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LCR의 40년 역사
    2009년 02월 24일 11: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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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을 제안하고 주도한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은 신당의 결성과 함께 해산을 결정했습니다. 이들은 이후 신당 안에서 하나의 ‘정파조직’으로 존재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당내 여러 정파 중의 하나라기보다 ‘최대’정파이며 사실상 당의 절대다수파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LCR이 모조직인 제4인터내셔널통합서기국USFI의 실질적인 중앙당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에 본조직의 해소는 대단한 결단임과 동시에 어떠한 기득권도 스스로 부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글은 LCR의 고참 활동가인 프랑소와 꾸스딸François Coustal이 해산과 함께 제4인터내셔널 기관지인 인터내셔널뷰포인트International Viewpoint에 LCR의 40년 역사를 간추린 것입니다. -옮긴이

 

   
  ▲ 2009년 2월 5일 생드니에서 열린 LCR의 해산총회에서 연설하는 고참투사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ïd. 배경에 68혁명 당시의 포스터가 비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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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5일 목요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igue communiste révolutionnaire(이하 LCR)의 제18차 당대회에서는 조직의 해소를 결정했다. 이는 반자본주의신당Nouveau Parti anticapitaliste; NPA의 결성을 위한 준비작업의 일환이다. LCR은 지난 40년간 여러 이름(적색확산그룹Cercles des diffuseurs de Rouge, 공산주의자동맹Ligue communiste, 혁명적공산주의전선Front communiste révolutionnaire, 그리고 LCR)을 거치면서 지속된 도전의 역사였다.

1969년 4월

   
  ▲ 1972년 간행된 LCR의 출판물 표지. 표지의 그림은 제4인터내셔널의 상징이다.

공산주의자동맹 탄생하다! 1968년 가을, 혁명적청년공산주의자Jeunesse communiste révolutionnaire와 국제주의공산당Parti communiste internationaliste 출신의 투사들이 결집한 혁명적 분파(이 두 단체는 그해 6월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와 수많은 ‘5월의 전사들’이 새로운 정치신문 루즈Rouge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몇 달간의 토론을 거쳐 공산주의동맹(이하 동맹)이 탄생했다.

동맹은 레닌주의와 반스딸린주의 전통을 따르는 혁명조직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동맹은 또한 레온 뜨로츠키에 의해 건설된 제4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지부가 됐다. 그 즉시 동맹은 당시 27세의 알랑 크리빈Alain Krivine을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

1972년 6월

"그들이 장관이 됐을 때" 이것은 사회당과 공산당이 공동정부강령에 합의하고 며칠 뒤 동맹이 발행한 소책자의 제목이다. 어떻게 개혁주의 해법이 야기할 모순을 피하면서 단결과 변화를 바라는 좌파 모두의 열망에 집중할 수 있을까? 어떻게 종파적 고립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제도권 좌파와 단절하지도 않으면서 정치적 독립성을 지켜낼 수 있을까? 수많은 논쟁이, 긴 시간 동안 동맹 안에서 진행됐다.

1973년 6월

   
  ▲ 해산총회를 특집으로 다룬 LCR의 기관지 루즈Rouge.

파시스트들의 집회, 동맹의 해산. 1973년 봄, 동맹은 입영연기를 제한한 드브레Debré법에 맞서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저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6월에는 경찰이 비호하는 극우파 신질서Ordre nouveau그룹의 인종주의 집회를 저지하기 위한 반대데모를 대중에게 제안했다.

이로 인한 대치의 결과, 정부는 동맹을 금지했다. 동맹의 활동가들은 신문 루즈를 중심으로 재결집했고, Lip공장의 노동자들(1973-74년 노동자들에 의해 자주관리 됐던 프랑스 시계회사-옮긴이)을 지지하는 집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피노체트 정권에 희생된 칠레 인민들과의 연대에 적극 결합했다.

1974년 5월

군복을 입어도 당신은 노동자입니다.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요구를 담은 "병사들의 호소"가 막사에 나돌았고 순식간에 수천 명의 서명을 받았다. 지난 수 년간 동맹은 징집된 병사(프랑스 징병제는 1996년 완전폐지 됐다-옮긴이)들 사이의 반군대정서와 개선요구에 기반한 개입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수십 개의 병사위원회가 조직됐고 소식지를 발행했다. 더 나아가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으며 병사들이 군복을 입은 채 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해에 동맹은 LCR로 재결성됐다-옮긴이)

1976년 3월

루즈, 주간지에서 일간지로. 권력을 목표로 하는 좌파의 관점에서, 매일 매일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전진시키고 결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LCR은 루즈를 일간지로 개편했다. 초기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일간지실험은 조직의 재정능력을 웃도는 것이었다. 루즈는 1979년 처음의 주간지 형태로 돌아갔다.

