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는 인물을 평하지 않는다
        2009년 02월 17일 02:2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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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좌파와 우파

    “좌파는 인물을 평하지 않는다.” <레디앙>의 어떤 기사에 달린 댓글 한 마디였다. 짧지만 무척이나 강렬한 이 문장이 잊히지 않았는데, 이 좌파적 철학을 NPA 당원들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NPA의 간판스타 올리비에 브장스노. 일반 당원들과 노장 혁명가들까지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지만, 그런 그도 NPA의 창당대회 첫날만큼은 당원들로부터 냉정하고 절제된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한 당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직장 단위노조원으로서의 임무도 중요한 브장스노는 우체국 파업 때문에 대회에 늦게 참석한다고 알려왔다. 대회는 시작되었고, 엄청난 수의 방송국 카메라와 기자들이 연단을 에워쌌다. 그러나 원로당원의 발언이 시작되고 무르익을 쯤, 갑자기 모든 카메라들과 기자들이 소란을 피우며 강당 뒤편 입구를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브장스노가 도착한 것이다.

    그러자 노당원의 발언이 잠시 멈추어지게 되었고, 당원들은 항의의 표시로 야유를 보냈다. 브장스노는 당황스러워하며 맨 끝 쪽 가장자리에 앉았지만, 기자들은 계속 그에게만 집중하였다.

    이후 그가 앞쪽 연단을 향해 걸을 때는 마치 한 무리가 입장하는 듯했고, 이어진 그의 연설에서 이례적으로 당원들은 박수를 아꼈다. 당을 바라보지 않고 개인만을 향한 미디어의 관심에 대한 불만을 표한 것이다. 뒤편에 앉아 있던 원로당원 피에르 루쎄씨는 기자들이 그의 박수를 훔쳐갔다며 웃으면서도 그 역시 박수는 치지 않았다.

       
      ▲ NPA 창당대회에 몰려든 취재진들 (사진=박지연 파리통신원)

    우파는 인물만 평한다. 지난 일주일 내내 프랑스의 신문잡지 가판대는 온통 올리비에 브장스노와 NPA와 관련된 기사로 장식되었다. 철학 월간지 <Philosophie>의 표지는 불끈 쥔 주먹의 브론즈 조각상과 함께 “어떻게 반자본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채워졌다면, <Challenges>라는 우파 잡지의 표지는 브장스노의 얼굴을 패션잡지 화보처럼 클로즈업한 것이었다.

    <Challenges>는 브장스노 개인의 활약상, 그리고 그를 키워낸(?) 사람들의 계보가 그려져 있었다. 이론은 벤사이드, 전략은 크리빈, 사상은 사바도…. 심지어 NPA 미디어 담당인 미셸 비도에게는 브장스노의 유모라는 호칭까지 달았다.

    뒷면에는 NPA가 추진하는 당 정책인 해고금지, 30시간 노동, 세금인상, 최저임금 인상, 공공주택 늘리기, 공공교통서비스 무상 이용, 18세부터 25세까지 젊은이들의 생활보조금 증대 등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며 긴 지면을 할애했지만, 결론은 결국 브장스노는 ‘해결책이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 긴 지면 어디에도 브장스노를 키운 것은 사실상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위기들이며, 위의 제안들은 브장스노 개인이 아니라 당에서 하는 것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2.고딩 당원과 대딩 당원 그리고 지역위원회의 노 당원들

    고등학생 당원

    213명의 18세 이하 당원을 가진 NPA의 당 강령 결정투표에는 고등학생 당원들이 한 줄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눈부시게 예쁜 발랄함이 퍼져 나왔다. 강령에 들어가는 문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그 중 “민중을 분열시키는 민족주의와 종교근본주의…”에 대한 찬반논의와 거수가 있었다.

    이는 민족주의가 종교근본주의와 같은 항목에 놓이면 지나치게 폄하될 수 있으므로 따로 분리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반영된 것이었다. 고교생 당원들은 이 의견을 옹호하는 데에 손을 들었다.

    왜냐고 물어봤더니, “국제연대를 위해서요. 팔레스타인이나 여타의 제 3세계에서는 계급투쟁에 민족적 성격도 포함되어 있고 아직도 세계에는 식민지 국가들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민족주의를 무시해 버리면 국제연대를 하는데 문제가 생기잖아요.”

    얼마나 의젓한 고교생 당원들인가? 하지만 투표 결과는 이들이 바라는 것과 달리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대부분인 정치 상황 속에서 지속해온 40년 동안의 투쟁 중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수세적 민족주의를 폄하하고 헷갈려 한 적이 있는가?”라는 이유로, 강령안의 문장은 그대로 유지되기로 하였다.

