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조, 드디어 순욱을 만나다
        2009년 02월 19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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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억수씨

    여포와 왕윤은 그렇게 결국 동탁을 모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동탁이 죽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자연인 한 사람이 죽었을 뿐, 새로운 정치세력이 기존의 낡은 세력을 총체적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동탁이 죽던 시점에도 동탁의 무리였던 이각, 곽사, 장제, 번주 등 네 장수는 비옹군 3천을 이끌고 서량에 머물고 있었다. 즉 동탁만 죽었을 뿐, 그 잔당들은 모두 그대로 보전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연인 하나를 죽인다고 세상이 뒤바뀔 것이라 믿었던 왕윤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그 결과 장안은 몇 번 시끌벅적하더니만 다시 동탁의 잔당들에 의해 점령된다. 이각과 곽사로 대표되는 동탁의 잔당들은 10만 명의 군대를 다시 불러 모아 장안을 점령하였다. 소수의 군사로 구동탁 세력의 10만 대군과 맞서던 ‘배신의 달인’ 여포는 장제, 번주의 군사들이 장안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자 가솔들까지 모두 팽개친 채 군사들과 도주하였고 암살음모를 주도했던 왕윤은 동탁의 잔당들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초선을 비롯한 역적모의 조직들은 모두 일시에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렇게 조정은 다시 구동탁 세력의 손에 들어간다.

    동탁은 갔으나 동탁 잔당은 여전히 맹위

    그러자 이각과 곽사를 중심으로 한 구동탁군은 천자가 있는 내정까지 밀려들어 헌제에게 대놓고 벼슬을 달라 요구하였다. 이는 사실상 무력으로 확보한 자신들의 실권을 벼슬이라는 형태로 ‘공식화’해 달라는 요구였다.

    "폐하! 저희들은 동태수를 모살한 반역도당을 모두 물리치고 장안을 다시 회복하였습니다. 이렇게 황실에 공을 세운 우리들에게 큰 벼슬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이각이 나이 어린 황제에게 고개도 숙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말인즉슨 자기들이 실권을 잡았으니 내용에 맞는 형식을 갖추어 달라는 얘기였다. 황제는 순순히 이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천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대들이 바라는 벼슬은 무엇이냐?"

    이각, 곽사, 장제, 번조가 각기 원하는 벼슬을 적어 올리자 천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벼슬을 내렸다. 동탁의 잔당들은 일종의 백지수표를 쓰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리하여 이각은 거기장군, 장제는 표기장군, 번주는 우장군 등에 봉해져 합법적으로 국사를 처리하게 되었다. 천하의 대권이 동탁의 손에서 다시 동탁의 잔당들 손아귀로 넘어간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권이 이각과 곽사에게 넘어간 이후, 장안에는 일시적으로 평화로운 시절이 열렸다. 동탁 시절 공포정치가 별 효과도 없이 부작용만 컸다는 것이 동탁의 죽음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공포정치는 없었다. 저항세력은 지하화하고 장안은 한동안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무렵, 청주지방에서 황건 농민군이 또다시 봉기를 결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 계속 변고가 있자 세력을 보전하고 있던 청주 지역 황건 농민군이 다시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조정에는 벌써 농민 반란군의 규모가 수 십만에 이르렀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각과 곽사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직접 농민반란을 진압하자니 그렇게 장안을 비워둔 사이에 황제가 또 무슨 일을 벌여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사라질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명색이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압군을 안 보낼 수도 없었다. 이각이 곽사에게 말했다.

    조조와 황건적을 싸우게 하라

    "청주에서 가까운 지역에 조조가 동군 태수로 있습니다. 그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황제의 명을 내립시다. 그러면 우리가 장안을 비우지 않아도 되고, 두 개의 적인 조조와 황건적을 서로 싸우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오호라! 그거 좋은 수요!"

