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념도 선거도 쓸모없다”
        2009년 02월 13일 11: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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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외 효과

    홍기표가 왜 내 꿈에 나타나는 거지? 두어 번 얼굴 본 것밖에 없는데.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고, 그는 내 이름조차 모를텐데. 얼마 전 울산에서 ‘백수탈출투쟁가’를 재미있게 듣긴 했지만….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아무런 배경도 없는, 붉은 도화지같은 공간이었다. 나는 황급히 울타리를 둘러치고 있었고, 홍기표는 자동무기로 나의 울타리를 마구 부수는 게 아닌가. 이 무슨 개꿈인지. 꿈속에서도 ‘꿈이 뭐 이래?’를 연발하는 황당한 시츄에이션.

    출근하려는데 시당에서 보낸 대의원 선거 홍보물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열어보지 않았다. 재창당대회라…. 봉투에 담겨져 있을 얼굴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번 재창당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을까? 다들 소중하고 반가운 사람들이지만 글쎄, 봉투가 참 낯설었다.

    2. 두 홍씨

    유비무환(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는 뜻의 고사성어)이라지만 요즘은 비도 안 오는데 환자가 없다. 시간이 많다. 언제나처럼 <레디앙>을 읽는다. 두 홍씨의 글에선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진다.

    2012년을 진단하는 큰 홍씨(홍은광-편집자주)의 글에는 언뜻 공감이 가기도 한다. 이대로 가다간 도로민노당 아니면 제2사회당이라…. 근데 이 뭥미? 사민주의로 포지셔닝을 해야 한다고? 내가 모르는 단어를 한꺼번에 두 개나 구사하다니. 속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작은 홍씨로 넘어간다. (허걱! 또 홍기표라니!) 놀란 가슴을 누르고 글을 읽는다. 홍기표는 진보신당 출범의 역사적 의미를 잘도 짚어내었다. 진보-보수의 구도가 아닌 좌-우의 구도로 가야한다는 주장도 반가웠다. 그렇잖아도 진보라는 단어에 식상해있던 차였는데. 근데 마지막이 좀 신파적이다. 꿈, 체온, 씨앗…. 아! 이 얼마나 심금을 웃기는 단어들인가.

    3. 탈당의 추억

    홍기표가 지키고 싶은 꿈과 씨앗이 지금의 진보신당을 말하는 건 아닐 거다. 문득 1년 전 내 손으로 썼던 탈당성명서가 생각나 꺼내 보았다.

    “…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의 탈당은 낡고 병든 구세대 진보정치에 고하는 종언인 동시에 밝고 건강한 다음 세대 진보정치를 향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2008년 1월 …”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착찹한 심정이었고, 누구는 술자리에서 눈물까지 보였다. 그러나 나는 소녀시대처럼 발랄했고, 김연아처럼 고무되어 있었다.

       
      ▲ 2008년 2월 24일 열린 ‘진보신당 건설을 위한 대토론회’에는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3백여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사진=레디앙)

    처음 민주노동당에 발을 들여놓을 땐 운동권 출신이 아닌 탓에 약간은 쭈뼛쭈뼛한 표정이었다. 근데 몇 년 지나고 보니 이거 참 아니었다. 쭈뼛할 이유도 없었고, 무작정 따를 것도 아니었다.

    다들 자기가 주인인양 큰 소리치지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였고, 될 성 싶은 집안이라기엔 좀 거시기했다. 그러던 차에 제대로 된 진보정치하자는 사람끼리 당을 만든다고 하니 어찌 발랄하지 않을 수 있나. 밤을 도와 성명서를 쓰고, 동지들과 함께 50여 명을 조직해 냅다 탈당해버렸지.

    후속 탈당이 더뎌지면서 답답했지만 우리는 공부모임을 해가며 기다렸다. ‘종북 타도’ 기치를 올리며 탈당을 이끈 조승수가 정작 본인의 탈당을 미루는 것도 기다려 주었고, 노회찬 심상정이 탈당파를 비난해도 참아주었다. 함께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거든.