    긴 회의가 지속되자 어린 당원들은 사진기를 꺼내 셀카놀이를 하기도 했다. 한참 카메라를 들이대던 순간,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21세기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사회주의에 찬성하는 사람 손들라고 하자.

    갑자기 이들은 사진기를 내려놓고 “얘, 얘, 사회주의”, “응, 알었어. 우린 사회주의”하며 한 줄에 앉아 있던 고등학생 당원들이 일렬로 손을 뻔쩍 들었다. 곧 이어 생태 사회주의에 손들라고 하자, 갑자기 어린 당원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또 사회주의인데?” “한 사안에 손을 여러 번 들 수는 없는 건가요?”라며 의사 진행에 관한 질의를 시작하였다.

    어떤 사회주의가 되었든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이들에게서부터 NPA의 밝은 미래가 시작될 것임이 느껴졌다.

    대학생 당원

    지난 11월 <레디앙>과 인터뷰를 해준 대학생 평당원 아가트를 우연히 대회장에서 다시 만났다. <레디앙>에 실린 자신의 기사에 대한 반응을 궁금해 했고 그때의 수줍음, 거리감 이런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공적인 창당대회에 들뜬 기분이 확연하게 보였다.

    11월 이후 어떤 사업들을 했는가 묻자, 창당대회 강령 중에 젊은이와 관련된 조항들을 검토하고 계속 당에 건의하는 작업과 대학 간 공동사업인 교육법 반대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고 했다.

    LCR에서 NPA로 바뀌는 과정에서 지난 혁명세대와 그런 경험이 없는 젊은 신당원 사이에 강령에 대한 오해나 갈등은 없는지 궁금해 하자, 아가트는 세대 속에서 정치 분석의 관점 차이들을 느끼진 못했다고 답했다.

    “늘 소수파들은 존재하고, 이들을 아우르는 강령과 당 사업에 관한 방향성을 잡는 데 우리 같은 대학생 평당원들이 적극 개입한 것이다. 특히 나는 대학생 신분으로서 국제 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쪽의 강령을 수정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그것의 결과로 오늘처럼 좀 더 균질적인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바라보며 NPA는 밑으로부터의 조직화의 성공적 사례임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을 찍자고 하자 지난번 “투쟁 속에 있지 않고 증명사진처럼 찍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던 차가움은 창당대회의 열기 속에 녹은 듯, 친구들까지 불러 모으며 포즈를 취해주었다.

    지역위원회의 당원

    생투완이라는 조그만 시골의 지역 당원들은 당규약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속한 당이 얼마나 투쟁적이고 혁명적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문제제기를 지속적으로 하였다. 이 지역위원회에서 어찌나 강력하게 건의를 했던지 이 문제는 강령과 규약을 정하는 창당대회의 전체회의에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이들이 건의한 문구는 자신의 투쟁적 열의를 문자로 확실히 형상화시켰다. 한 문장은 혁명에서 시작해서 모든 수식어도 온통 혁명적인이며 혁명이라는 단어로 끝을 맺는다. ‘혁명적 NPA는 혁명적 정신을 … 혁명적으로 수행하며 … 혁명 … 혁명 … 혁명, 혁명을 위하여 혁명하자.’

    결국은 중앙대회에서 거수를 하였지만, 생투완 지역 위원회의 노당원들의 변함없는 찬성표를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의 반대 몰표로 이 문장은 채택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외의 모든 입장 등을 정리하고 그것이 공식적인 당의 강령으로서 인정하느냐는 투표에서 반대표가 나오지 않았다. 조직의 민주성이 타협 불가능하게 보였던 모든 당원을 설득시켰기 때문이다.

    3. 만난 사람들과 만나지 못한 사람

    만난 사람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를 위한 서명을 받을 때, 필리핀 민중혁명운동-민다나오(RPM-M) 소속의 두 활동가들도 서명을 했다. 자신의 본명을 적어 보여주고 나서는 그 위에 이름의 알파벳을 조작하였다.

    왜냐고 묻자 자신들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지하조직 소속이며 공개가 될 경우 암살의 위협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도 공공연하게 테러와 암살이 자행되는 필리핀 상황에서 필리핀공산당에서 떨어져 나온 RPM-M은 정부와 공산당 양쪽에서 쫒기는 처지가 되었다. 더구나 필리핀 남부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RPM은 민다나오 무슬림이나 공산당이 주장하는 독립이 아니라 연방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 더 힘들게 활동하고 있었다.