    곧바로 이각과 곽사는 17로 제후 연합군을 만들어 자신들을 공격했던 조조를 황건적 진압대장으로 천자에게 천거하였다. 천자를 이용해 조조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조조는 어떻게 그 시점에 동군 태수로 가 있던 것일까?

    동탁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결집했던 17로의 여러 제후들은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해버리자 껍데기만 남은 낙양 땅을 점령해 자기들끼리 논란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 논란은 크게 번져 결국 17로 제후 연합군은 자기들 간의 불화와 반목으로 제각기 자기 근거지로 돌아가 버리게 되었다.

    당시 조조는 다른 제후들과는 달리 혼자서 동탁을 추격하다가 참담한 패전을 당해 근거지도 없이 이곳저곳 떠돌며 겨우 세력을 보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떠돌아다니던 조조에게 오래지 않아 재기의 기회가 왔다. 흑산적이라 불리는 도적떼가 동군지역을 위협하자 겁을 먹은 동군 태수 왕굉이 조조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조조는 왕굉을 도와 동군지역에 쳐들어온 흑산적을 크게 격퇴한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동군의 실권은 왕굉이 아닌 조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동군을 흑산적으로부터 구해낸 것이 기존의 동군 태수 왕굉이 아니라 조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역학관계가 조조에게로 쏠려버린 것이다.

    현실이 이렇게 되자 여기서도 내용에 맞는 형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형식상 동군 태수는 왕굉이었지만 실제 동군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것은 조조였던 것이다.

    그 때, 동탁이 놀랍게도 조조를 동군 태수로 임명하는 조치를 내린다. 당시 대권을 잡고 있던 동탁은 자신을 상대로 반란군을 조직하고 끝까지 자신을 추격했던 조조에 대한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동군이 이미 사실상 조조의 손 안에 들어가 있다는 걸 알자, 오히려 조조에게 벼슬을 내리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어차피 자기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먼 동네일인데다가 이렇게 함으로써 골치 덩어리인 조조를 명색이 자신의 신하로 묶어둘 수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조조 조차도 이제 동탁의 치하에 적응했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요컨대 조조를 타도하기보다는 회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근거지가 없이 떠돌던 조조는 바로 이 상황을 통해 재기의 발판을 만든다. 조정에서 조조를 동군 태수로 봉하자 조조는 동군을 근거지로 발판을 다지기 시작했다. 합법적으로 백성들에게 걷은 세금으로 군자를 마련하고, 착실히 군사를 늘리며 조련에 열중했다.

    동탁의 회유책, 조조의 근거지

    특히 조조는 구현령을 내려 각처의 현재들을 초빙하고 유능한 선비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런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는 어진 선비와 무사들이 많았다. 또 한편으로, 조조는 도읍인 장안의 정세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 때 매우 놀라운 소식들이 전해졌다.

    "왕윤이 동탁과 여포의 분열을 이용해 동탁을 모살하였다 합니다."
    "동탁의 잔당, 이각과 곽사의 무리들이 여포와 왕윤을 몰아내고 다시 장안을 장악했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들이 쉴 새 없이 조조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럴 즈음 조정에서 조조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영이 내려온 것이었다. 조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한참 평화롭게 세력 확장에 열 올리는 마당에 황건적을 진압하라는 성가신 명령이 내려온 것이었다. 분명 이각과 곽사가 시킨 일이겠지만, 천자의 명령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으니 복종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나와 황건적을 싸우게 만들어 양측 모두의 힘을 빼려는 술수가 틀림없군.!’

    조조는 고심을 거듭했다. 황제의 명령을 따르기도 뭐하고 안 따르기도 뭐한 골 아픈 상황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조조는 갑자기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서 반대로 생각해보게 된다.

