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와 이명박은 비슷한 처지?
        2009년 02월 19일 09:3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

    조선후기의 재정적자는 일상적이어서 국가기관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조차 이순신은 비용을 자체 조달하여 왜군과 싸웠다고 하니, 사실 이 정도가 되면 이순신은 조선의 수군통제사인지 아니면 장보고처럼 호남을 근거로 한 군벌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환곡을 예산 확보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 위험성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이해가 된다. 만약 정부가 100원의 세금을 거둬야 할 경우, 납세자가 이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면 정부 입장에서는 100원의 결손이 생긴다.

    세금과 환곡

    그러나, 만약 환곡의 방식을 취할 경우 정부는 1,000원을 빌려주고 다음해에 1,100원을 받게 되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납세자가 1,100원 전부를 갚지 못할 경우 그 결손은 무려 11배가 되며, 갚지 못한 사람과 연대납세 의무가 있는 친족들의 고통도 11배로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정부가 어느 정도 기능할 때는 이러한 결손은 적을 것이다. 그러나 부패가 심해질 경우 이 결손율은 일반 세금에 비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가 환곡 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2.

    영정조 시기에 자료를 보아도 재정문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관리들에게 급료를 주지 못했으며, 사법기관조차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 벌금을 걷어 급료를 충당하기에 이른다.

    추관지의 편자는 당시 법정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송사에 걸친 백성이 訟庭(송정, 법정)에 들어가기만 하면 조례(관아에서 부리는 하인)가 패채(죄인의 볼기를 치는 형조의 사령인 패두가 요구하는 뇌물)를 강요하고, 조리(아전)가 또 情錢(뇌물)을 요구하니, 의지가 없는 불쌍한 백성은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다. 그런데 죄를 확정하여 법률을 적용할 때에 가서는 관가에서 다시 속전을 독촉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仁人, 君子의 정치이겠는가!”

    당시 지금 검찰과 법원을 합쳐 놓은 기관이 한성부와 형조였는데 세입이 없어 관원의 봉급이 속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원래 속전은 형을 지은 사람들한테 돈을 받고 풀어주는 것인데 재정에 도움이 되는 차원을 넘어 재정의 주요한 수단이 된다면 그 문제점은 매우 심각해질 것이다.

    만약 지금 법원과 검찰이 자신들이 징수한 벌금으로 급료를 받는다고 해보라. 아마 벌금형은 대폭 늘어날 것이고 과도한 벌금 징수로 국민들의 피해는 매우 심할 것이다. 영조 또한 왕이 되기 전 사가에 머무를 때 이러한 폐단을 몸소 경험했던 모양이다. 한성부와 형조에서 시도 때도 없이 지금으로 말하면 경범죄 단속(금란)을 하여 속전을 징수하니 백성들의 고통이 매우 심했던 모양이다.

    과거 교통단속이 지금보다 강력했던 이유는?

    사법시설조정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1967년에 제정되었는데 법원 등의 사법시설과 검찰청, 교도소 등의 법무시설의 조성 비용을 당해 연도의 벌과금 등의 30%로 한다는 것이었다. 1973년부터는 경찰서 등의 경찰 시설이 포함되고 시설의 관리, 장비의 취득을 위한 재원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비율이 60%에 달했다가 1994. 1. 1.로 폐지되었다.

    이것은 필자의 가설인데, 과거에 경찰이 자체 단속하는 벌과금으로 경찰서와 경찰차를 구입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 경찰에서 왜 그렇게 함정단속 비슷한 교통범칙금 단속을 많이 했는지, 이에 따른 시민들의 원성이 많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다. 필자의 주관적 느낌인지는 몰라도 사법시설조정법이 폐지된 지금 이러한 원성은 과거보다 훨씬 덜 한 느낌이다.

    그러나 영조가 내 놓은 안은 별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에서 역관들이 독점적으로 수입하던 관모자(官帽子)로부터 얻는 수입을 한성부와 형조에 배정하고, 징수한 속전을 보민사(保民司)라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 관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모자의 국가독점은 나중에 폐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민사 또한 한성부와 형조에서 공동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에 속전의 폐해가 얼마나 감소되었는지는 의문이었다.

    3.

    영조도 뾰족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던 이유는 그만큼 재정적자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조선의 세입세출 자료는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 경국대전에는 세입과 세출을 기록하는 횡간과 공안을 만들도록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자료는 특별히 남아 있는 것이 없는 듯하다.

    재정 상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수 밖에 없는데, 1717년(숙종 43년)에는 그해 예산이 13만석 정도인데 큰 흉년이 들어 세입이 단지 5만여 석에 불과하였다고 하며, 정조 또한 즉위 직후 “근래 경용이 매양 부족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1816년(순조 16년)에는 받아들인 것이 쌀 8만석, 돈 14만냥 목면 6백 동인데, 부족한 쌀과 돈은 3분의 1에 이르고, 부족한 목면은 거의 절반에 이른다는 기록은 이 시기에 전체적으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정조가 관리 처벌을 못한 이유

    상황이 이렇다면 전편의 ‘창곡의 환롱’ 사건도 이해가 될 만하다. 형조와 한성부는 속전으로, 총융청과 각종 국가기관은 환곡으로 경비를 충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조는 관리들 누구도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현 정부가 김석기씨 경찰청장 내정자를 처벌할 수 없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만성적 재정 적자 상황에 대해서 영, 정조는 어떠한 대책을 세웠는가이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배웠던 대동법이나 균역법 같은 것도 재정상황 개선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나 사실 세수에 있어서 그 비중이 별로 크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재정적자를 개선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실제로 세수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이었다. 당시의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으나 구한 말 통계를 가지고 당시 세수구조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 구한말 조세 구조

    구한말에도 지세는 전체 세수의 60%를 넘었다. 추측컨대 조선왕조시대에는 그 비중이 더욱 컸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지세에 대해서 영정조 때 어떠한 개혁조치가 있었는가이다. (계속)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