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제는 노-심이 아니라 제도다
        2009년 02월 21일 09:13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노-심의 유령들

    하나의 유령이 진보신당을 떠돌고 있다. ‘노-심’ 이라는 유령이.

    최근 <레디앙>과 진보신당 당 게시판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작금의 진보신당의 무기력한 모습에 아쉬움을 표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회찬-심상정 공동대표의 지난 1년 동안의 무능을 성토하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나름대로 진보신당의 활동에 결합하려고 노력을 했던 한 당원으로서 진보신당의 모습이 무기력했다는 데에는 일단 깊은 공감을 표한다. 그리고 현재의 진보신당의 무기력이 일정 부분 ‘리더십 부재’에 있다는 진단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왜 ‘리더십’이 부재 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리더십의 부재’는 단순히 노-심의 무능력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리더십의 부재는 철저히 리더십을 발휘할 만한 공간을 창출해내는 제도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진보신당의 진짜 문제는 리더십의 부재가 아니라 제도의 부재, 조직의 부재이다.

    단적으로 말해 노-심은 지난 한 해 동안 당을 이끌고 나갈 어떠한 책임과 권한도 제대로 부여받아본 적이 없다.

    ‘무한 무책임’을 조장하는 5인의 공동대표제

    진보신당은 노-심 상임공동대표를 포함하는 5인의 공동대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대의제의 기본원리는 ‘대표성’과 ‘책임성’이다. 공적인 임무를 잘 수행해낼 만한 인물을 대표로 선출하여 그에게 공적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한과 자원을 주고, 그 업무를 잘 수행하는지를 지켜보고 그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급박한 창당 일정으로 인해 대표를 투표로 선출하지 않았고, 노-심 2인 상임공동 대표를 포함한 5인 공동대표체제로 가게 된다. 5인의 대표들은 공약을 내놓고 투표에 의해 선출된 바가 없기에 대표성이 별로 없다. 역시 공약을 내놓고 투표에 의해 선출된 바가 없기에 무엇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역시 불분명하다.

    노-심은 대표성을 가진 바 없기에 민주적인 정당에서 ‘권한’ 역시 별로 가질 수 없다. 더군다나 그 허약한 권한조차도 5인의 대표가 나눠가진 상황이다. 아무도 권한을 갖고 일들을 추진할 수 없고,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노-심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무한 무책임? 그 말이 맞다. 실제로 현재 5인의 대표들은 무한 무책임을 느끼고 있다. 다만 이는 그 개개인의 인물들이 아닌 현재의 공동대표제와 무조직 체계가 조장하고 있을 뿐이다. 리더십의 부재의 문제를 노회찬, 심상정 2인에게 묻고 있다는 사실부터가 잘못된 문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한 무책임 맞는 말이지만

    진보신당은 창당 후, 급하게 총선을 치러야 했고, 총선이 끝나자마자 다시 정신없이 촛불정국에 대응해야 했다. 촛불정국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조직에 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보신당은 창당 전에 했던 제2창당 약속으로 인해, 제2창당 토론회라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리고 제2창당토론이 대강 마무리 되고 나서 조직에 관한 논의가 시작됐다.

    노-심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건, 제2창당 토론을 생략하고 바로 조직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2창당에 관한 토론을 생략하는 것이 과연 용납이 되었겠는가? 노회찬, 심상정 두 명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선 아주 자그마한 실수도 치명적이다.

    이 상황에서 둘이 할 수 있었던 최적의 선택은 그냥 안전하게 제2창당 논의가 끝난 후에 조직체계 정비가 시작하도록 지켜보는 것 밖에 없었다. 결국 지난 1년간 노-심이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는 말이다.

    상임공동대표 체계는 급박한 선거일정으로 인해 경쟁보다는 정당 내부의 통합을 가져와야 했던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총선용인 ‘불가피한 선택’이 정당운영에서의 ‘최선의 결과’까지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지나친 낙관이 아닐까?

