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혁명을 꿈꿀 수 있을까?
        2009년 02월 13일 12:37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작년 10월께부터 <레디앙>에는 ‘혁명’에 대한 여러 편의 글이 오르고 있다. 박노자와 ‘다함께’는 혁명과 개혁을 놓고 갑론을박을 계속하고 있고, 진보신당 정책실장인 장석준은 혁명을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세계와 변혁에 대한 나름의 진전된 성찰을 제시한다.

    박노자가 혁명의 가능성을 대단히 낮게 보는 데 비해 ‘다함께’는 그 징조들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박노자가 폭력 회피라는 원칙에서 혁명 자체를 회의하는 반면 ‘다함께’는 필요하다면 감수한다는 전통적 폭력관을 긍정한다. 장석준의 의견은 박노자와 ‘다함께’의 중간에서 박노자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거나 제3의 별도 입장인 것으로 여겨진다.

       
      ▲ 왼쪽부터 박노자, 다함께(출처=다함께 홈페이지), 장석준

    이 글은 세 논자의 혁명관에 대한 단편적 감상이며, 그 감상으로부터 도출해보는 시론(試論)이다.

    1. 혁명의 현실성

    이번 토론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박노자의 혁명관이다. 그는 대학생들의 데모 뒷풀이 객담, 러시아와 중국의 영웅담 소설, 장명국의 <새벽>이나 박노해의 <노동해방문학>에 오르던 ‘봉기 계획’이 아니라 사실로서의 혁명을 말한다.

    “혁명이란 결국 ‘이념’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한 계급의 조직화된 ‘힘’의 표출이 아닌가요?” – 「나의 혁명론 ②」, 2008. 11. 16

    “다수의 노동자들이 한나라당을 찍으면서 사는 나라에서는, 아주 비상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혁명’, 즉 사회 경제 정치적 형태의 완전한 변모는 발발될 가능성이 매우 낮죠.” – 「나의 혁명론 ④」, 2008. 12. 11

    장석준 역시 이와 비슷하게 “최근 몇 주일간의 사태만으로 현대 자본주의의 붕괴를 말할 수는 없다. 심지어는 20세기 말에 시작된 세계화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아직은, 힘들다(「동시대인의 의견 ①」, 11. 3)”고 술회한다.

    반면 ‘다함께’는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조금 더 낙관적이다. 그들은 “침체해 있던 서구의 노동 계급 운동은 1990년대 중반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을 필두로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 게다가 최근 이러한 곳에서는 세계 경제 위기 상황에서 자본가들의 공격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정병호, 「박노자 ‘혁명론’에는 혁명이 없다」, 2009. 1. 15)”고 진단한다.

    이런 진술은 1999년 시애틀 시위 때 가장 유행했었다. 그런데 여러 나라의 자칭 ‘혁명가’들이 드는 ‘혁명적 정세’는 대개 전혀 혁명적이지 않은 수세적 경제파업이나 가두 일탈, 심리적 흥분상태들일 뿐이다.

    따지자면,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센 진짜 혁명들이 빈발했었다. 68혁명의 후폭풍, 베트남 전쟁, 니카라과 혁명, 이란 혁명, 필리핀․한국 등 아시아에서의 민주변혁 등에 ‘혁명가’들은 열광했지만, 결국 혁명이 승리하지 못했음을 상기해야 한다.

    어느모로 살펴도 반자본주의 운동의 퇴조기가 끝나고 반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징조를 찾기는 어렵다.

    가두시위가 혁명인가?

    ‘국제주의자’인 ‘다함께’는 “또한 자본주의 세계화 덕분에 국제주의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더 열려 있다(윗글)”고 객관조건의 구조 변화에 대해서도 낙관적 견해를 비춘다. 그런데 세계화가 과연 진보적 가능성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실제에 있어 세계화는 개별 국가의 노동계급을 국가경쟁력이라는 덫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들었고, 집권했거나 집권에 가까운 사민당과 공산당들에게 세계화에 노정된 국가 경영의 부담을 짊어지우며 개혁주의화 시켰다.

    “권력을 잡은 운동들은 바로 국가 간 체제의 작동 자체에서 비롯되는, 국가기구들에 의한 제약들에 곧바로 종속되기 때문이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

    혁명을 하겠다면, 혁명을 먼 미래 가상주체의 알지 못할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특정세력이 계획하고 추진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용산참사에서 보여지듯 자산 증식을 위해서는 사람 몇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있다.

    진보적 사회운동의 세례를 받은 대중은 그나마 개화되었으리라는 착각에 대해서는 민주노총이 충분한 대답을 해주고 있다. 그들의 ‘노동해방’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취약계층을 전투적으로 배제하는 것으로 마감되고 있다.

