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보다 학교보다 ‘주식시장’
    2009년 02월 19일 11: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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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가 거센 비판에 의해 15세 관람가 등급으로 바뀐 <작전>이 일반에 공개됐다. 공식적인 이유는 폭력성, 욕설, 모방위험 등이었다. 하지만 직접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별별 폭력영화나 드라마들이 청소년을 찾는 세상이니까.

   
  ▲ 영화 <작전> 포스터

이런 얼척없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오버’가 <작전>에 대한 관심도만 높여놨다. 자기들이 금기시한 영화를 오히려 홍보해 준 꼴이다. 내가 극장에 찾아가 이 영화를 본 이유는 오직 하나,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콕 찍어준 영화라는 점 때문이었다.

영화 자체는 어느 정도 재미있다. 손에 땀을 쥘 정도로 흥미진진한 건 아니지만 보는 동안 지루하진 않다. 인물들이 속고 속이며 ‘한탕’을 노리는 것이 <타짜>나 <범죄의 재구성>을 생각나게 했다. 화면을 분할하며 경쾌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에서도 <타짜>의 느낌이 났다. 하지만 재미는 그것보다는 약간 떨어진다.

캐릭터의 향연이었던 <타짜>에 비해 <작전>에선 눈에 띄는 캐릭터가 악역을 맡은 박희순뿐이다. 박희순 이외의 역할들은 특별히 매력이 있다기보단 건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정도의 느낌이다.

그래도 화면은 촌스럽지 않고 이야기도 늘어지지 않는다. 일반인들이 모르는 주식작전에 관련된 이야기를 설명할 때, 반드시 자극적인 구성을 섞어서 오락영화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점도 돋보였다.

요즘 대중문화계의 티켓파워는 2,30대 여성에게 있다. 그들에게 생소한 소재라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함께 영화를 본 여성 관객들은 재밌게들 본 눈치였다. 내 귀에 들려온 반응들은 ‘재밌는데, 어렵고 복잡하다’, ‘주식 한 번 해볼까?’ 하는 정도의 것들이었다. 이런 걸 보고 모방위험이라고 하면 ‘오버’지만, 이런 영화가 주식시장을 대중에게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위원회의 주식시장 지키기

<작전> 심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영화등급분류 소위원회의 한 위원이 “주식시장이 건전한 투자 수단이 아닌 곳, 개미 투자자는 절대 손대서는 안 되는 곳, ‘한탕’을 먹고 빠지는 곳이란 왜곡된 시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위원들이 많이 우려했다”라 말했다고 보도됐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폭력사건이 일어나는 내용이건, 가정이 파탄 나는 내용이건 다 괜찮은데 주식시장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건 참을 수 없다는 얘기다. 주식시장이 바로 이 시대의 성역이기 때문일까?

기업경영의 성과가 주가로 대표되는 희한한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정권의 경제치적도 주가가 대표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주가가 오르니 한국경제가 좋고 자기들이 잘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었다. 급기야 국민에게 펀드투자를 권유하기까지 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국민에게 투자를 권유했다. 주식시장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다.

일반적으로 주식을 사는 행위를 일컬어 ‘투자’라고 한다. 그렇게 투자가 이루어지면 기업이 발전하고 결국 경제가 윤택해진다는 관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야말로 사기다. 주식을 사는 건 투자가 아니라 투기다. 그리고 주식시장은 투기판이다.

주식시장은 기업에게 자본을 주지도 않는다. 거꾸로 기업이 주식시장에 이윤을 빼앗긴다. 삼성이 일 년에 4조씩이나 배당을 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돈이 주주들에게 가지 않고 한국경제로 투자됐다면 훨씬 국민의 삶이 윤택해졌을 것이다.

   
  ▲ 영화의 한 장면

‘한탕을 먹고 빠지는’ 위험한 곳이란 건 ‘왜곡된 시각’이 아니라 사실이다. 어차피 장차 주식시장에 대한 찬미를 대통령과 언론에게 귀가 닳도록 듣게 될 국민이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이런 진실을 알려줘 경각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환상에 젖어 주식시장의 개미군단에 합류했다간 깡통 차기 십상이다. 정말로 그렇다.

하지만 등급위원회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이런 진실이 알려지는 걸 막으려 했다. 저질 폭력물은 봐도 좋지만 주식시장에 대한 불경은 용납할 수 없단다. 왜 그렇게 무리까지 해가며 ‘고결한’ 주식시장을 지켜야 했을까?

그렇다고 떠받들 영화는 아니다

등급위원회가 하도 어이없는 ‘삽질’을 한 바람에 반대급부로 <작전>의 위상만 올라갔다. 한 비판언론은 개봉영화평으론 이례적으로 <작전>을 상단톱에 배치하기도 했다. <작전>이 주식시장의 문제를 고발하고, 개미의 분투를 다뤘다며 호평이 쏟아진다.

그렇게 떠받들어질 영화는 아니다. <작전>에 나온 건 주식시장의 본질이 아니다. 중소형주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투기판의 일단을 그렸을 뿐이다. 주주의 실체나, 주식을 사고파는 것을 통해 기업 소유권을 사고판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주식 투기꾼이 기업 구성원의 생사여탈권을 쥐는 게 말이 되는지, 그런 본질적인 문제들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주식투기게임을 재밌게 그린 오락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다. 등급위원회가 걱정한 건 전혀 우려스럽지 않은데, 투기게임을 너무 재밌게 그린 것은 문제가 된다.

이런 영화들을 통해 주식시장의 저변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물론 달랑 영화 한 편 보고 주식시장으로 달려가진 않겠지만, 이런 세련된 오락물은 차츰차츰 그 소재를 친숙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는 주식시장이 단지 위험한 투기판이니 자신 없는 사람은 발 빼라고 충고할 뿐이다. 그 얘긴 위험을 감당할 사람이라면 뛰어들어도 된다는 소리다. 이 영화는 주식을 담배에 비유하고 있는데, 세상엔 위험을 감수하고 담배 피는 사람 천지다.

   
  ▲ 영화의 한 장면

지금보다 더 주식시장이 국민들과 친숙해지고, 국민이 ‘투자자’로 변신하기 시작하면 민생파탄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일반 국민들이 주식의 ‘주’ 자도 몰랐던 시절엔 지금과 같은 만성적 경제불안이 없었다.

주식시장이 국가경제만큼 커질수록 주식시장의 불안전성이 국가경제와 국민의 삶으로 옮아온다. 그것은 거품과 붕괴가 반복되는 고통스런 경제체제를 만들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작전>은 우려스런 영화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우려스런 오락영화 투성이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영화들과 <작전>이 다른 것은 이 영화가 오락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이례적으로 비판세력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다 등급위원회의 얼척없는 ‘삽질’ 때문이다. 참 대단한 위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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