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 20년과 '우리 안의 MB'
        2009년 02월 25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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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민주화 이후 다섯 번째 대통령으로 이명박 씨가 취임한 지 1년이 지났다. 때가 때인지라 1년을 돌아보고 공과를 따지는 일은 자연스럽다. 다만 어떤 자리에 서서 어느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평가의 목적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짚을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이명박 정부 1년이 민주화 20년의 일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부동산 정책을 중심으로 ‘민주화 20년과 우리 안의 MB’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 김대중-이명박 ‘부동산’이 닮았다

    지난 1년간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여덟 차례의 부동산 대책은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전방위 경기부양 정책이다. 전임 정부의 핵심정책인 종부세 무력화를 비롯한 각종 부동산 부자 감세, 미분양 아파트 해소를 앞세운 건설재벌 지원책, 규제완화를 명분으로 한 투기규제 장치 해체, 뉴타운 재개발 확대와 10년간 500만채 공급 계획, 그린벨트 완화, 잠실롯데 신축 허용, 광역경제권, 4대강 정비사업과 수십 조 원대 사회간접자본(SOC) 예산 등 가능한 모든 투기촉진 경기부양책이 동원되고 있다.

       
      

    한국경제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건설투자 비중이 20%에 육박할 정도로 부동산 의존도가 기형적으로 높은 후진국형 산업구조에 발목이 잡혀왔다. 이른바 토건국가 현상이다. 토건국가 현상이야 말로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였다.

    경제위기는 부동산 분야의 구조조정을 자연스럽게 단행함으로써 후진국형 산업구조를 탈피할 절호의 기회이지만, 이명박 정부가 경제위기를 극복할 손쉬운 수단으로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선택함으로써 또 다시 부동산의 수렁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경제위기를 부동산 경기부양으로 돌파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매우 낯이 익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대중 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판박이다.

    부동산 정책, 김대중 정부와 판박이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말 외환위기가 발발한 가운데 당선되었다. 실물경제가 극심하게 침체하는 가운데 1998년 집값은 무려 -12.4%가 폭락해 정부 주택가격 집계 역사상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지만, 역설적으로 외환위기를 계기로 부동산 부문을 구조조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의 손쉬운 극복수단으로 부동산 경기 활성화대책을 사용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김대중 정부는 노태우 정부의 토지공개념제도를 폐지하고, 개발-공급-유통소비-보유-개발이익환수 등 부동산의 생애주기별로 각종 규제를 다 풀었으며 전방위로 경기부양 정책을 폈다. 곧이어 과잉유동성에 투기촉진 정책이 겹쳐 2001년 9.9%, 2002년 16.4% 등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지만 정부는 부동산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을 다 놓아버려 속수무책이었다. 그 결과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해체돼야 할 토건국가는 명맥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한국경제는 계속 부동산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부동산 정책의 목표는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지 않게 하고, 떨어지더라도 최대한 빨리 다시 오르게 하려는 데 있다는 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만들어놓은 결과와 같다.

    민주화 20년에서 김대중 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정치적으로 무엇 하나 닮은 게 없는 정반대의 극점에 있다. 남북관계나 인권·복지정책을 보면 두 정부의 차이는 극명하다. 그러나 부동산 정책이 다르지 않은 것은 경제위기 속에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가운데 집권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경제위기가 오고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니 투기규제 장치를 다 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동산 경기 부양에 나섰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후 첫 민주정부와 재집권에 성공한 보수 권위주의 정부는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를 ‘DJ-MB형’ 부동산 정책이라 부르려 한다.

    ‘DJ-MB형’ 부동산 정책

    물론 목표와 수단이 같다고 해서 철학까지 같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부동산 철학을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우나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현실화하기 어려운 수준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2. 노태우-노무현 ‘부동산’도 닮았다

    ‘DJ-MB형’과 정반대의 상황 즉 경제위기도 없고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는커녕 폭등하는 상황에서 집권한 대통령들은 어땠을까?

    노태우 정부(1988∼1992)와 노무현 정부(2003∼2007)는 집값이 크게 뛰는 가운데 집권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 집권 첫 해 인 1988년 집값은 13.2%나 뛰었고, 이듬해에는 14.6%가 올랐으며, 집권 3년차인 1990년에는 무려 21.0%가 폭등했다. 그런 탓에 노태우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집값을 잡는 데 온 힘을 다 빼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에서 당선된 2002년은 집값이 무려 16.4%나 치솟아 1990년 이후 가장 크게 폭등했다. 노대통령은 취임 첫 해부터 만사를 제쳐두고 집값을 잡기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지만 2003년 한 해 동안 5.7%가 올랐다. 2004년 -2.1%로 한 숨 돌리는가 싶었지만 2005년엔 다시 4.0%가 올랐고, 2006년엔 무려 11.6%가 치솟았다.

