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 교수 주장엔 주어가 없다
        2009년 02월 05일 03: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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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 교수의 글을 보니 그가 민주노동당, 나아가 진보정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새삼 알 것 같다. 조 교수는 “진보정치의 ‘선거연대’를 촉구한다”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게 울산 북구 재보궐선거와 울산시장 선거를 ‘빅딜’하라고 권유했다. 먼저 그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놀랍다.

       
      ▲ 박승흡 민주노동당 대변인

    조 교수는 “진보정치의 전략지라고 꼽히는 울산”이라고 썼다. 말하자면 당선 가능성이 높은 곳이라는 이야기다.

    하기는 87년 여름 이래 엄청난 숫자의 ‘예비 혁명가들’이 집결했던 울산이고, 지역구 유권자 가운데 2만여명이 현대차 노동조합 조합원과 그 직계 가족인 울산 북구이니, 그런 소리가 나올 만하다.

    사실 ‘소수정당’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에서만큼은 ‘여당’이었다. 그랬던 것이 2005년 10월의 재보궐선거부터 시작해 선거 때마다 졌다.

    원내 진출 이후 불과 1년 남짓한 뒤의 일이고, 지난 총선을 제외하면 민주노동당이 아직은 ‘하나’였을 때 치러진 선거들이었다. 왜 민주노동당은 ‘텃밭’을 지키지 못했을까.

    이 지역에서 진보정치 최초의 국회의원 또는 구청장 당선자는 조승수 후보다. 그는 1998년 지방선거에서 1만9,555표로 1만2,959표를 얻은 한나라당 후보를 눌러 북구청장에 당선됐다. 친한나라당 무소속과 자민련 후보가 합쳐 1만여표를 얻었고, 투표율은 63.8%였다.

    이후 최용규 후보 1만8,867표(2000년 총선, 563표차 낙선, 투표율 60.6%), 이상범 후보 2만4,294표(02년 지방선거, 1,663표차 당선, 투표율 59.8%), 조승수 후보 2만7,212표(04년 총선, 7,260표차 당선, 열린우리당 후보 1만여표 획득, 투표율 66.6%), 정갑득 후보 2만2,835표(05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1,793표차 낙선, 투표율 55.2%), 김진영 후보 2만3,682표(06년 지방선거, 3,878표차 낙선, 투표율 55.7%), 이영희 후보 1만6,621표(08년 총선, 7,514표차 낙선, 친박연대 후보 1만여표 획득, 투표율 47.8%)로 이어진다.

    투표율 하락과 함께 가는 민노 후보의 득표율

    이 추이는 진보정치로서는 매우 뼈아픈 시사점들을 담고 있다. 첫째, 울산 북구에서 진보정치 후보들의 득표는 2004년 총선을 정점으로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진보정치 후보와 범한나라당 후보들의 표차는 30,00여표였지만, 10년 뒤에는 다섯 배가 넘는 1만7,000여표차로 벌어졌다.

    우리가 만일 진보정치의 진정성을 믿는다면, 민주노동당이 ‘여당’이었다는 지역에서 ‘송덕비’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유권자로부터 이런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인구유입이라는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울산 북구에 부자들만 이사 온 게 아니라고 할 때, 결국 이 수치는 지난 십년 동안 이 지역에서 진보정치가 대체 누구의 편을 드는 정치를 했는지 의심케 한다. 실제로 이 기간 동안 이 지역에서 유산계급의 조직적 저항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우리 사회는 들은 바 없다.

    다시 말해 울산의 진보정치는 ‘진보적’이었을지는 몰라도 급진적이지는 않았고, 계급적이지는 더더구나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지역 진보정치의 주역들이 자처한 일이다. 그 결과 울산의 진보정치는 자신의 동심원 안에 광범위한 하위계층을 결집시키는 데 실패했고, 탄생기에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준 현대차노동조합이 사회적 지지를 잃게 되자 함께 추락하기 시작했다.