    하지만 몇몇 이들에 의하면 작금의 진보신당의 무기력은 모두 다 노-심의 책임이다. 무작정 두 명의 상임공동 대표를 비판하기 전에 진보신당의 현 실태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과 그에 기반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비전과 조직의 구성에 대해 객관적 근거를 갖고 검토할 수 있을만한 구체화 된 의견을 낸 적이 있는가. 아마 당연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진보신당이 왜 현재 잘 안 돌아가고 있는 지에 대해 최소한의 분석이 있었다면 소위 ‘노-심 리더십 부재론’이 나오지도 않았을테니 말이다. 만약 그런 의견을 냈는데도 두 명의 공동대표가 별 다른 이유 없이 그 의견을 거부했다면, 노-심이 당을 망치고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노-심 패권주의’와 ‘노-심의 무능’은 그저 총체적인 당 내부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유령일 뿐이다.

    ‘종북주의’, ‘노-심’ 두 개의 유령들 

    ‘데자뷔’.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현상 아닌가? 그렇다 바로 2007년 ‘종북주의의 유령’ 때와 정확히 같은 상황이다. 사실 1인 7표제와 같이 패권주의를 조장하는 기괴한 ‘제도’가 없었다면 민주노동당은 결코 ‘종북당’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상한 ‘제도’를 만들어 급기야 분당을 초래했던 것에 대한 반성은 오늘날 진보신당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남은 건 좌파 스스로의 무능을 드라마틱하게 가려줄 수 있는 종북주의 집단에 대한 일방적인 ‘악마화’ 작업과 ‘노-심’에 대한 책임 전가다.

    물론 나는 과거 민주노동당에 있어서 소위 주사파가 행한 ‘패악’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일단 그들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들의 이념이 과거 민노당의 주류가 되는 순간부터 민노당의 집권 가능성은 0%로 수렴될 거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반대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후지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NL을 제외한 범좌파 세력이 유능해지는 건 아니다.

    올바른 ‘제도’를 만들지 못했던 좌파들의 ‘무능’은 이렇게 손쉽게 ‘종북주의’와 ‘노심’의 유령들 사이로 가려진다. 남는 건 ‘종북주의 ‘와 ‘노심’만 사라진다면 온전한 민노당, 온전한 진보신당이 될 거라는 대책 없는 낙관과 과거에 대한 철저한 무반성, 다가올 장래에 대한 무준비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철저한 무반성의 결과로 지금 진보신당에서는 당 대의원 선출에 있어 민노당의 진짜 문제였던 ‘패권주의’를 조성했던 ‘1인 다표제’가 사실상 부활했다. 이는 현재 민노당에서도 시행하지 않고 있는 이상한 제도이다.

    실행 불가능한 요구

    자, 보아라 이제 더 이상 진보신당 내부에서 ‘종북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헌데 신당파들이 목놓아 성토하던, 모든 파행의 원인인 ‘종북주의’가 사라졌는데도 당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러자 이번엔, 당 내부의 무능을 가려주기 위해 ‘노심’의 유령들이 등장한다. 당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건 대의체계와 당 대표 체계, 한 마디로 조직이 정비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건 바로 중책을 맡아 놓고,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 노심의 잘못인 것이다.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노심은 5인 공동대표 제도 하에서 아무런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을 ‘강력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불가능한 요구에 직면했다. 그래서 노심은 유령이다. 한 편으로 아무런 실체도 없는 사실상 죽은 것이지만, 한 편으로 인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살아 있어야만 하는 그 무엇.

    그들은 어떠한 책임과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지만, 그 책임과 권한을 이용하지 못했다고 비난받고 있다. 그들은 결코 진보신당에 어떤 해악을 끼칠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지만, 해악을 끼쳐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정당운영이 무슨 ‘콩쥐팥쥐’ 이야기도 아니고, 시키지도 못할 일을 시켜놓고, 상대방을 무능하다고 욕하는 것은 대체 무슨 논리인가.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건 있지도 않은 ‘유령’들을 축귀하는 것보다 리더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고, 리더가 활동할 만한 공간을 만들어 주는 ‘제도’를 만들고 조직을 정비하는 것이다. 노-심의 유령들에겐 육체가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건 제도다

    중요한 건 제도다. 혹자는 ‘제도는 결국 사람이 운영하는 거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도 제도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을 경우의 얘기다. 아무런 바닥이 없는 무제도의 공간에서 무언가 유의미한 걸 창출해낼 수 있는 건 노-심이 아니다. 그건 신이다. 노-심이 사람인 이상 능력을 발휘하려면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노-심은 자신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만한 공간을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다.

