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2009년 02월 16일 11:14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세계 경제가 위기니 IMF때보다 더욱 극심한 경제 상황이니 하면서 무겁게 시작한 2009년. 그 무게감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 하나 발생되었다. 보기 드물게 언론에까지 터져나와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민주노총 간부 성폭력 사건이 그것이다.

    여태 민주노총, 노동조합 또는 지부에서 성희롱, 성폭행 등은 여러 차례 발생되었지만 이렇게 언론에서 크게 다뤄진 적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이 정권이 노동계를 아예 밟아 죽여 보려 일부러 저렇게 부풀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으나 하루하루 지날수록 언론을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노동운동가, 다 진보적인 것 아니다

    노조활동을 막 시작할 때, 나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진보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니 현장 작업장이 아닌 노조나 활동가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런 일이 발생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활동을 해가면서 나는 진보적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성의식까지 모두 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은 남성이 절대 다수인 곳이다. 여러 해 함께 일하다 보니 남녀 구분 없이 말이나 행동으로 서로간의 친근감을 표현할 때가 많고 대부분 그것을 친근감의 표현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치면 상대가 기분 나쁘거나 모멸감을 느낄 정도의 표현이 발생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당한 사람 모두가 신고하거나 공식적으로 제기를 하지는 않는다. 거의 대부분은 개인적인 일로 치부돼 당한 사람이 그냥 묻어두고 넘어간다. 그래서 웬만하면 서로간의 화해로 마무리된다. 문제는 주로 가해자가 상대에게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지 못하여 쉽게 화해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법이다. 이런 이유로 간단히(?) 해결되지 못할 때 피해자는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피해자, 문제 일으킨 가해자로 둔갑?

    피해자가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면 조직 내에서 이른바 ‘조직보위론’을 내세워 피해자의 제기 자체를 막으려 급급해 하는가 하면 일을 최소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종종 목격된다. 그 조직내부 대부분의 동료들이 조직보위를 우선으로 하다 보니 원래 피해자는 조직에 문제를 야기시키는 일종의 가해자로 둔갑되는 일이 종종 발생되는 것이다.

       
      ▲ 민주노총이 지난 11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정된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회 구성과 성폭력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성 구성, 투쟁계획 등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노동과 세계)

    이 와중에 피해자에게 2~3차 가해들이 끊임없이 발생이 되고 피해자는 더욱 큰 고통을 받게 된다. 이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애초 사건을 발생시킨 ‘당사자’보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 피해자를 둘러싼 각종 관계들에 있다.

    요즘엔 성희롱(폭력)예방교육 의무화로 현장조합원들조차 문제의 심각성을 조금은 이해하고 있어 본인이 가해자가 되었다고 느끼면 순순히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긴 한다.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 피해자를 위해 조직이 무엇을 해줄 것이냐에 있는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가 하자는 대로 모두 다하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함께 사회와 세상을 변혁하는 동지로 어깨를 걸어왔던 사람으로부터 성폭력을 당했을 때 그 피해자가 느꼈을 고통과 절망을 우선 그 사람 입장에서 느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민주노총에서 발생한 이번 성폭력 처리과정에서 내가 느낀 실망은 바로 이것이 부족했었다는 점에 있다. 누군가 의도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으나 피해자가 “이 사건이 알려지면 조직이 위태로워지니…”라며 침묵하도록 강요받았다고 느꼈다면 그 조직은 그것 자체로 잘못한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깃발을 세우고 20여 년 탄압 속에서도 굳건히 지키고자 했던 그 조직이란 과연 어떤 조직이라는 말인가. 여성조합원들이 언제 성폭력 당할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 함께 일하는 남성동료나 간부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긴장하게 하게 그런 조직은 아니지 않은가.

    조직보호논리 극복이 1차 과제

    예전에 한 여성간부가 성폭력 사건을 얼렁뚱땅 정리하려고 하는 노동조합에 제기한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앞으로 1박2일 상경투쟁이나 1박2일 수련회는 여성조합원들 오지 말라는 지침도 함께 내려야 한다, 성폭력 당할지 모르니 말이다.”

    이와 같은 비아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제 어디서든 피해자가 될 여지가 큰 사회적 약자가 진짜로 피해자가 되지 않게 배려하고 사전보호하는 평소의 조직운영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조직구성원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조직은 망할 수밖에 없다.

    구성원들로부터 외면당하면서 굳건히(?) 그 조직 이름만을 지키는 게 조직보위가 아님을 이번 총연맹 사건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조직이란 혼자서는 오히려 피해보기 일쑤인 약자와 소수를 위해 우선 존재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남성적인 가부장 조직문화, 군사문화, 조직패권적인 문화, 여성비하적인 문화 등등이 총체적으로 발현되어 발생한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하고 돌아봐야 한다. 진실로 뼈를 깎는 반성 속에서 접근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또다시 그냥 한 번의 사건으로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오징어 안주에 땅콩 나오듯 노래방 가면 당연히 도우미를 부르는 것, 여성’만’의 문제이기 때문에 여성 문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룸싸롱 가는 것을 용인하고 비판하지 않는 태도 속에 혹시 괜히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는 조직보호 논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민주노총이 내놓고 있는 대안인 조합원들의 교육, 성폭력 처리기구 설치, 성폭력 근절을 위한 매뉴얼 등은 바로 이러한 반성과 성찰 뒤의 일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