    민다나오는 공산당이 거의 주 활동을 하고 있기에 그들이 없는 곳으로 옮겨가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운동을 하고 있고, NPA는 이런 소수 운동단체들이 세계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활동가의 경제적 어려움을 감안하여 체재비까지 지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당의 당명이 NPA로 결정되자, 이들은 “우린 NPA(필리핀 공산당의 신인민군)가 너무 싫어”라며 웃었다.

    만나지 못한 사람

    ‘보리밭에 부는 바람’으로 2006년 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참여영화의 대가 켄 로치 감독을 작년 1월 파리에서 볼 수 있었다. 최신작 ‘자유로운 세상’에서 이주노동자 착취문제를 다뤘던 켄 로치감독은 정치에 있어서도 자신의 입장을 늘 명확히 하고 있는 좌파영화인이다.

    그때가 LCR이 반자본주의신당을 처음으로 제안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그는 NPA를 지지해주고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말했다. 73세의 노장 감독은 TV, 라디오 각종 매체를 돌며 지금이야말로 세계화와 맞서 반자본주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브장스노를 지지하며, “프랑스는 노동자들을 위한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의 근원을 위하여 투쟁하는 이를 지지해야 한다”는 영상물을 제작한 이 노장감독이 이번 NPA의 창당대회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만나기를 무척 기대했으나, 그가 개인적 사정으로 참석을 하지 못해 섭섭했다.

    그러나 이곳에 있건 없건, 그가 유명한 사람이든 이름 없는 조용한 활동가이든, 세상 곳곳에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어느 한 작은 섬에서, 검은 대륙의 한 부족에게서도 세상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기에 보이지 않는 튼튼한 연대의 끈 자락이 우리 모두의 손에 이어져 있음이 느껴졌다.

    4. 국제적 연대의 작은 실천

    NPA는 해외 정당 대표로 팔레스타인 동지들을 내세워 대표 연설을 하게 만듦으로써 침략 전쟁 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에게 국제적 연대를 얻어 낼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필리핀 동지들의 경우처럼 큰 연대뿐 마니라 아주 소소한 곳까지 신경을 미치고 있었다.

    그들은 해외 정당과 활동가들의 원활한 회의 참여를 위하여 스페인, 영어, 폴란드, 아랍어권 당원들이 나서서 통역을 도우는 등 NPA의 모든 행사에서 그들이 보여준 섬세한 배려들은 놀라울 정도였고 이것이 실천으로 보여주는 연대의 힘임을 느끼게 하였다.

    올리비에 브장스노와의 인터뷰는 너무 어려웠다. 인터뷰를 시작할라치면 모든 언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심지어 개인 전화를 받는 곳까지 카메라를 들이대고 붐 마이크로 통화내용을 녹음하였다.

    <레디앙>의 인터뷰 약속도 두 번이나 무산되었다. 브장스노는 프랑스 언론과 같이 인터뷰를 하자고 제안을 해왔지만, 정식기자 훈련이 안되어 있는 외국인 통신원과 프랑스 기자가 같이 공동 인터뷰를 할 경우의 결과는 뻔하게 예상 될 뿐만 아니라 지금 프랑스 언론은 NPA와 좌파당, 공산당 연대가 최대 관심거리였기에 질문의 축도 달랐기에 단독 인터뷰여야 함을 설명했다. 회의가 비공개로 진행되는 마지막 날 조용한 시간대에 약속을 다시 잡긴 했지만,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명, 우파 언론에서 브장스노의 유모라 부르는) 프레스 책임자 미셀 비도 교수를 찾아갔다. 브장스노와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그는 너무 바쁘고 상황이 안 좋아서 인터뷰가 어렵다고 말하자. 워낙에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아서 그런 거니 이해하라고 대답했다.

    포기하고 돌아 나오면서, NPA의 핵심 사업인 ‘해고금지’가 적힌 플래카드를 가리키며 “인터뷰 못하면 나, 해고 될지도 몰라”라고 농담을 던졌다. 얼굴 표정이 다채롭지 못한 동양인의 농담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비도씨는 갑자기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몇 시간 후 돌아온 비도씨가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숨을 돌리며 말했다. 됐다고, 오늘 오후에 인터뷰 약속을 자기가 잡았다고, 브라질리엉(브라질 사람들)들도 기꺼이 응했다고.

    브라질리엉? 아. 브장스노를 지칭할 땐 모두들 그냥 올리비에라고 불렀다. 브장스노를 브라질로 오해한 비도씨는 얼굴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브라질 정당 사람들을 찾아 분주히 뛰었고, 또 그 큰 강당에 사람들 속에 묻혀있는 <레디앙>을 발견하기 위해 헤맸던 것이다. 덕분에 브라질뿐만 아니라 멕시코, 칠레, 베네주엘라 등 남미 정당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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