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 간 스미스씨, 24시간 연설
        2009년 02월 27일 09: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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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지구촌 곳곳의 극장가 스크린은 미국 아카데미 후보작 전시장이다. 가지각색 향신료를 버무린 듯 여러 요소가 두루 어우러진 ‘마살라 영화’라는 독특한 대중 영화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인도 영화가 헐리우드 영화의 엄청난 물량공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국 영화시장을 잘 지켜내자 거꾸로 헐리우드가 그 스타일에 공간마저 베낀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상을 몰아준 건 어쩐지 인도 영화시장에 대한 선전포고가 아닐까하는 의혹이 들긴 하지만 후보에 오른 작품들은 나름 ‘볼만한’ 수준과 내용의 영화들이니 그러려니 싶을 수도 있겠다.

    1929년에 시작된 미국 아카데미상은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가 전년도에 발표된 미국 영화와 미국에서 상영된 외국 영화를 대상으로 우수한 작품과 그 밖의 업적에 대해 해마다 이듬해 봄에 상금 한 푼 없이 달랑 길쭉한 사람 모양 트로피로 공치사하는 행사지만 그 파급력은 상금 몇 푼이 있고없고를 따질 필요가 없을 만큼 엄청난 이벤트다.

    헐리우드 최고의 해로 꼽히는 1939년에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본상을 비롯해 무려 11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며 흥행바람을 시상식장까지 몰고 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밀려 고작 원작상(포스터) 1개가 상을 받는데 그친 영화가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그리고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

    이 흑백영화는 그러나 잊혀지기는 커녕 미국 영화 연구소가 미국 영화 100주년을 기념해서 꼽은 가장 위대한 미국 영화 100편에 드는 고전이 되었다.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라는 제목에서 보듯 아주 미국적인 인물 스미스 씨가 미국 정치판의 수도 워싱턴에서 벌이는 좌충우돌 고군분투 아메리칸 드림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 영화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의 포스터

    이름부터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골 소년단 보이레인저의 단장 스미스 씨는 아이들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순진하고 착한 소시민, 세상물정 어두운 촌놈이다. 이런 스미스 씨가 상원의원이 되어 의회로 가게 된 건 순전히 어수룩해 보여서였다.

    정치권이랑 재력가가 야합해서 부당한 법안을 통과시켜 누이 좋고 매부 좋게 떡고물 나눠먹자고 쑥덕거리던 찰나에 스미스 씨가 사는 잭슨시의 상원의원 둘 가운데 하나가 덜컥 죽어버렸는데, 그 자리에 ‘땜빵’으로 데려다 허수아비로 세워놓기 딱 좋은 인물로 보였던 것이다.

    잭슨시의 또 다른 상원의원인 조세프 페인은 잭슨시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운 상원의원을 뽑으라고 지시한다. 새로운 의원이 될 사람 됨됨이에 대한 조건은 딱 하나, 페인과 그의 재정적 후원자인 짐 테일러의 댐건설 계획을 방해하지 않을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지사는 고민 끝에 보이레인저 단장인 제퍼슨 스미스 씨를 후보로 내세운다. 아이들과 다람쥐나 잡으러 쫓아다니는 순박한 촌뜨기야말로 정치판의 꼭두각시 역할로 적격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미스 씨는 그냥 어른이 아니었다.

    적당히 닳고 닳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넘어가기에는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 너무 많아서 정의와 용기를 미처 벗어버리지 못한 채 의회에 진출해 버린 순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뿐이랴. 그의 정의와 용기를 믿어 줄 아이들이 언론과 금권보다 더 크고 든든한 그의 ‘빽’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스미스씨의 ‘빽’

    얼떨결에 상원의원이 된 스미스는 죽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평소 존경하던 정치가인 페인 의원과 함께 워싱턴으로 향한다. 잭슨시의 월워크 계곡에 소년 야영장을 만들려는 꿈을 꾸고 있던 스미스는 그 계획을 입안해서 의회에 상정하려 하지만 월워크 계곡에 댐을 건설하려는 페인과 테일러의 계획과 맞부딪치면서 정치판의 쓴맛을 된통 보게 된다.

