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연쇄 살인범을 만드는가?
By mywank
    2009년 01월 30일 08: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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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영화 포스터

‘요정이 앗아간 예쁜 아이 대신에 두고 가는 못 생긴 아이’라는 뜻의 제목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체인질링>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이를 찾는 엄마가 납치범과 맞서기 전에 먼저 세상 전체와 맞서야 하는 가혹한 상황을 그려낸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에게 자신을 믿어주는 일터가 있고, 그 일터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찾을 정도로 일을 잘 해내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자신과 아이의 삶이 위협받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는 당당한 증거니까.

그렇지만 모처럼 아이와 나들이도 하고 영화도 보며 함께 보내겠다고 약속한 날, 느닷없는 일터로부터의 부름은 내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서는 엄마 크리스틴의 발걸음은 무겁고, 예정보다 늦어진 근무 끝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막는 승진 소식도 마냥 기껍지 못하다.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아이

혼자 기다릴 아이가 걱정되고, 아이와 약속을 어긴 엄마가 되어 미안하다. 바삐 돌아간 집, 아이가 없다.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아이가 없으니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라진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수화기를 든 엄마에게 경찰이 하는 답변이 해괴하다. 아이가 실종된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경찰은 출동하지 않는단다. 대개 아이들은 곧 돌아오니 그런 실종은 별 거 아니라며, 오히려 호들갑을 떤다고 나무란다. 그러나 24시간이 지나고 또 다섯 달이 지나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고, 엄마는 애가 마른다.

그러던 참에 경찰이 찾아와 아이를 찾았노라고 으스대더니, 기자들을 잔뜩 불러놓은 기차역 플랫폼으로 크리스틴을 데려간다. 경찰이 ‘자, 당신 아이요’라고 내미는 아이를 본 크리스틴은 소스라친다. 그토록 애면글면 찾던 아들 월터가 결코 아닌데도, 경찰은 자꾸 그 아이가 당신 아이 맞다고 우겨댄다. 게다가 자기가 월터라고 주장하는 낯선 아이는 크리스틴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매달린다. 몰려든 기자들이 그 상황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진짜 자기 아이를 찾아달라고 애원하는 크리스틴에게 경찰은 젊은 엄마가 다섯 달이라는 시간 동안 변해버린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부러 아이를 부정하려 한다고 윽박지른다. 이런 황당한 상황은 단지 영화를 만들려고 꾸며낸 설정이 아니라 대공황 직전의 미국 L.A.에서 1928년에 실제 벌어진 일이다.

부정한 정치세력, 앞잡이 경찰

이 무렵의 L.A.는 파탄으로 치달아가는 경제 상황에다가 부정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정치 세력이 경찰을 앞세워 반대의 목소리를 처단하고, 부패 세력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도시였다. 이렇게 공권력이 자신들만을 위한 야합의 정치를 벌이는 도시에는 그늘이 질 수밖에. 그리고 도시의 그늘에서는 흉악한 범죄가 저질러질 수밖에.

크리스틴이 아들 월터를 찾으려면 경찰이 실수했다는 걸 밝혀야 한다. 그러나 경찰이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실수를 저지른 경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뿐 아니라 경찰력을 버팀목 삼던 정치권이 무너질 수도 있다. 이제 크리스틴은 사라져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들을 찾아달라고 매달렸던 경찰과 먼저 싸워야 한다. 그 쉽지 않은 싸움을 시작하려는 순간, 경찰은 크리스틴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가두어 버린다.

정신병원에서 크리스틴은 경찰에 맞서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약한 존재인 여성들이 어떻게 유린당하고 망가뜨려지는지, 강제적인 신체의 감금을 통해 권력이 어떻게 복종의 구조를 강요하는지, 자신이 계속 진실을 찾고 아들을 찾으려면 어떤 험한 일을 치러야할지를 보고, 겪게 된다.

순종을 강요당한 신체를 통해 복종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정신병원의 ‘규율’은 바로 권력의 특유한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현실의 모습이며, 권력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상을 객체화된 구조 속에서 옴짝달짝 못하게 하는 교묘한 감시와 처벌의 시스템이다.

