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자본의 작품 '집단기억'
    2009년 03월 10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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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은 연구 논문 중의 하나가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 ‘벨고로드‘라는 러시아 중부 도시의 중학생 (11-13세)을 상대로 해서 "소련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느냐"고 작문을 하게 하여 그 결과를 분석한 것인데 그 결과를 보면 기가 찹니다.

   
  

학교에서 역사 교육이 아주 소략하고 텔레비전이 거의 상업적 오락 위주다 보니 일단 ‘기억’ 자체가 대단히 모호하고 불확실합니다. 다수의 응답자들이 소련의 구성 공화국의 수 (15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레닌’이 누구이었는지, 언제 살았는지, 뭘 했는지 잘 알지는 못합니다.

‘스탈린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위대한 승리’는 국가적 선전 덕분인지 그나마 기억에 남아 있지만 ‘레닌과 혁명’에 대한 기억들은 철저하게 불식되고 말았습니다.

레닌 모르는 러시아 학생들

이걸 이제 가르치지도 텔레비전에서 보여주지도 않으니까 제정 러시아에서 노동투쟁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1898년에 결성된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뭘 하는 단체이었는지, 볼셰비키가 누구이고 멘셰비키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러시아 중학생은 이미 1%가 될까 말까 합니다. 그냥 기억에서 지워진 셈이지요.

물론 학생들이 부모 세대로부터 들은 소련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익히 압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돈을 뜯지 않았던 나라이었다", "소련에서 경찰들의 횡포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같이 노동하고 공익을 생각했다"…

이 정도면 요즘 러시아 학생들에게 ‘외국’이나 다름이 없지요. 그러면서도 텔레비전과 학교가 심어준 ‘공산주의’의 부정적 이미지는 거의 지배적입니다. "교회에 못다니게 했던 악마들의 국가", "범죄를 저지르면 손목을 잘랐던 세상", "하루 이틀이나 줄서야 빵을 살 수 있는 빈곤 국가"… 공산주의적 이상을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제 할머니를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옵니다.

오늘날 지배자들이 그들에게 불편한 ‘과거의 기억’을 성공적으로 ‘청소’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과거의 상을 구축케 한 셈입니다. 저들이 가장 혐오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 ‘국제주의’인데, 그 단어를 아는 러시아 학생은 이제 없다시피 합니다. 다들 ‘강대국인 우리 나라에 대한 자긍심’부터 익히는 것이지요.

‘국제주의’ 아는 러시아학생 거의 없어

과거란 우리에게 남의 나라이기에 그 나라를 여행할 때에 부득불 ‘현지 당국의 안내와 감시’를 받게 돼 있지요. 대다수 일반인들에게 역사 공부의 거의 전부는 학교 수업과 텔레비전, 그리고 신문에서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 통로만 효율적으로 통제하면 다수의 집단 기억을 거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경험하지 않은 과거에 대한 집단 기억이란 결국 사회적 구출물이기 때문이지요. 물론 부모 세대가 경험한 과거라면 ‘역사의 조절자’들이 완전히 마음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뭘 어떻게 배워도 집에 가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 필자

그러니까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오늘날 러시아에서의 악마화 작업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돈을 뜯지 않았던 시대’를 기억하는 부모 세대가 존재하는 이상 완전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박정희가 아무리 일본과 일본 우익들을 사랑했다 해도 일제 때에 (자신과 달리) 신분 상승이 아닌 차별과 가난을 경험했던 다수가 살아 있었기에 일제시대 관련 학교 수업 내용을 철저하게 ‘독립운동’ 위주로 해야만 했습니다.

본인이 독립운동가들을 ‘합법적 권력에 공연히 덤벼드는 불온분자’로 생각해도 탈식민적 사회의 ‘자연적’ 집단 기억을 아주 무시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에서 일제 시절에 경찰들에게 맞아본 사람들이 소수의 노년층이니 뉴라이트식으로 "민족의 장래를 도모하기 위해 일제 당국과 협력했던 김성수와 방응모 같으신 위대한 건설적 민족주의자들 덕분에 우리가 결국 문면화되고 이만큼 잘 산다"는 이야기를 학교나 방송에서 해도 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용한 거짓말

우리가 그걸 ‘친일’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알맹이는 친일도 친미도 아닌 ‘친자본주의’입니다. 각종 ‘불온 분자’가 아닌,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자본을 열심히 증식하는 ‘건설적인 분’들은 역사의 주인공이 돼야 보수의 천년왕국 건설은 가능해질 것입니다.

일본이란 그래도 어디까지나 ‘외부적 타자’이니 일제시대 때의 한국 자본가들의 열성적인 ‘당국과의 건설적 협력’은 그나마 문제의식이라도 일으킵니다. 그런데 여론조사마다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뽑는 나라에서는 ‘한강의 기적 시대’에 대한 학교, 방송에서의 찬가는 대중적 저항에 부딪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학계에서 ‘문화사로의 전환’이 유행이다 보니 노골적인 ‘독재 찬양’이 아니고 ‘텔레비전 보급, 점차적 소비 대중화, 아파트 건설의 붐, 체육 열풍’ 등등의 ‘비정치적인 (중간 계층의) 생활 이야기’가 1970년대에 대한 ‘새로운 건설적 의식’의 핵심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는 여공들, ‘따이한’들의 총탄에 쓰러지는 월남 농민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파업을 벌였던 ‘노가다’ 노동자들, 군대에서 고참의 구타에 죽거나 평생 정신병자, 불구자가 된 병영국가 희생자들은 다 어디론가 역사의 뒤안길로 슬거머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점차 대다수가 가난해지고 이렇다 할 만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적 불안과 침체의 현 시대에, 대한민국이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우리들의 위대한 과거’에 대한 수요가 높은 반면, 서민들이 지금도 용산참사에서처럼 터지고 죽는 상황에서 과거 서민들의 고생을 굳이 환기시킬 필요를 국가는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랑스럽고 건설적인’ 과거가 탄생되고, 위대한 토건/수출 국가의 ‘족보’가 쓰여집니다. (국가와 자본이 쓰는) 역사란 이 세상에서 제일 유용한 거짓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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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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