    심상정이 창당준비 테이블에서 이른바 선도탈당파를 철저히 배제하고 자기들 사람들로 채우려고 했을 때도 화를 눌렀다.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장석준이 ‘형식적 창당, 내용적 창당’ 운운하면서 ‘총선을 치른 뒤 철저하게 재창당하자’고 말했을 때도 ‘역시 나보다 생각이 낫구나’ 하면서 따랐다. 하긴 안 따르면 어쩔거야, 평당원인 내가.

    총선과정에서 나름 재미있게 뛰었다. 심상정의 선거연합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려고 애썼다. 결과는 무척 아쉬웠지만 어찌 보면 한 명도 당선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겠다 싶다. 누구 하나 당선되었다면 진보신당은 오로지 그 한 사람으로 대표되면서, 애초 생각했던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은 더 힘들어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4.재창당

    낮에 대표 한 분과 전화로 만났다.

    “재창당 과정에 불만들이 많은데요.”
    “지금 비판적인 분들이 말하는 재창당의 모습은 원래 가능성이 낮은 형태였습니다.”
    “다른 세력들과의 토론 같은 노력들이…”
    “그동안 녹색이나 노동 쪽의 사람들을 만나 재창당을 의논했지만 그쪽에선 원래 참여의사가 없었다는 걸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사실 ‘다소 문제가 있지만 재창당 후 마무리 지어가자’는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었다. 일전에 어느 토론회에서 다른 대표 한 분도 저 분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원래 의도했던 재창당이 아니라면 지금 하는 재창당이란 건 뭥미? 이건 리모델링인가, 조직 정비 사업인가? 탈당 이후 창당대회 비슷한 행사만도 서너 번 한 것 같다.

    진보의 여러 가치들을 대표하는 세력들이 모여서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드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저 분들은 왜 그걸 분명히 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탈당할 때 꿈꾸었고, 계속 말해왔던 재창당은 이런 모습이 아니란 걸 알면서.

    진보신당 대표가 몇몇 단체 인물들을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안 한다더라”고 말하면, 그걸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진보세력간의 토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다. 나도 그들과 대화하고 싶었다, 탁 트인 자리에서. 서로의 생각을 알아가고, 공감대를 찾아서 함께 일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런 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

    5. 2010 혹은 2012

    지난주 프랑스에선 혁명적 공산주의동맹(LCR)이 해체되고 반자본주의신당(NPA)이 새로 출범했다. 반자본주의신당은 매우 오랜 토론 과정을 거쳤다고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존재해온 정당으로 오해할 정도로 맹렬한 활동을 하면서도 정식 출범을 미루면서 치열한 토론을 벌여왔다고 한다.

    우리는 그동안 대체 무엇을 얼마나 토론했었는지, 우리의 시급한 화두는 무엇인지 함 생각해봤음 좋겠다. 두 홍씨가 사민주의, 좌-우 구도를 이야기했지만 지금 진보신당이 고민해야할 문제는 이념도 아니고, 선거 전략도 아니다.

    지도부와 평당원 사이에 분명한 견해 차이가 있으면서도 치열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그 차이조차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가장 크게 와 닿는다.

    진보신당 지지율 1%, 인지도 30%. 이대로 가다간 2012년 전망이 어둡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 한쪽은 그러니까 시급히 조직을 정비해 2010 선거를 잘 활용해야한다고 하고, 한쪽은 백년 갈 정당이라면 늦더라도 제대로 된 재창당 과정을 거치자고 주장한다. 정당이 선거를 떠나 존재할 수는 없지만 내 입장에선 또 다시 선거를 빌미로 이 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놓기는 싫다.

    노-심은 당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 같다. 두 분 다 ‘책임’을 자임하고 있다. 사실 두 분 다 스타 정치인이긴 하지만 공식직함이 없이는 TV 토론회에 얼굴 내밀기가 힘들 것이다. 두 분이 나서면 선거에 유리한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애초에 꿈꾸었던 진보의 재구성은 더욱 멀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래! 어느 대표의 말처럼 어느 쪽으로 가건, 노심을 어떻게 보건 ‘당원이 판단할 몫’이다. 이제 나 자신부터 다시 묻고 싶다. 왜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는가. 그리고 홍기표! 다시는 내 꿈에 나타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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