   
  ▲ 영화의 한 장면

크리스틴이 갇힌 병원은 바로 감히 드러낼 수 없는 처벌의 권력이 객관성의 영역을 빙자해서 형벌을 공공연하게 치료법이라는 이름으로 강제하면서 은밀하게 거짓 진실을 조작하는 감옥 그 자체다. 다시 말해 권력이 저지르는 위법을 정당화하는 기관이다.

이런 현실에서는 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L.A.경찰이 공권력에 맞서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동안 도시 외곽에서 연쇄살인마가 아이들을 줄줄이 잡아다가 도끼로 찍어 죽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 아버지와 누나의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이 살인괴물 또한 사회로부터 소외된 존재다. 구원을 갈구하면서도 끝끝내 진실을 밝히지도 않고, 용서도 구하지 않는 연쇄살인마는 실종된 아이들, 살해된 아이들, 아이를 찾지 못해 애끓는 부모들 못지않게 무겁고 비참한 존재다.

가혹한 처벌로는 아이를 못 찾는다

감시와 처벌만으로는 이런 존재를 교정할 수도, 찾아낼 수도 없다. 그러므로 2년의 징역 기간을 거쳐 정확한 사형 날짜를 선고하는 판사의 준엄한 선고는 연쇄살인마에 대해 가장 가혹한 처벌로 응징한다는 분풀이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아들 월터를 찾고자하는 크리스틴의 절절한 마음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살인범 노스콧만 처형된 건 아니다. 끝내 용기를 잃지 않고 맞선 크리스틴이 심지가 되고, L.A. 시민들이 그 심지를 밝히는 초가 되어 부패한 경찰세력과 그 뒤에 숨어있던 시장을 몰아낸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도록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크리스틴이 정말로 찾는 것은 아들이면서, 진실이면서, 책임이다.

책임이 너무 무겁다며 월터가 태어나던 날 떠난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고, 아이를 찾기 위해 거짓과 맞서 싸우고, 끝끝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그저 모성의 표상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 안에서 주체적으로 살고자 할 때 지켜야 할 책임지는 주체의 표상이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시대의 L.A.에서처럼 2009년의 한국에서도 사회의 그늘에서 연쇄살인마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살인이 추억>이 배경으로 삼았던 80년대의 한국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는 목소리를 틀어막기 위해 독재정권이 날뛰는 동안, 화성에서 많은 여자들이 죽어갔지만 아직도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만도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이니,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이니 하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이번에 군포에서 여대생살해사건이 벌어졌다.

공권력은 어디 있어야 하는가?

이 나라 전체가 규율화되고 감시와 처벌이 일상화된 지 오래건만 이런 흉악한 범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국민을 폭도라고 규정하고 경찰이 물대포를 쏘아대는 동안 그 뒤에서는 어린이와 여성들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살해당하고 있다. 공권력이 철거민들을 한겨울 신새벽에 죽음의 불길 속으로 내모는 동안 끔찍한 범죄가 사회의 그늘에서 약한 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 감독을 맡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퍼펙트 월드>에서 <미스틱 리버>를 거쳐 <체인질링>에 이르기까지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개인의 범죄성향으로 돌리는 대신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체인질링> 앞 부분에서 크리스틴은 학교에서 친구와 치고받고 싸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월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싸움을 먼저 일으키지는 마. 대신 끝은 네가 내.’ 그리고 L.A.경찰과 맞서겠다고 결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싸움을 시작한 건 내가 아니지만 끝은 내가 내겠어.’

부당한 상황을 끝내고자 하는 이 한 마디는 법과 조직, 권력으로 무장한 공권력보다 스스로 맞서 싸우고자 하는 책임감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토록 강한 신념으로 정의를 믿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름을 <미스틱 리버>에 이어 <체인질링>의 엔딩 크레딧에서도 연출뿐 아니라 음악의 이름으로 만날 수 있는 것도 영화를 끝까지 지켜본 끝에 맛보는 작은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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