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나 보러갈까? 방울소린가 하는…"
    By mywank
        2009년 02월 20일 04: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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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 하나.

    동네 마트 계산대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뒤에서 사십대 후반은 넘어 보이는 두 아주머니가 나누는 이야기가 무심코 귀에 꽂혔다. 이야기 시작은 아주머니들끼리 함께 하는 모임에서 누가 누구를 따돌리느니, 그래서 다음 모임에는 빠지겠다느니 하는 일상적인 관계의 편안하지 않은 불만이었다.

       
      ▲ 영화 <워낭소리> 포스터

    한 아주머니의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다른 아주머니가 불현듯 제안했다. “그럼, 기분도 그렇고 한데 우리 영화나 하나 같이 보러갈까? 왜 방울소린가 하는…” 그러자 처음 서운함을 토로하던 아주머니가 냉큼 대답했다. “방울소리가 아니라 <워낭소리>. 나 그거 벌써 봤잖아. 극장에 혼자 가서…”

    그러면서 두 아주머니의 대화는 그 영화가 독립영화란다, 만드는데 몇 년이 걸렸다더라, 보는 관객도 참 울컥하던데 그 가족들은 그 영화 보면서 온갖 생각 다 들겠더라 하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마침 계산대에서 뭔가 잘못된 게 있는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두 아주머니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로 스며들었다. ‘내가 보자고 한 게 저 영화야. 우리도 어서 보자니까.’ ‘우리 회사는 단체로 보기로 했어.’ ‘아버지가 보여 달라고 하시더라.’ 등등.

    또 다른 대화 하나.

    안 유명한 영화감독 : <워낭소리> 봤어요?
    나 : 응. 벌써 봤지. 왜?
    안 유명한 영화감독 : 아니요. 보러 갔다가 매진이라 못 봤거든요. 아직 안 봤으면 같이 보러가자고 할까 했지요.
    나 : 그러게. 나도 평일 마지막 회 보러 갔었는데 객석이 거의 다 찼더라. <낮술>은 평일 낮에 봤는데 그것도 관객이 꽤 되더라.
    안 유명한 영화감독 : 요즘 독립영화가 갑자기 좋은 게 많이 나오는 걸까요, 관객이 바뀐 걸까요?

    이 대화들은 독립영화의 기록을 새로 쓰고 있는 <워낭소리>가 미치는 파장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제작비 대비 최고의 수익률을 내고 있는 영화, 독립영화사상 최고의 관객을 불러들이는 영화, 전국에 걸쳐 겨우 열세 개 예술영화 전용상영관에서 개봉해서 한 달이 넘게 장기상영을 이어갈 뿐더러, 스크린 숫자도 130개를 넘기며 전국 각지의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영역을 넓히고, 처음에는 10위권 밖에서 세어야 했던 박스오피스 순위를 점점 앞자리로 올리더니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 후보작들을 넘어 1위를 차지하는가 하면, 한미FTA를 밀어붙이며 독립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에 대해 정책적으로 억압하는 대통령까지 대국민 이미지 만들기용 감독 동반 관람쇼를 연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소문난 잔치가 기껍지만은 않은 까닭은 <워낭소리>가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냐 페이크에 가까운 다큐멘터리냐,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가며 재현했느냐, 감독의 회고를 위한 현실의 영상적 편집이냐 같은 평단의 논란 때문이 아니다.

    <워낭소리>의 흥행을 빌미로 독립영화를 또 다른 산업과 상업 논리 속에 재영토화하려는 정치권과 자본의 무식하고 파렴치한 작태 때문이다.

       
      ▲ <워낭 소리> 관람한 이명박 대통령과 이충렬(왼쪽) 감독 (사진=청와대)

    한국독립영화협회는 독립영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독립영화의 독립이란 흔히 말하듯 검열을 거부하고 자본을 적게 쓰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립은 ‘그 무엇을 위한’ 일일 때 그 의미가 완성된다. 화려하고 기름진 화면보다는 치열하고 정직한 장면들로 새로운 영상언어를 만들기 위해, 우린 상투적 영화공식에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한 사람의 인권, 소수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우린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다.