1977년 가을

여성해방 없이 사회주의는 없다. 68혁명 이후, 여성해방운동의 폭발은 동맹에 충격을 줬고 여성주의(페미니즘)와 자율운동에 대한 토론을 촉발했다. 특정한 억압, 임금차별, 폭력에 반대하고 피임과 중절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여성주의 ‘계급투쟁’ 흐름은 자본주의 착취와 여성의 억압, 계급투쟁과 여성주의 투쟁을 결합하는 이론화를 시도했다. 1977년 11월, LCR은 여성 서기secretariat의 주도로 여성주의기관지Cahiers du féminisme를 발간했다. 이 잡지는 1998년까지 발행됐다.

1985년 1월

   
  ▲ NPA 회의에서 발언하는 프랑소아 꾸스딸

카낙과의 연대. LCR은 프랑스 좌파정부의 지시로 정보국GIGN이 저지른 카낙 독립운동의 지도자 엘로이 마초로Éloi Machoro의 암살에 항의했다. 1970년대 이후 LCR은 항상 프랑스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누벨깔레도니Nouvelle-Calédonie의 사회주의독립운동과 파르티잔에 대해 전투적 연대를 보여줬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쟁, 니카라과혁명, 사파티스타봉기,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투쟁 같은 반제국주의 저항에 항상 함께 했다. (프랑스령 누벨깔레도니에서는 1985년 독립을 주장하는 카낙사회주의민족해방전선Front de Libération Nationale Kanak et Socialiste; FLNKS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 투쟁은 10년이 넘게 계속됐다. 카낙은 원주민들이 누벨깔레도니를 일컫는 말이다-옮긴이)

1988년 5월

좌파의 새로운 노선? 대통령선거에서 LCR은 공산당에서 이탈한 삐에르 쥐깽Pierre Juquin을 지지했다. 수많은 위원회가 건설됐고, 선거운동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그 성공을 표로 환산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건설할 당의 개념과 LCR을 뛰어넘을 전망에 대한 새로운 토론이 시작됐다.

1989년 7월

   
  ▲ LCR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로고.

우리에겐 점거해야할 바스띠유가 남아있다. 프랑스대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은 서방선진7개국회담G7을 파리에 유치했다. 이에 화답해 LCR은 제3세계 부채 탕감을 주장하고 ‘세계의 도살자들’에 반대하는 좌파연대 캠페인을 주도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Ça suffat comme ci"는 구호아래 조직된 캠페인은 대규모 집회와 바스띠유궁에서 열린 콘서트로 진행됐다. 콘서트에는 좌익가수인 르노Renaud와 남아공의 쟈니 클레그Johnny Clegg등이 참가했다. 이는 훗날 열릴 대규모 반세계화 집결의 시작을 보여줬다.

1992년 11월

새 시대, 새 강령, 새로운 당. LCR 당대회에서 채택된 선언 "가능성의 좌파를 향해"가 베를린장벽의 붕괴, 소련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복원이 야기한 논쟁을 종합했다. 스딸린주의 체제의 실패는 결코 ‘역사의 종말’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계속된다. 그러나 국면이 변했다. 자본주의체제와 결별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을 규합해 새로운 당을 건설하고 해방에 이르는 새로운 계획을 도출할 필요가 있다. 그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 서로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1995년 11월-12월

쥐뻬Juppe 플랜에 대항해. 대통령 선거에 불참한 대신 LCR은 1995년 11월과 12월 쥐뻬 플랜에 대항하는 파업과 집회에 활발하게 참가했다. 우파정권의 총리 쥐뻬는 사회복지의 해체를 시도했고 그 첫 걸음으로 철도노동자들의 연금을 공격했다. 노동조합과 이에 연대한 활동가들은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저항했다.

1999년 6월

유럽의회로 간 혁명가들. 의석획득을 위한 전국 5% 득표 기준을 넘겨 LCR과 또 다른 뜨로츠키주의정당 노동자투쟁Lutte ouvrière; LO의 연합은 5명의 유럽의회 의원을 당선시켰다. LCR에서는 알랑 크리빈Alain Krivine과 로셀리나 바케타Roseline Vachetta가 당선됐다. 이 선거는 이후 혁명적 좌파가 비록 소수지만 선명하고 실질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 혁공동LCR과 노동자투쟁LO 연합리스트의 선거벽보. 두 뜨로츠키주의 정당의 연합은 90년대 후반 극좌파 정치가 프랑스에서 대중적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2000년 6월

혁명적 재결집의 시기. 동맹시절부터 LCR은 다른 정파를 포괄해왔다. 70년대 초기에는 통일사회당Parti socialiste unifié; PSU의 한 분파가 들어왔고, 1979년에는 노동자공산주의조직Organisation communiste des travailleurs; OCT의 소수파가 입당했다. 2000년, LCR의 제14차 당대회에서는 노동자투쟁에서 추방당한 동지들이 만든 노동자의 목소리Voix des travailleurs와의 통합문제를 놓고 투표가 이루어졌다.

