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칠맛 대학 총장'…너무나 한국적인
        2009년 03월 05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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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인가 인터넷 어디에선가 중앙대 총장 박모의 ‘감칠맛’ 발언에 대해 읽었습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읽다가 말았던 것입니다. 너무 역겨워서 관련 기사를 끝까지 읽을 수 없었던 것이고, 굳이 읽지 않아도 모든 게 불보듯 뻔하니까 읽을 필요도 못느꼈습니다.

       
      ▲ 필자

    권력에의 도취, 그리고 밑엣사람을 짓밟으면서 그걸 ‘멋’이라고 부르는 것….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풍경입니다. 사실, 권력의 어느 순위에 올라간 뒤에 술김에 한 번이라도 자기 부하를 짓밟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게 성추행이라는 범죄의 수준이 되면 사회적 이슈라도 되지만, 지도교수가 술을 듬뿍 마신 뒤에 여제자에게 "아니, 결혼을 언제 하려는 거야? 꽃을 보기만 하면 뭐하냐, 누군가가 꺾어야 향기 나지"라고 횡설수설하는 정도는 아마도 문제될 것도 없을 듯합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인네’들이 겁도 없이 ‘감칠맛’ 운운할 수 있는 이유는, ‘밑엣사람’이 아첨을 떨고 ‘윗사람’이 부하의 자존심을 적당히 밟아주는 데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어서입니다. ‘합의’라고 하면 어폐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이걸 읽고 "나는 이런 데에 대해 합의한 적이 없다"고 외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요, 모든 개인들이 개별적으로 인격 모독이라는 사회적 통과의례에 대해서 합의한 일이야 없지요. 그러나 사회의 일체 위계적 관계들이 독립적 인격의 원색적 부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알게 모르게 통념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운동권은 얼마나 다른가?

    제도권만을 탓할 것도 없지요. 노조나 학생운동권의 분위기가 획기적으로 다르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사람이 있겠어요? 규모/형태는 다르지만 노조나 학생조직도 일종의 권력인데 대한민국에서 독립적 인격을 존중할 줄 아는 권력이 부재하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박모 총장의 개인적 몰상식이 무서운 게 아니고 대한민국 (특히 남성) 인구 대다수가 박모 총장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모방을 하면서 크는 동물입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학부모와 선배들이 담임교사에게, 그리고 담임교사가 교장, 교감에게 ‘잘해주는’ 걸 보면서 크는 아이들은 ‘원만한 성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안배우겠어요?

       
      ▲ 박범훈 중앙대 총장.

    특히 순응주의적 성격을 잘 심어주는 게, 10대후반~20대초반 국민의 거의 90%가 싫든 좋든 가게 돼 있는 대학입니다. 군대에 여성을 위시한 수많은 국민들이 안가고 못가지만 대학이란 이제 20대 초반들의 가장 보편적 사회화의 장이 됐어요.

    그런데 대학이야말로 아부의 절대적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대학 구성원들 중에서는 서로 동등한 두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위계화돼 있어요. "선생님" (시간 강사)와 "교수님" (전임 이상)이 그 위치상 평등치 못한 것은 물론, "선생님"과 "교수님" 사이에서도 그 서열적 위치상 서로 동등한 사람이란 거의 없지요.

    마찬가지로 학생 사이에서도 선후배가 불평등한 것은 물론이고, 같은 학년 안에서도 나이, 성차, 가정 배경, 성적 등등 여러 차원에서 다들 서로 서로 위치가 확실히 다르지요. 그 위치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끈이란 적당한 (내지 적당하지도 않은) 아부인데, 대학에 제대로 다녀본 사람이라면 ‘비굴 모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배움이란 한국적 환경에서 머리를 잘 숙이는 걸 배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머리를 어차피 잘 숙여주는 사람보고 ‘감칠맛’ 같은 류의 표현을 왜 못쓰겠어요? 음이 있으면 양도 있고, 준비된 백성이 있으면 그 위에 군림할 군주도 나타나게 돼 있지요.

    혁명보다 ‘촛불’

    과연 만의 하나에 대한민국에서 혁명이라도 일어나면 이 비굴함의 일상화 분위기가 좀 없어질까요? 글쎄, 처음에는 좀 그렇겠지요. 러시아만 해도 1917년10월 직후의 분위기는 많이 좋아진 편이었어요. 한 때에 존대말 (Vy형) 안쓰기 운동과 같은 재미있는 현상도 일어났는데 말에요.

    그런데 나중에는 스탈린과 같은 형태의 반동이 어차피 혁명 정당 내부로부터 일어날 것이고, ‘세계 혁명’의 거창한 구호는 ‘국가 개조’의 민족주의적 개발주의 지향으로 바뀔 것이고, 과거의 모든 망령들이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아는 혁명 중에서 그렇게 끝나지 않은 혁명이란 아직도 없었지요.

    그러니까 저는 차라리 촛불 항쟁과 같은 밑으로부터의 대규모 집단 행동이나 청소년 인권 운동 등에 더 기대를 많이 걸어요. 그렇게라도 해서 민중적/개인적 자존심 회복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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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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