    ‘이각과 곽사는 이 싸움을 통해 나의 힘을 빼려하였지만, 오히려 이 싸움을 통해 나의 세력을 늘릴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전략적 돌파구를 찾아낸 조조는 곧이어 휘하의 장수들에게 출정을 명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조조는 실제 전장에 나가서는 황건 농민군과 싸우지는 않고 지속적인 회담을 벌이면서 적극적인 회유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농민군을 만나면 전투를 벌이기는 커녕 농민군의 대표와 회담을 갖고 좋은 조건을 제시해 끈기를 갖고 항복을 권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그 중 큰 무리의 농민군을 만났을 때는 자신이 직접 적의 대장을 만나기 위해 적진에 홀로 들어가기까지 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조는 이런 식으로 주장했다.

    "이보시오 농민 여러분, 소싯적에 나도 태평도장에 나가 누런 머리띠를 머리에 묶어 본 적이 있소. 어차피 이렇게 칼을 들었으니, 차라리 반란군의 입장을 버리고 나와 함께 정식으로 군사가 되는게 어떻겠소. 내 그대들이 기댈 언덕이 되리다!"

    농민군 입장에서도 이런 제안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낫을 버리고 칼을 든 이상 반란군의 입장에서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조조에게 항복해 정규군의 지위를 얻게 되면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왕 죽을 각오를 하고 나선 판이라면 그 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조조는 과거 태평도를 함께 했던 같은 황건당의 신자가 아니던가!

    그 날 이후 도처에서 조조의 진영으로 항복해 오는 농민군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대박이군!’ 조조는 이런식으로 위험을 기회로 활용한 탓에 짧은 시간 안에 무려 30만에 이르는 군사력을 얻게 되었다.

    조조, 30만 청주병을 얻다

    그러나 조조는 이 상황을 천자에게 보고할 때는 "수십만의 황건적을 포로로 잡았다"라고 말했다. 조정에서 볼 때는 맞는 말이었다. 조조가 말 그대로 출진한 지 불과 1백여 일 만에 30만에 이르는 포로를 잡고 황건적을 완전히 소탕한 것으로 보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의 공훈을 높이 사 진동장군이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조조는 끊임없이 항복해오는 이들 황건 농민군 가운데 군경험이 많고 힘센 장정들을 뽑아 정규군을 편성하니 이들이 바로 유명한 ‘청주병’이다. 이 청주병은 농민군 출신으로 이 같은 과정을 거쳐 조조의 군사가 되었기 때문에 조조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끈끈함까지 느끼게 되었다. 매우 충성심이 강한 군대가 된 것이다.

    결국 30만에 이르는 이 청주병은 나중에 조조가 중원 천하의 중심부를 장악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주력부대가 된다. 조조에겐 평생을 통털어 가장 중요한 군사적 기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대강 청주 지방의 황건 반란군이 정리가 되자 조조는 연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또다시 지난 번에 중단했던 세력 확장 사업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조조는 구현령을 내려 천하의 인재들과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있는 영웅들을 찾아내 영입하기 시작했다.

    이 때, 조조를 찾아온 사람 중에 순욱이 있었다. 순욱은 본시 영주 사람으로 자는 문약이었다. 순욱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이웃 사람들은 그를 ‘왕이 될 재목’으로 일컬었으며, 그가 성년이 되자 조정에서는 수궁령의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순욱은 후한말의 부조리한 현실에 눈을 뜨고 정상적인 벼슬길이 아닌 다른 대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당시를 풍미하던 태평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급기야 태평도가 황건군으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봉기에 가담한다.

    그러나 준비 안 된 농민 봉기는 또다시 순욱에게 많은 고뇌와 번민을 남겨주었고, 유비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순욱은 그 길로 말을 달려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은연자중 고향에서 천하의 정세를 살피던 순욱의 귀에 조조라는 사람의 소문이 종종 들려왔다.

    "조조라는 사람이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했다고 합니다."
    "조조가 17로의 제후들을 규합해 반동탁 연합군을 조직했다고 합니다"
    "조조가 퇴각하는 동탁의 배후를 공격하다가 오히려 큰 패배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소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순욱의 귀에 전해졌다. 그리고 순욱의 마음 속에는 조조에 관한 소문이 들릴 때 마다 조조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조가 황건 농민들을 모두 죽이라는 천자의 명령을 받고 청주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순욱은 이때 조조가 과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일을 처리할 것인지, 관심을 갖고 두고 보기 시작했다. 이 때 순욱의 최대 관심사는 조조였던 것이다.