    이처럼 노태우-노무현 대통령은 집값이 폭등하는 가운데 집권했기 때문에 임기 내내 집값을 잡기 위해 강력한 투기 억제 정책을 펼쳤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 1가구 1주택 비과세 요건 강화, 양도세 누진과세, 종합토지세 조기 실시 등을 뼈대로 한 부동산종합대책(8.10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1989년에는 토지초과이득세,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 등 토지공개념의 칼을 빼들고 투기를 잡으려 했다.

    1990년에는 대기업의 토지과다보유 억제, 비업무용 부동산 6개월 이내 처분, 기업과 금융기관의 부동산 신규 취득 억제를 내용으로 하는 5.8대책을 내놓았다.

    노태우 정부가 토지공개념을 축으로 부동산 과다 소유 제한을 제한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노무현 정부는 종합부동산세를 축으로 한 세제정책과 각종 투기규제 장치의 재도입 그리고 주택담보대출 제한 등을 병행했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종합부동산세 도입, 1가구3주택 양도세 중과, 투기지역 주택담보인정비율(LTV) 40% 강화 등을 뼈대로 하는 10.29대책을 내놓은 데 이어, 2005년에는 8.31대책을 발표해 종합부동산세 대상을 확대하고 2주택에 대해서도 양도세를 중과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2007년 들어서는 투기지역 담보대출을 강력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분양가 상한제를 재도입했다.

    사실 두 노 대통령은 성이 같다는 것 빼고는 닮은 게 별로 없다. 노태우 대통령은 비록 직선으로 당선되었지만 전두환 군사독재의 뒤를 이은 군인출신이며,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군사독재 아래서 변호사 신분으로 노동자를 위해 노동문제에 개입했다 구속된 적이 있을 정도로 민주화 운동의 선두 대열에 섰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때 집권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각각 토지공개념과 종합부동산세라는 비장의 칼을 꺼내들고 임기 내내 투기와의 전쟁을 벌인 것이다. 민주정부만이 아니라 군사독재의 후신인 권위주의 정부도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면 민주정부 이상의 투기억제 정책을 펴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고, 두 정부가 투기를 잡는 무기로 썼던 토지공개념과 종합부동산세가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고 후임정권으로부터 사실상 폐기 처분됐다는 점까지 닮았다. 나는 이를 ‘노-노형’ 부동산 정책이라 부르려 한다.

    ‘노-노형’ 부동산 정책

    물론 투기를 규제하려는 정책을 편 것이 노태우 정부와 닮았다고 해서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폄하할 일은 아니며, 수도권 신도시 개발 등 주택 200만호 공급정책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킨 노태우 정부의 한계도 눈감을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는 보유세제 도입, 실거래가 확립과 거래 투명화, 국민임대주택 공급 확대 등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결과적으로 집값을 잡는 데 실패해 정권을 넘겨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부동산 가격 폭등기에 펼친 부동산 정책에서 민주정부 다운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 점이 뼈아프다.

    사실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일면 투기 규제지만, 수십 개의 신도시개발 정책에서 보듯 일면 투기 촉진의 성격을 아울러 안고 있었다. 투기규제정책 조차도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함으로써 유동성 관리에 실패했다.

    이런 점에서 참여정부는 부동산 정책을 주거복지 중심으로 펼쳐야 한다는 막연한 철학은 있었지만 변화된 조건에서 부동산 투기에 대한 체계적인 정책이 준비되지 못함으로써 결국 토건국가를 유지시키고 정권까지 내준 결과가 되었다.

       
      

    3. ‘부동산’에서 민주정부 다운 면모 보여주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주요 정부가 정치적 성격과 상관없이 집권 당시 부동산 사장 조건에 따라 비슷한 기조로 부동산 정책을 펴는 현상은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와 관련이 있다.

    사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 경험으로 보면 부동산 정책은 민주화 이전과 이후 정권 간에 별 구분이 없다. 다만 부동산 값이 너무 오를 때 대통령이 됐느냐, 가격이 너무 떨어질 때 대통령이 됐느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국가보안법의 엄호를 받는 ‘사유재산 제일주의’로서의 절대적 토지사유권을 보장하고 ‘해방 후 최초의 부동산 투기’인 귀속재산 헐값 불하를 단행한 이승만 정권, 공업중심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각종 개발정책을 추진한 박정희 정권이 그 출발점에 해당한다.