    둘째, ‘진보정치의 전략지’라는 울산에서조차 투표율의 하락 경향은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 2004년 총선과 2008년 총선의 투표율 차이는 무려 20% 포인트에 달했다. 사실 진보정치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느냐 아니냐는 득표율보다는 투표율에서 더 확연히 드러난다.

    진보정치란 피억압 인민대중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진보정치는 민주화가 일정한 궤도에 오르면 투표율의 하락을 안전장치로 사용하는 유산계급의 정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진보정치란 시끄럽고, 파당적이고, 선명하고, 날랜 것으로, 이럴 때에만 하위계층을 투표소로 불러들일 수 있다.

    이 점에서 울산 북구는 그 어떤 지역보다 훨씬 더 나은 조건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만일 진보정치가 자신의 손에 들어 온 권력을 대중에게 돌렸다면 하위계층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신명나게 투표소로 향했을 것이다. 거꾸로 상위계층 또한 그들대로 필사적으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나서게 되면서 투표율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울산 북구의 투표율은 높아지기는커녕 다른 지역들처럼 내려가기만 했다. 이것은 진보정치의 잘못이다. 울산 북구가 다른 지역보다 더 나은 조건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결과적으로 울산 북구의 진보정치는 다른 지역보다 잘못한 게 더 많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빅딜’, 진보신당의 원내진출을 위한 길 터주기(?)

    사정이 이러한데, 조 교수는 진보정치의 잘못을 발본색원하라는 쓴소리는 하지 않고 ‘진보정치의 전략지’라는 달콤한 말로 ‘빅딜’을 권유한다. 그렇다면 울산의 유권자들은 진보정치의 ‘쌈짓돈’인가. 만일 조 교수께서 진보정치가 이렇게 생각하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진보정치와 유권자 모두를 우습게 여기는 처사다. 그래서 발상이 놀랍다는 것이다.

    더 아연한 것은 조 교수의 설득 방식이다. 조 교수는 “눈앞에 다가온 선거에서는 연대해야 한다”고 전제한 뒤 곧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길어도 인용을 해보자.

    “진보정치의 전략지로 꼽히는 울산의 예를 들어보자. 울산시 북구에서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던 조승수 전 의원이 진보신당 소속으로 출마를 준비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탈당을 선도했던 조 전 의원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크고, 조 전 의원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도 민주노동당은 후보를 내야 한다는 말까지 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적 대응은 정치적 자해 행위이다.” 이러면서 예의 ‘빅딜’ 권유가 이어진다.

    조 교수가 민주노동당에 반감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은 조 교수가 애정을 갖고 있다는 진보정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민주노동당은 정당이고 공당이다. 정당이 선거 때 후보를 내는 것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사업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이 울산 북구에 후보를 낸다는 것은 당의 권리이자 의무다.

    그런데 조 교수는 조승수 전 의원에 대해서는 “출마를 준비한다고 알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언급을 배제한 채 “조 전 의원을 떨어뜨리기 위해서라도 후보를 내야 한다는 말까지 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

    만일 어떤 독자가 조 교수의 글을 ‘민주노동당은 후보를 낼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데 진보신당에서 조 전 의원이 나온다고 하니까 저격수를 내보낸다고 하더라’는 뜻으로 읽는다면, 이 독자는 난독증에 빠진 것인가, 아니면 행간이 의미하는 바를 득한 것인가.

    이런 식이라면 조 교수의 ‘선의’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류의 ‘선의’는 조 교수의 글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선거연합은 ‘야합’도 ‘뒷거래’도 아니며, 극소수파인 진보정치의 원내 진입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자구책이다”라는 표현을 보자.

    조 교수는 민주노동당이 비록 5석이지만 원내에 진입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진보정치’는 ‘진보신당’이라 고쳐 써야 사실에도 맞고, 글 쓰는 사람도 떳떳해지는 게 아닐까. 조 교수의 ‘빅딜’이 실제로는 ‘불공정거래’가 될 뿐이라는 점은 굳이 지적하지 않겠다.