    조조-순욱, 농민 운동권 출신?

    그런데 이 상황에서 조조가 오히려 농민들을 죽이기보다는 보듬어 안아 자기편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며 순욱은 ‘조조라면 믿을 수 있겠다. 조조와 같이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제 발로 조조를 돕겠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군막에서 조조를 만난 순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 태수께서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말씀을 듣고 이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조조가 언뜻 보니 아직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조조는 언젠가 순욱이라는 이름을 몇 차례 들어본 듯한 기억이 났다. 조조가 물었다.

    "그대는 천자가 무엇이라 생각하오?"

    "천자의 본분은 조절입니다. 천하는 천재지변의 무정부성으로 인해 풍년과 흉년을 주기적으로 반복할 수밖에 없는 혼돈의 짜임새입니다. 여기서 천자란 풍년의 풍요로움을 떼어서 흉년의 가난함을 대비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해야 평탄한 천하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음…"

    조조는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내었다. 낯선 듯하면서도 어디선가 들어본 얘기 같았기 때문이다. 순욱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또 천자의 본분은 약속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달리 말해 민심의 거대한 합의체입니다. 그런데 이 합의를 일상적으로 확인할 길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원의 중심점처럼 천자라는 큰 점을 만들어 만백성의 합의체를 상징하는 한 점을 만들어낸 것 입니다.

    즉 황제는 어떤 합의의 상징입니다. 민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끼리의 합의체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천자를 쉽게 끌어내려서는 안 되고 자기 맘대로 쉽게 바꿔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조조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내가 청년시절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이구나. 이 비슷한 얘기를 어디서 들어봤더라…’ 잠시 기억을 되짚어 보던 조조는 깜짝 놀라 속으로 소리쳤다.

    ‘앗, 태평도다!’

    그랬다. 그것은 태평도의 기본 교리를 말만 좀 달리하여 거의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본시 태평균등협약세상, 즉 태평세란 크게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평등세이고 또 하나는 협약세였다. 당연히 양자는 서로 연결되었다. 순욱이 말한 천자의 본분이란 이 평등세와 협약세를 추구하는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조조는 순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어떤 이상주의자라는 판단을 했다.

    ‘아직도 이 사람은 이상을 추구하고 있구나. 현실정치가가 아닌 이상주의자로고. 나는 당장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내게도 이런 이상주의자가 필요할지 모르겠구나!’

    조조는 그렇게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다시 몇 마디 질문을 더 이어갔다.

    "그렇다면 천하는 또 무엇이오?"

    "천하는 흩어졌다 다시 합쳐지고 합쳐졌다가 다시 흩어지는 것이 옵니다.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라 했듯이 통즉분이고 분즉통입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갈라진 천하를 합칠 수 있겠소?"

    순욱이 조조가 자기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약간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천하를 억지로 합쳐 내는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천하는 천자를 중심으로 태평세를 지키며…"

    조조가 말을 끊었다.

    "나뉘어서도 힘이 만들어지는 게 세상 이치"

    "모여야 힘이 형성될 것이 아닌가? 중원이 힘을 만들지 못해 오랑캐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나뉘어서도 힘이 만들어집니다. 그게 세상의 이치이옵니다."

    "음.. 그렇다면 천하를 얻으려면 어찌해야겠소?"

    "결국 계속해서 인재를 얻고 사람을 얻어가는 것이 천하의 통일입니다. 천하는 원래 갈라진 듯 합쳐져 있고, 합쳐진 듯 갈라져 있는 것이니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통일인지도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씩 사람을 얻어 나가 천하의 모두가 자기편이 되었을 때, 그것이 통일일 것입니다. 천하의 통일이란 곧 같은 편의 극대화인 것이지요."

