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 vs 식모, 권력투쟁 & 시대정신
    By mywank
        2009년 02월 13일 09:2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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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년 군사정권에 의해 영화법이 제정, 공포되기 이전까지의 영화 산업은 년간 200여 편에 달하는 제작 편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업적 계획과 통합된 시장 구조를 전제로 체계화되고 안정화된 산업으로 정착된 것도 아니고, 작가의식에 기반을 둔 예술 매체로서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도 아니었다.

    군사정권과 영화산업

       
      ▲영화 <하녀> 포스터

    어떤 면에서는 장기적인 투자를 전제로 한 사업이라기보다 단기간 내에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일회성 사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사 주도의 제작이 아니라 확보된 시나리오를 전제로 제작비를 끌어들이고, 그 흥행 정도에 따라 이후의 행보가 결정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므로 영화제작에 있어서 시장의 기본 전제인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입각한 제작과 배급 구조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제작은 투기적 성격이 강한 사업이었다.

    게다가 자유당 정권하에서 임화수를 비롯한 브로커들에 의한 변칙적 시장구조는 합리적 구조화나 자유로운 작품성 구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도 영화관객은 꾸준히 증가세를 보여 1961년부터 1970년까지 년간 1인당 영화관람 회수는 5.3회에 이르고 있고 동원된 관객 수는 1억 7천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정된 영화법은 제작과 배급이라는 외형적 측면에서는 물리적인 강제에 의해 시장구조를 개편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국 영화 수출도 60년대 들어 본격화되면서 61년까지는 미미한 수준이었던 해외 수출이 62년 5편, 63년 15편, 64년 87편, 65년 33편, 66년 48편, 67년 49편, 68년 24편의 수준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64년 87편에 이르던 수출 편수가 이후 감소 추세로 돌아서게 되는 것은 당시 국내의 억압적 사회 상황에서 비롯된 표현과 소재의 제한, 작가성이나 영화매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진행된 기업화 등에서 비롯된 작품의 질적 저하 등이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상옥의 낙관론과 김기영의 경고

    한편에서는 설립자이자 운영의 실세였던 신상옥 감독 1인 중심의 운영체제를 유지하면서 그의 성쇠에 따라 영화사 자체가 부침을 함께 하면서 한국 영화의 기업화 시도와 그 한계 또는 내부적 모순을 고스란히 보여준 신필름 같은 사례가 있는가 하면 같은 시기, 기업화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면서 독자적인 영화 미학을 추구한 김기영 감독과 같은 독특한 독립영화도 있었다.

    신상옥 감독이 <로맨스 빠빠>를 만들어 당대 가족의 한 단면을 코미디로 그려내며 현실의 갈등이 가족 안으로 들어오면 웃음으로 봉합될 수 있다는 낙관을 펼치던 해에, 김기영 감독은 <하녀>를 통해 소름끼치는 가족의 지옥도를 만들어내면서 아무리 단란한 가정도 외부 사회의 변화가 스며드는 순간 송두리째 흔들리고 무너지게 되리라고 경고한다.

    <하녀>는 ‘근대화’가 사회를 휩쓰는 강령이던 시대에 가족은 어떻게 흔들리고, 가정은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 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화’한다는 것은 ‘~’이 아니던 어떤 것이 ‘~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그것이 한 사회의 강령이 될 때, 더구나 무시무시한 감시와 통제 아래 추진될 때 ‘~’이 아니던 그 사회와 구성원들은 ‘~화’ 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자기정체성의 혼란과 균열을 겪게 된다.

    한편으로는 편집증적으로 강령에 복속 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증적으로 자기자신으로부터 일탈해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화’ 과정은 크게는 역사 속에, 작게는 개인의 삶 속에 폭력과 상처를 아로새기게 된다.

    60년대 기록으로의 영화

    이 땅에서 1960년대는 ‘근대화’라는 주문이 온 나라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미 일제의 식민 경험 속에서 근대화라는 열차가 출발했다고는 하나 그 열차에 강제로 올라타야 했던 승객들의 목적지는 근대화라는 종착역이 아니라 민족해방, 또는 조국광복으로의 탈선이었다.

    탈선 이후 새로이 갈아타야 했던 열차는 분단 상황에서 끊기고 휘어진 철로 위에서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근대화는 경유해야만 하는 지점이었고 우리 사회는 자발적 동력이 아니라 폭압적인 견인에 의해 그 역을 향해 마구 질주하게 되었고, 그 시기를 우리는 ‘516 군사정권’, ‘새마을 운동’, ‘조국근대화’ 따위의 풍경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볼 때 근대화 과정은 어느 사회에서든 사회의 해체라는 반작용을 그림자로 드리우고 있지만 이 땅에서의 근대화는 그림자가 실체를 압도할 정도로 큰 정체성의 위기를 몰고 왔으며 <오발탄>, <하녀>와 같은 이 시기의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그러한 위기를 포착해낸 기록으로 생생히 남아있다.