    민주주의 위기는 민주화와 함께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누워서 침 뱉기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훨씬 오래 전부터 진행돼 왔다. 분명히 87년 이후의 민주화는 더 많은 자유를 주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더 많은 분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나 선택의 자유를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중산층의 목소리는 격려를 받았을지 몰라도, 집과 일자리와 교육 기회를 달라는 하위계층의 그것은 철저히 무시됐다. 어느 쪽이 더 절박한 민주주의인가. 어느 쪽이 더 민주주의 그 자체를 도울 수 있는가. 어느 쪽이 진보정치가 붙들어야 하는 민주주의인가.

    민주노동당이 지난 17대 총선 때 거둔 ‘작은 성공’의 배경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내용은 고사하고 형식에서도 이 절박함을 시위하는 데 실패했다. 민주노동당이 쪼개진 이유는 ‘일심회’ 때문이 아니다. 먹을 게 생겼기 때문이다. 먹을 게 없었다면 언감생심 쪼갤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먹을 것은 누가 주었나. 정당명부제 판결을 내린 헌법재판소인가? 아니면 노동자와 농민, 서민인가. 먹으면 토해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지난 17대 국회에서 민주노동당은 무엇을 토해냈나.

    절박할수록 거친 법이다. 지난 17대 국회 때 민주노동당은 거칠었는가. 서로 깨물고 할퀴는 진보정치의 양대세력이 정작 원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얌전했다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30년 전 야당도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30년 후 그들보다 훨씬 더 심원하고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진보정치는 너무나 안일하고 평화로웠다. 조 교수는 진보정당 내의 감정 대립을 우려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밑바닥 대중의 감정이다.

    수많은 용산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빅딜

    정당은 선거에서 이겨야 한다. 이 점에서 조 교수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빅딜’을 촉구한 것은 그 자신의 표현처럼 애정의 발로일 것이다. 하지만 진보정치에 대한 애정은 궁극적으로는 소외받는 무산대중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진보정당들에게 뼈를 깎는 반성이 필요한 시점에서 그래도 우선 살아남아야 하지 않느냐며 생존을 위한 어쩌면 얄팍한 훈수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무산대중에게는 자신의 미래의 정치지도자를 벼리는 기회를 빼앗기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민주주의가 고작 이런 것이었는가.

    “진보정당의 ‘선거연대’를 촉구한다”, 뭐라고 꼬집기가 참 힘든 말이다. 그러나 진보정치를 필요로 하고, 진보정치가 필요로 하는 유권자에게 실망스러운 것은 분열이 아니다. 분열이 진보정치의 역할과 임무를 놓고 벌어졌던가? 이른바 ‘탈당파’들은 민주노동당이 급진적이지 않다며 뛰쳐나갔는가.

    지난 17대 국회 4년 동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용산’이 있었다. 결국 특공대가 쳐들어올 때 진보정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진보정치가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지 ‘빅딜’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거전략에 ‘크다’는 형용사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진보정치가 헤어날 수 없는 오만과 선민의식에 빠져 있다는 증거다.

    조 교수로서는 진보정치 돌아가는 꼴이 답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거연대’는 성찰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아래로 내려가야 할 사람한테 위로 올라가라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이번 재보궐선거는 지난 연말연초 민주노동당의 악법저지투쟁의 연장선상에 있고, 여기에 ‘빅딜’ 같은 정치공학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진보정치의 승리를 향한 길고 머나먼 여정에서 ‘후보단일화’는 매우 유용한 전술이다. 후보단일화는 민중의 지팡이를 하나 더 얻기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하자! 그것이 유권자가 궁금해 하는 일이고 그것이 내일의 민주주의다. 후보단일화는 국감스타를 한명 더 얻기 위한 것인가? 그렇다면 할 필요 없다. 그것은 유권자가 궁금해 하는 일도 아니고 이미 어제의 민주주의일 뿐이다.

    조국 교수의 글을 읽고 ‘87년 6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게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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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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