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세종, 정조 & 조세개혁
        2009년 02월 24일 09: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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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나 지금이나 조세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돈과 재산이 달린 문제이니 이에 대해서 고분고분할 사람은 결코 없기 때문이고 특히 그것이 힘 있는 계층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제대로 하지 않고는 ‘개혁적’이라는 평가 내지 ‘좌초된 개혁’이라는 평가를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황논리에 밀려 기존 제도대로 운영하였다면 이에 대해서 좋은 평가는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지금 현 정부가 부자감세를 노골화하는 데에는 노무현 정부의 변죽만 울리는 조세개혁이 한 몫했다. 복지를 하려면 증세가 필수적이고, 증세에 대한 지지여론이 40%에 가깝다면 나머지는 정치의 몫일 것이다. 그런데도 노무현 정부는 비젼2030을 통해 국채로 복지를 확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표명하였고, 그 와중에도 주세를 늘려 복지를 하겠다는 60년대식 사고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물론 일시적으로 빚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국가나 개인이나 빚을 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갚아야 하는 것이고, 특히 국가는 이를 세금으로 갚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영정조의 조세개혁 비교

    나중에 갚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역사상 보면 1차대전 직후의 영국처럼 예산의 50%가 국채이자로 지불된 경우도 있었다. 이 정도면 정부는 국채 보유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텐데 당연히 노동당은 이러한 말도 안되는 상황을 틈타(?) 대약진한다.

    노무현 정부의 조세개혁이 얼마나 무의미했는가는 우리나라의 조세구조를 보면 명확해진다. 2005년도 소득세, 법인세 등 OECD 분류코드 1000에 해당하는 것이 OECD 평균은 13%, 한국은 7.5%(5.5% 포인트 차이). 소비세 등 OECD 분류코드 5000에 해당하는 것이 OECD 평균은 11.4%, 한국은 8.8%(2.6% 포인트 차이)이다.

    즉, 복지재원을 마련하려면 소득세 등에서 세금을 늘려야 하는 것인데 노무현 정부는 자연 증가분을 제외하고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개선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조선시대에 빗대어서 이야기하면 가장 비중이 큰 전세(田稅)에 대해서 개혁을 하지 않으면, 조선시대의 조세, 재정의 개혁조치는 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다. 균역법도 중요하고 대동법도 중요하지만 아마도 세수의 60~70% 이상은 족히 되었을 전세에 대해서 개혁조치 없이 조선왕조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정조 시기에는 마치 노무현 정부처럼 전세에 대한 개혁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

    원래 조선시대의 전세는 제대로 시행되었는지는 검토가 필요하지만 특히 세종이 만든 체제는 매우 혁신적이었다. 전분6등법, 연분9등법이라고 불리워진 이 과세방식은 제대로 시행되었다면 지금의 종부세를 능가하는 세제였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은 전지를 토지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전분 6등법), 다시 매년 풍흉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연분9등법) 그에 따라 세부담을 달리 했다.

    종부세를 능가하는 세종의 조세정책

    경국대전에 규정된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에 의할 경우 토지의 비옥도와 그해 수확량에 따라 전세는 1등전이 가장 풍년인 상상년인 경우와 6등전이 하하년인 경우 면적 대비로 해서 세부담이 20배 가량 차이가 나게 된다.

    실제로 당시 전의 생산량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세제는 현재 기준에서 보면 제대로 징수되기만 하면 혁신적인 세제였다.

    전분 6등법은 토지별로 면적을 측정하는 자의 길이가 달랐는데, 그 결과 토지의 면적 단위인 1결이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즉, 비옥한 토지는 면적을 좁게, 비옥하지 않은 토지는 면적을 넓게 계산하여 토지의 면적을 계산하는데 같은 1결이라고 하더라도 1등전의 면적은 6등전의 4분의 1에 불과하게 된다.

       
      ▲전분6등법에 의한 면적 비교
      * 周尺으로 1자가 0.207㎡라 한다.
      ** 자의 길이를 m로 환산한 것이다.
      *** 1파는 1등전에서 6등전까지 각기 다른 자로 사방 한자를 의미함. 1속(뭇)은 10파(줌), 1부(짐)는 10속, 1결은 100부임
      **** 1등전의 면적을 1이라고 할 때, 면적의 비율임

    연분 9등법에 의할 경우 세율은 다음과 같다.