    누군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능력을 발휘할만한 제반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영국 프리미엄리그 최고의 스타 호날두를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농구코트에 데려다 놓는다고 호날두가 조던만큼 농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얼마 전 확대운영위원회에서 결정된 ‘단일대표체제’ 도입을 환영한다. 단일대표체제는 리더 1인에게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만한 권한을 주고, 그에 대한 책임을 확실히 지게 할 수 있다. 물론 단일 대표가 무조건 선은 아닐 것이다. 그 대표는 임기 동안 전반적으로 잘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신생정당인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무엇인가’라도 일을 벌이는 것이다. 뭔가 잘못한다 해도 적어도 지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 그리고 만약 대표가 잘못했을 경우에도 우리는 다음 대표 선거에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단일대표체제 환영

    물론 단일대표체제 도입 하나만으로 지금의 진보신당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믿는다면 그건 노-심에 대한 비난만큼이나 진보신당의 현실태를 아무런 노력 없이 초월하려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노-심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으로부터 노-심을 변호하기 위해 주로 대표체계에 집중하긴 했지만, 실제로 당이 운영되려면 대표뿐만 아니라 제반 조직이 필요하다. 당원들의 의사를 대표할 대의원 체계, 중앙위원 체계 정비가 필요하고, 실제로 일을 집행할 집행부도 필요하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당대회가 중요하다. 이번 당대회는 앞서 말한 조직체계를 비롯하여 향후 진보신당의 뼈대를 이룰 제도의 초석을 놓는 중요한 자리이다.

    한편으로 제도도 결국 사람이 운영한다고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제도는 그 자체로 그것을 운용할 인간을 함축한다. 즉, 제도 자체가 편향성이 있다는 얘기이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어떤 철학으로 어떻게 당을 이끌지의 상당 부분을 제도가 결정한다.

    즉, 당이 지금과 같이 ‘무능’할 것이냐, 아니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생기 있는 모습으로 환골탈태할 것이냐는, 개개의 인물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당대회에서 만들 ‘제도’에 달려있다.

    그래서 나는 진보신당이 좀 더 유능해져서, 한국사회가 좀 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기를 바라는 모든 당원들에게 요청한다. 지금 당 게시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제도’ 논쟁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앞으로 진보신당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제도가 만들어질 3월 1일 당대회에 주목해달라고.

    제도논쟁에 관심가져야

    당 게시판에서는 현재 몇몇 당원들이 확대운영위가 내놓은 당 대의원 특별규정, 당헌, 당규 등에 대해 비판하고,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 만약 이들이 없었다면 당은 당내 민주주의를 심하게 왜곡하는 중앙위원 간선제를 채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지금과 같은 형태로 아무런 설명과 토론 없이 중요한 논의들을 얼렁뚱땅 마무리 짓는 비민주적인 관성을 갖게 됐을 지도 모른다.

    이런 파국을 막은 건 몇몇 용기 있는 당원들의 행동이었지만, 앞으로의 좋은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건 단지 몇몇 당원들의 용기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 좋은 제도를 만들어 더 좋은 진보신당을 만드는 일은 오로지 진보신당 제도 건설에 대한 더 많은 당원들의 더 많은 관심과 참여에 달려있다.

    나는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에다 사회적 약자에게 가혹한 한국의 빈약한 복지정책이 겹쳐진 지금 한국사회의 최악의 위기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정치이고, 현재 그 정치를 바르게 이끌어나갈 가능성이 있는 정당은 오로지 진보신당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모든 진보신당 당원들이 이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현재 진보신당이 만들려고 하는 ‘제도’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를. 꼭 당대회에 참가해 주시기를. 모두 함께 지혜를 모아 좋은 당을 만들어 나가는 일에 동참해주시기를.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