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람시가 뭔감유? 카우츠키는 또 누구?
        2009년 02월 20일 10: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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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석사 과정 학생들의 지도 상담 시간이 있었어요. 저는 사실, 수업을 주당 4시간 이상 하지 않는데 이러한 상담시간은 꽤 많아서 약간 바빠지는 경향은 있습니다.

       
      ▲ 필자

    한 학생이 ‘중국 지식인들과 티베트 문제 해결의 가능성들’에 대한 논문을 쓰려는데 그 초점은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왕역웅, 왕휘 등)의 티베트관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진보적 지식인’에 대한 분석의 글이니까 일단 이론적 검토부터 해야 하는데, 제가 그람시와 만하임의 지식인론으로 적어도 2페이지 정도 써달라고 주문했습니다.

    문제는, 그 학생은 그람시나 만하임이 누구인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비판적 지식인’ 개념의 정립이란 그 두 사람을 뺄 수 없으니까, 일단 몇 시간을 투자해서 개인강의를 하듯이 『옥중노트』를 아주 길게 소개했어요. 그래도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의 차이는, 그 학생에게 거의 납득이 되지 않았던 모양에요.

    "유기적 지식인? 고등수학처럼 어렵다…"

    난생 처음 들어본 이야기이고 매체 등에서 전혀 쓰이지 않는 개념이니 고등 수학을 배우듯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그람시가 싫어서 안 배운 것도 아니고 노르웨이에서 석사까지 다 밟아온 젊은 ‘지식인 후보자’가 그람시 이름을 들어볼 확률이 대단히 낮아서 문제입니다.

    즉, 학생들에게 전달되어지는 ‘통상적 지식 체계’의 구조적 문제지요. 노르웨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전형’에 가까운 ‘초선진’사회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이야기를 사회적으로 ‘묻어두는’ 데에도 ‘초선진’ 급입니다.

    제 교수 분야는 사회이론도 아니고 동아시아학이기에 꼭 마르크스주의를 자주 끼워넣을 필요도 없지만, 예컨대 중국 공산당의 민족/민족주의/인민주의/다원적통일국가론 이론 등의 문제를 논할 때에 베른스타인이나 카우트스키, 오토 바우에르 등의 ‘민족’ 관련 이론들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 이론가들이 읽은 책들이니 그 전거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민족 식별 사업’이니 ‘자치주’ 이론이니 설명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벌써 9년째 강의를 하지만 여태까지 "나는 카우트스키가 누군지 안다"고 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어요.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독일 출신의 급진주의자’ 정도 아는 게 보편적이지만, 마르크스를 직접 읽어본 노르웨이 학생 역시 한 번도 발견한 적은 없습니다. 『공산당선언』이 무슨 책이냐 물어볼 때에 중국 학생들만이 그 내용을 대략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보통 일에요. 그 분들이야 – 소련 시절의 저와 마찬가지로 – 싫든 좋든 외워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노르웨이 학생들한테는 150년 이상이 된 유럽의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란 대개 백과사전에서의 아주 간단한 언급 수준으로만 인식됩니다. 물론 제가 접하는 학생의 다수는 사회학부가 아닌 인문학부 소속이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사회학부에서 가르치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오십보백보입니다.

    서울대는 맑스주의 대학!?

       
      ▲ 『그람시·문화·인류학』의 책표지 이미지

    이런 데에 비하면 서울대만 해도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훌륭하게 보존돼 있는 곳’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람시를 모르면 예컨대 사회대 대학원생 행세를 하기가 힘들겠지요? 아닌가요?

    물론 제 동네 도서관에 가도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을 빌려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요. 학교 서점에 마르크스주의 관련 노르웨이어 서적이 있는 것도 물론이고요. 그럼에도 이 위대한 전통이 학생들에게 ‘개 무시’를 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초,중, 고교 수업 때는 잘 언급이 안되는 게 큰 원인이겠지요. 노르웨이 노동당 역사야 이야기되어지지만, 그 노동당 초기에 마르크스를 읽은 사람이 주도했다는 부분은 교묘하게 빠지네요. ‘국민 정당’인 요즘 노동당으로서는 별로 반가운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그 다음에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나 그 이론가들이 거의 안다루어지고 공산운동사는 대체로 ‘비극의 역사’로 이야기되어집니다. 뭐, 스탈린 시대를 그렇게 이야기해도 큰 거짓은 아니지만,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는 폭력혁명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도, 폭력혁명을 지지해도 스탈린을 싫어했던 사람들도 많았다는 걸 사람들에게 설명해봐야 이해해주는 이들이 드뭅니다. 매체에서 잘 안다루어지는 부분이니까요.

    그리고 젊은이로서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약 30%의 고교 이전 학생들이 왕따 현상의 희생자들입니다) 일단 ‘쿨’해보여야 하는데, 카우트스키나 베른스타인의 학술투 이야기들은 별로 ‘쿨’하지 않아요. 팔레스타인 지지 테모를 하거나 촘스키를 읽는 게 ‘쿨’하지만 이론서를 ‘쿨’하게 읽을 고급 독자들을 노르웨이 학교가 키우지 않아요.

    자본주의 지옥 속의 천당, 쿨한 우민

    그러니 노르웨이 학생들에게 ‘무산계급국가 왜곡론’과 ‘국가자본주의론’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법상종과 화엄종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때와 똑같이 힘듭니다. 여기에서 이 정도면 ‘고등 신학’으로 치부됩니다.

    사회적 갈등들이 잘 봉합되고 만족감이 만연한 곳에서는 우민화되는 게, ‘땡전뉴스’ 시절의 대한민국보다 더 쉽습니다. 훨씬 더 쉽지요. 개인과 사회 사이의 현저한 갈등이 없으면 개인 발전을 촉진시키는 촉매제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향유’지요. 1년에 3~4번이나 남유럽에 가서 좋은 피자와 좋은 섹스를 즐기고, 정기적으로 운동을 잘하고, 아이와 웃으면서 같이 자주 놀고, 그리고 물건을 고르는 재미를 천천히 즐기고…. 공황이다 뭐다 하는데 노르웨이 소매업 매상고가 높아지기만 합니다!

    이게 지옥인가요 천당인가요? 자본주의적 지옥의 ‘천당적 부분’이겠지요. 하여간 ‘맛쓴 지옥’보다 이리 ‘달콤한’ 지옥은 훨씬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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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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