    건설경기를 침체시킬 것이라고 부유세에 반대한 건설노조, 담보 확보가 어렵다고 임대차보호에 반대한 금융노조, 영업이익이 줄 것이라고 이자제한에 반대한 사무노조, 일거리가 많아진다고 공공급식과 아동보건에 반대한 교원노조,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핵폐기에 반대한 전력노조와 과학노조가 작금의 ‘민주노조운동’이다.

    촛불시위자들을 엄벌에 처했던 판사가 사회주의노동자연합 회원들을 풀어준 이유는 “이들의 활동이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한 소명이 부족”했기 때문이란다. 오세철 교수 등이 너무도 훌륭하게 보안을 지켰거나, 술먹고 유리창 깬 청년실업자보다는 체제에 덜 위험하다고 판정받았거나 둘 중 하나다.

       
      ▲ 지난 해 8월 27일 서울 옥인동 대공분실 앞에서 사노련 공안탄압 규탄 및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긴급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오른쪽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규탄발언을 하는 오세철 교수의 부인 유승희씨 (사진=프로메테우스) 

    약자에 전투적인 민주노총, 위험하지 않은 사노련

    “‘다함께’도 과연 그런가요? 과문의 탓일 수도 있지만, 저는 ‘다함께’가 이끈 파업이나 ‘다함께’가 지도하는 노동조합을 아직도 본 바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함께’가 공장 노동자로 적위군을 조직하여 청와대를 포위, 공격할 확률이 현실적으로 아주 낮기에 그가 좋은가 나쁜가에 대한 쓸 데 없는 이야기를 당분간 그만둡시다.” – 「나의 혁명론 ①」, 2008. 11. 12

    피켓 예쁘게 만들어 피케팅 잘하는 게 혁명인가? 피켓을 배너라 바꿔 부르는 게 혁명인가? 혁명은 홈쇼핑 위시리스트처럼 좋아하는 이론이나 구호를 모아놓는 기호(嗜好)가 아니고, 혁명은 책 많이 읽는 공부도 아니다. 그저 실천일 뿐이다.

    사상과 이념, 혁명은 실천의 역사다. 남에게 영향을 주려 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표방이 아니라 남에게서 평가받는 것이고, 필연이 아닌 우연, 선의가 아닌 결과, 성공이 아닌 실패까지 포함하는 실천의 역사적 축적이다. 실천의 문제에 있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혁명적 개인은 꽤 있겠지만, 혁명하는 정치집단은 거의 없다.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점점 보통정당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민주노동당은 열 개의 예측을 하여 두어 개를 맞추는 몇 사람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지금 그 당은 사후에는 언제나 훌륭한 분석과 평가를 내놓지만, 사전에는 하나의 예측도 못하는 백 명이 되었다.

    예전에 민주노동당의 간부 한 사람은 적어도 열 명 정도는 꼬시고 관리했지만, 지금의 간부들은 열 명 정도의 보조를 받아야 겨우 일하는 사람이 돼가고 있다. 지금의 당은, 실험가와 도전자의 당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 이재영, 「노트」, 2004. 12. 25

    2. 이분법 : 폭력과 비폭력, 혁명과 개혁

    “심장이 찟겨지는 듯한 고통을 받지만, 그가 일단 돼지를 빼앗고 조선인과 그 가정, 그 작은 아이들을 굶어죽게 놓아둡니다. 그렇게 하고도 계속 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혁명가인 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 ‘위대한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젖먹이 아이라도 죽일 수 있는 처참한 광경이야말로 혁명입니다. 이건 한국 경찰에 의한 ‘닭장 투어’ 정도를 벌써 심각한 탄압으로 아는 이들로서는 상상이 잘 안가는 일일 것입니다.” – 박노자, 「서구 민중에 대한 낭만적 꿈 버려라」, 2008. 10. 28

    러시아 출신의 박노자는 끔찍한 폭력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려 몸부린친다. 그래서 그는 “급진적 개혁운동이 현실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윗글)”고 토로하는 동시에 “저는 혁명을 ‘비판’하려 하지 않습니다. 혁명이 좋아서가 아니고 혁명을 비판하는 것이 마치 자연현상을 비판하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최선은 급진적 개혁」, 2008. 10. 31)”라고도 변명한다.