    그 뒤 역대정권은 지나친 투기촉진 부동산정책으로 땅값, 집값이 치솟고 국민의 저항이 격렬해져 정권과 체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정권 차원에서 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이나마 투기를 자제시키는 정책을 펴기도 한다. 개발 군부 독재정권이었던 박정희 정부나 전두환 정부 때도 이 같은 현상은 있어왔다.

    부동산 정책, 민주화 이전이나 이후나

    그 결과 대한민국은 대자본을 정점으로 하고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비정규직을 최하층으로 하는 노동시장의 먹이사슬 뿐 아니라, 건설재벌을 정점으로 하고 무주택 빈곤층을 최하층으로 하는 부동산의 먹이사슬이 동시에 쉴 새 없이 작동되는 토건국가 즉 부동산 계급사회로 나아갔다.

    부동산 먹이사슬을 해체하고 부동산 의존도가 높은 후진국형 경제구조를 뛰어넘는 것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해 투기가 하늘을 찌를 때 집권한 두 노대통령의 부동산 정책은 ‘투기와의 전쟁 선포’라는 언술과는 다르게 투기를 잡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부동산 먹이사슬을 끊는 데도 실패했다. 오히려 두 노대통령은 각각 연간 54만 채와 51만 채씩 주택을 공급함으로써 건설재벌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토지공개념이나 종합부동산세를 앞세운 ‘노-노형’ 부동산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정책 수단의 적절성 문제와 함께 정책의 목표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DJ-MB형’은 말할 것도 없지만 ‘노-노형’ 부동산 정책 역시 부동산 의존도가 지나치게 큰 산업구조 자체를 개혁하려는 데까지는 목표를 두지 못했고, 정권과 체제의 위기를 미봉적으로 해소하는 데 현실적 목표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투기국면이 끝나면 다시 투기촉진 경기부양으로 되돌아가는 점은 민주화 이전이나 민주화 이후나 다르지 않았다. 1990년대 세계화를 내세운 김영삼 정권의 준농림지 도입과 난개발정책, 외환위기 극복을 내세운 김대중 정권의 토지공개념 제도 폐기와 다양한 투기규제 완화정책은 정권과 체제의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 다시 투기 촉진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특히 ‘DJ-MB형’에서 알 수 있듯이 경기침체나 경제위기가 덮칠 경우 투기촉진 정책은 극단으로 치달아 부동산 경기부양에 한국경제의 승부를 거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보수 권위주의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두 번의 민주정부도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부동산 망국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다르지 않았다. 마음속으로야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실제 행한 정치행위로는 차이를 알 수 없다.

    이것은 결국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를 주도한 세력이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돼온 부동산 문제에 대해 독자적인 철학을 정립하고 이를 바로잡을 제대로 된 정책대안을 준비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20년 동안 정권은 보수에서 민주를 거쳐 다시 보수로 교체되었지만 부동산 정책을 담당하는 부동산 관벌은 어느 정부에서나 교체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경제가 건설재벌을 정점으로 한 부동산 먹이사슬에 얽혀들게 되고, 한국사회가 부동산으로 계급을 이루는 부동산 계급사회로 빠져드는데 민주정부도 공모해왔거나 최소한 방조해온 셈이다.

    민주정부를 주도한 세력 외에 사회단체나 진보정치세력도 조금의 양적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민주정부의 한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정부든 보수 권위주의 정부든 한국경제의 부동산 의존도를 높이고 부동산 먹이사슬을 쉴 새 없이 작동시켜왔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야 말로 민주화 20년의 가장 큰 비극이라면 비약일까.

    4. MB 1년은 민주화 20년의 일부

    돌아보면 노태우 김영삼의 ‘권위주의 10년’의 결과로서 김대중 노무현의 ‘민주정부 10년’이 등장했고,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는 민주정부 10년의 결과로서 출범했다. 이명박 정부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태어날 이유와 근거가 분명히 있기에 국민의 선택을 받아 태동한 것이다.

    그 이유와 근거는 민주정부 10년의 실패이며, 부동산 분야에서도 이 점은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 부동산 정책 평가는 민주화 20년 특히 민주정부 10년 동안 부동산 정책이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평가로 나아가야 하며,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부동산 철학과 정책대안을 세우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명박 정부 1년은 많은 문제점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1년을 우리와는 상관없는 남의 집 일로 보고 ‘MB 비판 경연대회’식 평가로 끝낸다면 한마디로 남는 게 없다. 이명박 정부 1년에 나타난 공과는 민주화 20년 속에서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시야를 단순히 ‘MB 1년’이 아니라 ‘20년 속의 1년’으로 넓혀야 한다. 그럴 때만이 ‘우리 안의 MB’의 뿌리를 찾아내고 극복 방안을 만들 수 있으며, 이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블로그 ‘손낙구의 세상공부‘에 올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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