       
      ▲<하녀>의 한 장면

     
    근대화 과정은 한 사회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면서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더 잘게 나누면 남성과 여성, 여성과 여성을 해체시켰다. 해체된 알갱이로서의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에서 권력을 향해 서로에 대한 무한 투쟁의 장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60년대 근대화 과정에서 해체된 농촌을 떠난 당시의 젊은 여성들은 공장의 여공으로, 이미 근대화된 도시 가정의 하녀(더욱 정확히는 식모)로, 그도 아니면 근대화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윤락 여성으로 도시를 향해 몰려들었다.

    농촌해체와 여성들의 출구

    이들 값싼 노동력은 근대화의 밑거름이기도 했지,만 비록 작다고는 해도 자신의 경제력을 갖게 된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권력에 눈을 뜨게 만드는 열쇠이기도 했다. 권력은 투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에 이제 투쟁과 폭력이 사회 전반에 불거지게 되었다.

    영화 <하녀>는 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벌어지는 이런 투쟁과 폭력의 극한을 보여준다. 한창 힘이 넘치는 나이인 젊은 여공들에게는 채찍으로서의 규율 뿐만이 아니라 당근으로서의 취미활동이 좋은 통제수단일 것이며, 노동과 통제의 힘든 생활 속에서 잘 생긴 음악선생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탈출구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음악선생은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 여공들을 필요로 하며, 사랑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그에게 생계에 보탬이 되는 개인 교습의 빌미로 한 여공이 접근한다.

    강사료를 지불하는 공장의 여공으로서, 그리고 따로 개인적인 교습비를 지불하는 개인교습생으로서, 이 여공의 권력은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비중으로 그의 가정에 스며든다. 그는 여공의 사랑은 내칠 수 있지만 그녀의 경제력은 내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는 재봉틀을 돌려 이층집을 짓고, 피아노를 사고, TV를 사는 생활력 강한 아내가 있다.

    아이들에게는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가부장답게 엄한 아버지인 그는 생활력 강한 아내에게는 밥도 짓고, 어깨도 주물러주는 부드럽고 자상한 남편이다. 아내의 생활력은 그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봉사하게 만드는 권력이다. 그런 아내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그의 가정에 하녀가 들어오게 된다.

       
      ▲영화의 장면들.

    개인교습비라는 권력으로 음악선생의 가정에 파고든 여공은 공장 기숙사의 규율 위반(흡연)이라는 덜미와 적지 않은 월급이라는 미끼로 동료 여공을 하녀로 만드는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피아노를 배우던 여공이 음악선생을 유혹하던 현장을 훔쳐 본 하녀는 그것을 미끼로 주인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임신에 이르며, 집안에서 권력을 장악해 나가기 위해 도발하기 시작한다.

    가정을 지키려는 아내와 빼앗으려는 하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은 한 남자에게서 비롯된 두 여자 모두의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가부장의 권력을 상징하는 자식이 제거되는 것이다. 두 아이의 죽음은 모두 계단에서의 추락이다.

    아내와 하녀의 권력투쟁

    신분 상승과 권력의 상징으로서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은 태아와 아들의 목숨에 기댄 주인 남자의 권력이다. 쥐를 무서워하는 아내와 쥐를 때려죽이고 태연히 손에 쥐고 흔드는 하녀는 아래층과 위층에서 쥐약을 사이에 두고 무시무시한 투쟁을 벌인다.

    그런데 정작 남자는 두 권력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뿐 자식뿐 아니라 자기자신도 지키지 못한다. 하녀의 권력에서 달아나기 위해 동반자살을 택한 남자가 죽음의 순간에 아내를 향해 손을 뻗칠 때, 아내는 그를 보는 대신 자신의 권력을 유일하게 보장해 줄 재봉틀에 매달려있다.

    영화의 시작과 말미를 통해 이 모든 것이 신문기사에서 비롯된 상상일 뿐이라고 하지만, 신문은 가장 생생한 현실의 전달자이며, 감독 자신이 밝히기를 영화 <하녀>의 모티브는 당시 신문 사회면 기사로 보도된 사건에서 얻은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기괴하고 섬뜩한 영화 속 상상의 내용은 허구가 아니라 현실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실제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감독 김기영은 치밀한 장면화와 날카로운 심리묘사를 통해 그런 현실을 섬뜩한 영상으로 포착해낸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이니 표현주의니 심리주의 등으로 설명되곤 하는 감독 김기영의 작품 세계는 <대한 뉴스>로 출발해 미국공보원의 <리버티 뉴스>로 영화 인생을 시작한 그의 이력과 ‘좋은 영화에는 플러스 알파의 시대 정신이 있다’는 감독 자신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자기만의 독특한 영상 속에 한 시대의 현실을 담아내는 날카로운 현미경이다.

    그는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본 한 조각의 세포로 한 인간의 유전정보를 읽어내듯이 사회의 한 단면에 들이댄 카메라의 렌즈로 당대의 현실을 읽어내는 탁월한 작가이다. 한국최초의 작가주의적 감독, 자신만의 독특한 영상세계를 빚어낸 스타일리스트 등으로 불리는 김기영의 영상세계는 근대화 과정에서 벌어진 틈새에서 시대의 편집증과 분열증을 포착해낸 한국영화사의 현미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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