    우리는 독립이 삶과 영화의 진실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믿는다. 갖가지 타협과 흥정, 매스컴의 각광, 각종 영화제 초대장, 먹음직스러운 부페음식…. 이들로부터 초연하게 물러나 작은 진실을 위해 작은 카메라를 정조준 할 때 영화는 비로소 독립하는 것이다.

    독립영화의 영화란 단지 촬영과 편집, 녹음 등 기술적 과정을 거친 셀룰로이드를 의미하지 않는다. 혹은 돈을 벌기 위해 만드는 상품도 아니며 심심한 관객들을 잠시 달래주는 오락도 아니다. 우리는 영화가 사람의 욕망뿐 아니라 선의와 진심도 자극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매체라 믿는다.

    가깝게 느끼는 현실을 잠시 물러나 보게 하고 멀게만 느끼는 현실을 다가서 보게 함으로써 관객들이 세상을 새롭게 보고, 더 나은 자신과 사회를 위한 꿈꾸게 하는 영화를 우린 독립영화라 부른다.”

    문화부의 인큐베이팅 개악 정책

    그런데 지금 모처럼 독립영화도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문화부 장관이라는 이가 영화를 통해 문화적 앞날을 모색하고 더 넓은 독립영화의 지평을 열고자 하는 시야를 펼치기는커녕 독립영화에 대한 인큐베이팅 시스템이 필요하되 확실하게 될성부른 영화 몇 편에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개악 정책을 주장한다.

    날마다 <워낭소리> 소식으로 영화란을 채우는 언론 매체들은 수익금 배분이 어떻고 관객수가 저떻고 하며 독립영화에 자본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그러니 독립영화를 어렵사리 만들도록 애쓰고 극장에 올린 제작자가 ‘참담하다’는 속내를 내비치며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마음 아파 할 수밖에.

    <워낭소리>가 많은 관객과 소통하고, 그 소통의 과정에서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또다른 영화를 ‘독립적’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도록 힘을 얻게 되는 데는 물론 흥행 숫자며 수익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독립영화의 정신을 지키고, 더 많은 독립영화들을 위해 길을 내는 것이다.

    <워낭소리>를 통해 받는 감동이 사람과 소가 함께 한 40년 세월, 아스라한 시골 풍광, 삶과 죽음에 대한 관조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애썼는가, 앞으로도 독립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애써야 할 것인가를 느끼고, 감사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영화계는 소는 바글바글해도 더 이상 부리는 소가 없는 <워낭소리> 속 우시장과 마찬가지로 영화는 많아도 제대로 된 독립영화 한 편을 찾기 어려운 판이 될 것이다.

    독립영화의 ‘흥행법칙’

    <워낭소리>나 <낮술>이 스크린을 찾을 수 있었던 데는 이 영화들이 여러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큼 잘된 영화들이어서이기도 하지만, 이태 넘게 어려워진 영화제작 환경 속에서 상업영화 제작 편수가 엄청나게 줄어들어서이기도 하다.

       
      ▲ 영화의 한 장면

    <괴물>이나 <디워>처럼 스크린을 독점하는 상업영화들이 영화시장을 쥐락펴락하던 시절에도 <송환>이나 <우리학교>같은 독립영화는 높은 객석 점유율로 장기상영을 하곤 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부러 찾아가는 여러 영화제에서 단편영화는 늘 가장 먼저 매진되는 섹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화들보다 더 돈 되는 영화들이 차지한 멀티플렉스 극장 스크린은 독립영화에게 냉담했다. 그러다 요즘 개봉할 만한 한국영화 자체가 적어지고, 극장을 찾는 관객의 발길도 뜸해지자 상업영화관들이 스크린을 열게 된 것이다.

    다가오는 2월 23일, 그나마 독립영화가 TV를 통해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통로였던 EBS ‘독립영화극장’이 폐지되고 그 시간에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늘리기로 했단다. <워낭소리>의 소가 마지막까지 부려놓은 장작이 노부부의 겨울을 따뜻하게 덥히듯, 수많은 독립영화들이 우리 사회의 영화뿐 아니라 문화와 정신을 자극하고 다양하게 이끌어왔던 데 대한 대접치고 참 혹독하다.

    100만 명이 <워낭소리> 한 편을 보는 것보다 각각 만 명이 100편의 독립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 되는 날을 꿈꾸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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