    조조가 가만 들어보니 묘하게 맞는 말 같으면서도 별로 실효성 있는 얘기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전 같으면 허공에 뜬 얘기라고 쉽사리 무시해 버렸을 조조였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이상적이면서도 뭔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조조는 곰곰 생각했다.

    ‘내 비록 과거에 이념이란 이념작가들이 재구성한 현실에 불과하다 생각하여 태평도를 떠났지만, 따지고 보면 본시 정치라 함은 이념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아무런 그림도 없이 어떻게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어차피 정치를 하려면 이념중독자들이 필요하다. 예전에 무제께서도 동중서를 통해 음양오행설을 집대성하지 않았던가? 이 사람은 장차 내게 꼭 필요한 인간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통에 순욱이 또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조 태수께서 황건 농민들의 반란을 무력으로 짓밟기보다는 화해와 설득의 자세로 대해 주시고 그를 통해 오히려 농민군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신 것에 탄복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태수님과 함께 혼돈에 빠진 천하를 태평케 하는 데 저의 열정과 삶을 바치고 싶습니다."

    조조는 눈을 꿈뻑거리며 생각했다.

    ‘보통 나를 찾아온 인재들은 대개 내가 대권을 잡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데 이 사람은 나 조조가 아닌 ‘천하’를 이야기하는 구나! 게다가 이 사람은 내가 어떤 자리를 자기에게 줄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나에게 신뢰를 주는 구나’

    조조는 이런 판단이 들자 순욱에게 비장의 무기를 꺼내 보이기로 결심했다.

    "태수께서는 천하를 평안케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합니다. 우선 첫째가 천자를 받들어 백성의 마음 속에 태평세상을 위한 대의명분을 세워야 합니다. 둘째 군사력보다도 그것의 기원이 되는 생산력을 길러야 합니다. 셋째…"

    순욱은 또 다시 말을 이어가기 위해 열심히 무언가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순간 조조가 한 손을 품 속에 넣더니 누렇고 얇은 무엇인가를 쓱 꺼내는 것이 보였다. 순욱은 그 물체가 무엇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다 말고, 갑자기 복받치는 감정에 눈물을 쏟을 뻔 했다. 그 종이는 예전 태평도 시절 장각이 만들어 바람에 날리던 바로 그 황자 부적이었다.

    "아니, 저것은…"

    순욱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람에 날리던 황자 부적

    "내 그대의 말을 듣다보니 내 젊은 시절이 생각났소. 나도 그대처럼 청년시절 태평도의 일원이었소. 황건 봉기 때 참여는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나는 마음속에 장각선생이 얘기하던 태평세에 대한 열정이 조금은 남아있다고 생각하오."

    조조가 황건당의 일원이었다니! 순욱은 믿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조조의 입에서 다음 대사가 튀어나왔다.

    "그대가 날 이용하시오.! 날 이용해 그대가 꿈꾸는 세상을 만드시오.!"

    사실은 자기가 순욱을 이용하고 싶었지만, 조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반대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예절이라고 조조는 생각했다.

    순욱은 황건당의 부적을 보고 회상에 잠기는 순간 조조의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감동이 복받쳐 밀려왔다. 소년 시절 장각선생을 만나 부적을 받고 태평균등협약세상을 논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돌이켜보면 순욱의 일생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시절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멀리서 조조를 찾아온 순욱은 조조와 대화를 나누어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리서 본 조조는 충분히 순욱이 존경할 만한 정치행보를 계속해왔던 것이다. 순욱으로서는 조조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야망과 비인간적일 정도의 냉철함 등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순욱은 그 순간 생각했다.

    ‘나는 이제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을 얻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동안 한 번도 정식으로 포기한 적이 없으면서도 언제부턴가 잊고 지냈던 내 꿈을 다시 그려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순욱은 그렇게 조조를 만나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 그때 순욱의 나이 스물 아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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