이 통합은 혁명적 좌파에게 만연한 구습 – 조그만 차이로 쉽게 분열되는 전통과 단절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로도 혁명적좌파Gauche révolutionnaire그룹의 소수파,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Socialisme par en bas그룹 등 여러 정파가 LCR에 둥지를 틀었다. (LCR은 제4인터내셔널통합서기국의 프랑스지부로 시작됐지만 해산하는 시점에서는 단일정파조직이 아니라 10여개의 서로 다른 정치경향이 공존하는 다원주의 정당이었다. – 옮긴이)

2001년 6월

   
  ▲ 두 차례 LCR의 대선후보로 출마했으며 당의 대변인이었던 올리비에 브장스노.

정리해고를 금지하라. 6월 9일, 수만의 군중이 일자리를 축소하는 계획에 반대하며 정리해고를 법으로 금지할 것을 요구하는 행진을 벌였다. 이 운동은 식품회사인 LU의 노동자들이 시작했다. 운동은 곧 ‘구조조정’의 위협에 직면한 기업의 노동조합들과 쉬드SUD노조, 통일노조연맹FSU, 프랑스노총CGT의 연대로 확장됐다.

또한 여러 좌익 정치정당들이 운동에 가세했다. 공산당, 노동자투쟁, 아나키스트인 자유대안Alternative libertaire, 그리고 물론 LCR도. 6월말, LCR 전국위원회는 다음 대선에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후보는 올리비에 브장스노Olivier Besancenot, 27살의 체신노동자였다.

2002년 4월

우리의 삶은 이윤보다 소중하다. 이것은 브장스노의 선거구호였다. 점진적으로 유세에 참가하는 이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후보등록에 필요한 500인의 서명이 완료되는 순간부터 LCR은 그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규모로 우리의 메시지를 언론을 통해 전달할 수 있었다.

격변은 사회당 후보인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의 표가 4.25%라는 브장스노의 놀라운 득표에 의해 잠식당해 1차투표에서 탈락하면서 벌어졌다. 그러나 개표결과가 나오던 4월 21일 저녁, LCR은 프랑스의 모든 도시에서 파시스트 르 뻰Le Pen에 반대하는 행진의 선두를 지켰다. 반대운동은 2차 투표가 열리는 2주 뒤까지 계속 확산됐다.

2003년 봄

"총파업! 총파업!" 몇 달동안 공립학교의 노동자들은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혁과 충돌했다. 집회는 교사들의 수업거부파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파업은 연금개악에 맞서 공공부문으로 확산됐다. 정부는 연금수급에 필요한 기간을 40년으로 연장하려 했다.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함께 LCR은 총파업의 전망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다.

2005년 3월

   
  ▲ 신당결성에 맞추어 프랑소와 꾸스딸이 쓴 책 "반자본주의신당의 놀라운 역사" 표지

유럽헌법 "반대" 모든 기업과 정당, 언론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유럽헌법안은 다수 대중의 반대로 부결됐다. 이것은 수만명의 인민들과 LCR을 비롯한 여러 정치세력이 연대하고 결집해 수 개월 동안 집중 선전한 결과였다.

11월에는 경찰에 쫓기던 두 젊은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도시의 집단거주지역을 중심으로 저항이 일어났다. 저항은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직면했다. 차별과 경찰폭력에 대항하는 청년들의 요구를 지지한 LCR의 태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거나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기성좌파들의 태도와 대비됐다.

2007년 6월

반자본주의운동을 결집하라. 유럽헌법 부결운동경험을 연장해 대선에 단일후보를 출마시키려는 노력은 사회당에 대한 태도문제를 놓고 결국 무산됐다. LCR은 올리비에 브장스노의 출마를 결정했다. 대선에서는 사회당 왼쪽의 후보들이 모두 고전을 면치 못한 데 비해 브장스노는 5년 전보다 3만표를 더 획득했다.

이 결과와 더불어 사회당 후보의 대선패배, 더 나아가 사르코지Sarkozy 정권에 대한 사회당의 무능으로 인해 LCR은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 그것은 ‘좌파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좌파’를 강화할 필요성이다. 6월, LCR의 지도부는 신당결성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기로 결정했다. 9월, 브장스노는 이 구상을 대중화했다. "LCR은 자기 역사와 조우했다."

   

2008년 1월

신당건설은 시작됐다! LCR의 제17차 당대회는 "노동운동 내 여러 정파들의 뛰어난 전통들을 하나로 그러모아" 새로운 반자본주의 정당으로 이행하기 위해 "LCR을 뛰어 넘는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2008년 3월 지방선거를 거친 후 300개가 넘는 지역위원회가 신당결성을 위해 조직됐다. 2009년 6월 현재, 476개의 위원회에 9,123명의 활동가(당원을 말함-옮긴이)가 함께 하고 있다.

반자본주의 신당NPA과 함께 새로운 도전의 막이 올랐다!

* 원문출처: International Viewpoint online magazine: IV409 (Februar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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