       
      ▲연분 9등법에 의한 세율
      * 1결당 세수

    연분9등법 표에 의할 경우 하하년의 경우 상상년보다 전세부담이 5분의 1에 불과하고, 1등전의 1결은 실제 면적이 6등전의 4분의 1에 불과하니 1등전이 상상년인 경우와 6등전이 하하년인 경우의 세부담은 20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제대로 시행될 경우 상당히 획기적인 누진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현재에도 토지나 재산에 대한 과세는 과세표준을 어떻게 설정하는가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분 6등법과 연분9등법의 경우, 양전시에 토지 등급의 산정이 제대로 될 수 있는지와 풍년이냐 흉년이냐의 등급 설정이 객관적으로 되는가가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양전을 근 100년마다 한 번 하다보니 자의 길이가 달라 어느 자를 쓸 것인가에 대한 논쟁까지 일기도 하였으며 경자양전 이후 행해진 읍별양전의 경우 수령과 토호의 결탁이 더욱 심하여 양전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제도는 좋았으나

    풍흉에 대해서도 경국대전에서는 매년 9월 보름 전에 수령이 그해 농사 형편을 심사하여 연분등제를 정하고 읍내와 사면을 각각 나누어 등급을 정하고, 관찰사가 이를 심사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며, 의정부와 육조가 함께 의논하여 다시 임금에게 아뢰고, 수세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질에 있어서 연분등제가 제대로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수령들이 직접 이를 심사하지 않아 감고에게 맡기어 뇌물을 주는 관행이 횡행한다는 사실이 이미 성종 때부터 논의가 되었고, 연분이 제대로 되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이론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속대전에서는 연분9등법을 폐지하고 전세로 1결 당 4두를 걷고 삼수미로 1결당 2두 2승을 징수하는 것으로 변경된다. 이는 당시 조선왕조의 징수 능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세수 파악이 제대로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라리 세금을 획일적으로 거두는 것이 징수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분9등법의 후퇴는 양질의 토지를 보유한 자들로부터 많은 전세를 징수하는 것을 사실상 후퇴시킨 것으로 이는 조선왕조가 징세편의에 보다 중점을 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4.

    문제는 영정조 시기에 기존의 1결 당 4두와 삼수미세 1결당 2두 2승을 징수하는 세제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당시 조세개혁의 핵심은 전국적인 토지조사인 양전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임진왜란으로 이미 토지가 황폐화되어 소유자와 비옥도가 달라졌는데 조선후기에는 이를 정기적으로 조사하는 양전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조세 개혁과 양반 토호의 반발

    양전은 원래 경국대전에 20년마다 한 번씩 하기로 되어 있는데 전국적인 양전은 숙종 때 행해진 경자양전(1719~1720) 이후 한번도 행해진 적이 없었다. 여기서 전국적인 양전이라고 하면 충청, 경상, 전라가 포함된 양전을 의미하는데 그 외의 지역은 세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즉, 영정조 시기에도 전국적인 양전은 없었고, 읍별 양전만 몇 차례 있었는데 전국적인 양전보다 읍별 양전은 양반과 토호, 지방수령의 결탁 가능성이 더욱 컸고, 그 효과도 크지 않았다.

    당시 양전이 어려웠던 이유는 간단했다. 양전이 시행될 경우 변화된 토지소유가 드러나 양반들이 세금을 더 부담하게 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숙종이 마지막으로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숙종 연간에 노론과 남인의 정치적 균형이 어느 정도 유지돼 왕이 일정 수준 권한을 발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양전사업은 양반층이면 노론이건 남인이건 누구나 반대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정조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남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권력에 밀려나 있었지만 여전히 향촌 지주였던 이들이 양전을 찬성할 리가 없었다. 영정조 또한 기존의 환곡제도나 보민사 제도와 같은 사소한 개혁조치만을 시행하는 정도로 이 문제에 임했던 것이다.

    특히 환곡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환곡의 양은 영조 때 최대로 증가하였는데 이는 시한폭탄 같은 것이었다. 결손이 발생되어 누적되기 시작하면서 이 환곡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왕조는 강력한 처벌로 일관했는데 처벌한다고 해서 없어진 환곡이 돌아올 리도 만무했고 그 부담은 모두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뿐이었다.

    조선왕조 몰락 위험성 심화

    환곡이 횡취되었음에도 이를 발각하지 못한 수령은 그 3분의 1을 추징하고 환곡이 유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발각하지 못한 수령은 4분의 1을 추징하며 각각 유배금고에 처하며 결손을 낸 아전으로서 1000석 이상이면 효수형에 처한다는 강력한 규정이 규정된 것을 보아도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이미 결손된 환곡을 회수하기 위한 온갖 무리한 행위는 조선왕조를 파멸로 몰아갔던 것이다.

    영정조 시기까지는 이 ‘두 현명한 군주’의 개인기로 시스템이 간신히 유지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영정조 시기는 조선왕조 몰락의 위험성을 심화시켰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개혁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이후의 상황은 모두 알다시피 세도정치와 식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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