    현대 유럽의 사민주의자들처럼 혁명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가급적 급진개혁을 추구하겠다는 박노자의 입장은 어쩌면 혁명의 원초에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혁명의 목적인 인간을 되찾으려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혁명적 용의주도함과 일상의 조심스러움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에 대해 ‘다함께’는 “혁명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은 혁명 세력의 폭력에 대한 선호 때문이 아니라 반혁명 세력이 폭력을 동원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정병호, 「‘근본적 변혁’이 더 현실적이다」, 2008. 11. 10)”라고 비판한다.

    우선, 혁명국가에 대한 반혁명세력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세상 어느 국가권력도 “그러세요? 자, 여기 나라를 내드릴게요”라고 순순히 응하지는 않으니까. 문제는 국가권력에 다다르는 경로에 대한 것이고, 이 문제에서 혁명폭력이 방어적이라는 ‘다함께’의 주장은 절반은 참이고 절반은 거짓이다.

    “유일한 수단은 혁명적 테러리즘”

    레닌은 “인간에 대한 폭력은 우리의 이상과 부합하지 않는다”거나 “사회주의는 인간에 대한 폭력 행사에 반대한다”고 부처처럼 설파하기도 하고, “폭력은 자신들의 지배를 다시 확립하려는 자들에 대해 효과적이다”라거나 “피억압계획의 해방은 폭력적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마키아벨리처럼 단언하기도 한다.

       
      ▲ 1840년대 후반, 브뤼셀에서 독일노동자들을 조직할 당시의 맑스. 맑스는 브뤼셀에서의 연설을 통해 ‘평화혁명’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양면성은 보통선거권에 큰 기대를 걸면서도, 과연 그 수단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맑스 이래의 딜레마로부터 연유한다. “낡은 사회의 잔인한 죽음의 고통을 단축하고 단순화하며 또 집중하는 수단은 단 하나밖에 없다 … 유일한 수단은 혁명적인 테러리즘이다.” – 맑스, 「빈의 몰락」, 1848

    나는, “18세기와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전반까지는 다중 이해 이전의 권력 획득이 일반적 현상이었고 그 중 특수한 양상을 혁명이라 하였는데, 민주주의가 확립된 현대 사회에서는 다중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일반적이다(「클리프, 주대환 그리고 영국노동당」, <텍스트>, 2008년 10월호)”라고 주장했었다.

    폭력이 다중의 이해와 권력 획득의 간극에서 발생한다는 말은 그 간극의 크기에 따라 폭력의 빈도와 강도가 좌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중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일반적”이라는 말은 폭력 배제가 현대의 정치 규범으로 확립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확립에 대해 장석준은 “일단 대의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하면, 그 다음부터는 노동 대중 자신이 선거를 유일한 집권 경로로 받아들이게 된다(「동시대인의 의견 ①」)”고 설명한다.

    지롱드와 자코뱅이 서로를 암살하는 것이 바로 혁명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가 수도(首都)의 지식인들에게 독점돼 있었기 때문이다. 1848년 혁명과 파리꼼뮨 시대에 이르러서 정치는 ‘시민’과 도시 노동자에게까지 이르게 되고, 20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기마용병과 농노들을 정치에 끌어들인다. 이때 정치는 참수한 머리를 창에 꿰어 전시하거나, 사람 가죽을 벗겨 말 안장에 걸고 다니는 행위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요컨대, 혁명 등 정치의 구체적 양상은 정치 참여자의 범위 확대에 따라 변모하고, 행위 규범 역시 참여자들이 향유하고 있는 문화에 의해 규정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정치 참여자들은 백 년 전 러시아의 행위 규범을 어느 정도까지 수긍할까?

    폭력은 혁명을 방해한다

    현대 민주사회의 일상적 정치 참여자들이, 지난 시대의 폭력에 비하면 점잖기 그지없는 행동조차도 ‘야만’으로 낙인찍고, 그런 인식이 혁명세력의 권위와 명분을 심각하게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어렵다.

    모든 폭력 상태는 약자를 도태시킨다. 역사는 거의 대부분의 혁명 상황에서 억압자들보다 피억압자 측의 피해가 양에서든 질에서든 압도적으로 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는 혁명의 승리가 혁명세력의 물리력 우위에 의해서나 아니라, 물리력에 대한 내성(耐性)에 의해 달성됨을 의미한다.

    또한, 역사는 내전 과정에서 다수의 볼셰비키와 선진 노동자들이 희생된 것이 체제의 발전을 이루는 데 큰 장애가 되었음을 전한다. 결과적으로 폭력은 혁명으로의 진입 가능성을 일시적으로 높이기는 하나, 혁명과 이행의 성공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장애한다.

    그렇다면 폭력을, ‘다함께’의 주장처럼 수동적으로 선택될 수도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은 곤란하다. 폭력은 현대 혁명세력에 의해 능동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2편에 계속>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