    그래서 이 초선 의원은 의회에 외롭게 서있게 된다. 다른 모든 의원들이 나라와 국민과 후손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올바른 일을 외면하고 권력과 금권, 당리당략에 매달려 똘똘 뭉친 판이다. 그들 다수 의원들은 이 초짜 정치인을 만만히, 아니 우습게 보았다.

    그래서 그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선배 정치인입네’ 하고 나서 훈계도 하고,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 미디어를 동원해 그를 짓뭉개버리려 한다. 그런데 스미스 씨는 물러서기는커녕 주저앉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꿋꿋하게 서서 버텨낸다. 잠도 안자고 무려 스물 네 시간 동안 내리 연설을 하면서.

    이 고지식한 의원에게 힘이 되는 건 조무래기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만든 소식지뿐이다. 그런데도 스미스 씨가 필사적으로 서있는 까닭은 의원의 의사발언권이 그의 권리이기 때문이며,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까닭이 정의를 지키는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며, 자기가 버티고 있어야 바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뜻과 힘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페인은 스미스를 등원시키지 않으려고 음모를 꾸미지만, 스미스 씨는 비서 선더즈의 도움으로 페인과 테일러의 음모를 알게 되고 상원 회의에 등원한다. 댐 건설 법안의 통과를 저지하기 위하여 스미스는 발언권을 양보하지 않는 한 계속 발언할 수 있다는 국회발언권을 이용해서 스물 네 시간에 걸친 연설을 이어나간다.

    음모에 빠진 스미스에게 적대적이던 여론이 차차 스미스에게 유리해지자 테일러는 언론을 매수해서 온갖 흑색선전을 퍼붓는다. 진실을 알리려는 스미스 씨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려는 순간 페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음모를 고백하고 스미스 씨는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다.

       
      ▲ 영화의 한 장면들

    스미스 씨가 구리기 그지없는 댐 건설 법안통과를 막아내기 위해 스물 네 시간 버티고 서서 연설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거대 언론에서 다뤄주지 않는 스미스 씨의 외로운 싸움을 소년단 소식지에 담아 방방곡곡에 퍼뜨리고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정의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소년들의 꿈은 왜 동화여야 하는가?

    이 영화는 아직 이 땅에서는 동화일까? 지긋지긋하게 되풀이 돼온 날치기 통과를 막자고 국회의장은 반드시 의장석에서 법안을 선포해야 한다는 법안까지 만들게 된 것이 얼마나 낯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는 의원들.

    그 의장석이라는 자리가 뜻하는 바를 의장이 앉는 물리적 ‘의자’로 착각하고 육탄 공세로 밀어붙여,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자리 뺏기에 성공했다고 만세 부르는 의원들. 그런 작태가 한심하고 부당하다고 꾸짖는 국민을 외려 진실을 모르는 사회불안집단으로 매도하는 의원들. 그들에게 아직도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는 동화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 여당 원내대표가 사회 대타협 운운하며 스미스 씨가 신념과 이상을 지키기 위해 버텨낸 행위인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제도인 필리버스터를 도입하겠다고 야당에게 당근을 내미는 척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여당 단독으로 미디어법을 기습 상정하는 후안무치한 짓을 저지르며 세상을 속이려 하는 것이리라.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에서 거대언론이 진실에 대해 입을 다물거나 사실을 왜곡할 때, 그 횡포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펼쳐 보인 소식지였다. 언론을 장악하고 통제한다고 목소리를 틀어막을 수 없고, 진실을 가릴 수도 없다.

    언론인들이 자신이 속한 매체가 아니라 총파업을 통해 진실을 알려야 하고, 개학을 앞둔 아이들이 책을 들고 학교로 향하는 대신 촛불을 밝히고 거리로 나서도록 만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인가?

    민주주의란 다수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다양한 소수의 권리와 평등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걸 모른다면 그들이 믿는 다수가 얼마나 고립된 섬인지, 소통불능의 고립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지게 되는지를 머지않아 깨닫게 되고야 말 것이다.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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