 확대하는 것을 통해서 과잉자본을 충분히 퇴출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면 당시 왜 충분한 정도의 공공복지 확대정책을 실행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앞서 살펴 본 바대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더 이상의 고율 세금징수에 의한 사적소유에 대한 침해는 이미 용납될 수 없는 임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세계는 비록 지금 백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심각한 금융위기로 고통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다시 케인즈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현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이 국가에 의하여 세금이란 명목으로 ‘수탈’ 당하는 악몽을 두 번 다시 꾸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금융자유화와 세계경제의 일체화가 과거 70~80년대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 되어버린 현재의 조건에서, 부유층이 해외 자금도피 등을 통해 세수저항을 하는 것은 매우 용이하다. 따라서 케인즈주의로의 복귀는 현실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본가들은 앞으로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요한 정책노선으로 취하면서, 필요시(위기시) 케인즈주의의 부분적 수용을 통해 이를 보완하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 사회적 생산의 고도화가 나날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지고 있는 오늘날 시장경제에 있어, 신자유주의노선의 관철만이 노동을 영속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자본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수단이다.

    민중에게 있어서 이것은 당연히 노예화와 빈곤화의 고통이 영속됨을 의미한다. 현 시기 다시 케인즈주의를 운운하며 낡은 이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의도야 어떻든 잠시 시간을 벌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결국 머지않은 장래에 ‘작은 정부’를 외치며 화려한 부활을 꿈꿀 그들에게 더할 수 없이 좋은 명분을 주는 결과가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