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세대론 <조선> 독우물에 빠지다
        2009년 01월 30일 08:4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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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만원 세대론이 결국 우물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것도 <조선일보>가 파놓은 ‘독우물’에. 오늘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최근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다. 글이 좀 긴 편이니 사태의 전말을 일단 한 줄로 요약하자.

       
      ▲ 필자

    ‘<조선일보>가 한껏 띄우고 있는 어떤 세대담론에 대해 『88만원 세대』의 우석훈이 <한겨레> 지면을 통해 격려와 지지를 보낸 사건’이다.

    88만원 세대론을 기묘하게 비틀다

    사실 극우언론이 진보담론을 멋대로 전유하고 이용하는 게 어제오늘은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가지고 미리 세팅해놓은 담론구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우석훈이 자진해서 발을 담갔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짚어두자. 나는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으로서 어떤 소유권을 행사하려는 건 아니다. 그 책을 읽은 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이 말을 소화하든 그것에 대해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순한 개인이 아닌 <조선일보>라는 언론매체에서 기획연재를 맡은 변희재가, 『88만원 세대』의 우석훈을 간접 동원해서 88만원 세대론을 기묘한 방향으로 비틀어놓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웃고 넘어갈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이런 글을 써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특히 한동안 함께 작업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지식인인 우석훈에게 이런 식으로 문제 제기하는 것이 영 불편하고 어색하다. 공저자 두 명의 시답지 않은 갈등으로 비칠까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이쯤에서 ‘전선’을 좀 명확히 그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무엇보다 나는 88만원 세대라는 개념이 아직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역할을 조금 더 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글은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일말의 진보적 의미를 읽어냈을 많은 독자들에 대한 작은 ‘애프터 서비스’다.

    변희재의 ‘노이즈 마케팅’

    ‘실크로드 CEO포럼 회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는 변희재는 <조선일보>에 ‘실크세대를 찾아라’라는 기획연재를 진행중이다. 변희재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을테니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TV 탤런트 분석서 <스타비평>이 데뷔작이며 2000년대 초반 ‘안티조선’ 논객으로 활동하다 2000년대 중반부터 ‘안티포털 운동가’로, 요즘엔 <조선일보> 논객으로 활약중인 인사다. 최근작으로는 <코리아 실크세대 혁명서>가 있다.

    그가 <조선일보>와 함께 최근 열심히 밀고 있는 담론이 소위 ‘실크세대론’인 것 같다. 자신이 소개한 글에 따르면 ‘실크세대’란 "70년대 이하 생들로 386세대들과 달리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어나가는 대한민국의 젊은세대를 말한다"고 한다.(아래 링크 참고)

    낡은 386은 가라 20-30대 실크세대가 간다
    실크세대론과 88만원 세대론의 소통을 위하여

    아무래도 실크로드 CEO포럼이란 단체에서 따온 말인 것 같다. ‘실크로드 CEO포럼’은 그럼 뭘까. "71년생 이하의 기업가들의 조직으로서 청년 창업의 붐을 조성하기 위해 2007년 6월 3일 출범하였다. 기업가들 이외에도 71년생 이하 대중문화 평론가, 시의원, 언론운동가 등등이 전문위원으로 참여하여 명실상부한 세대조직으로 성장하고 있다."

    사실 이걸 읽어봐도 뭐하는 단체인지 감이 오질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저기에 ‘건설업체 사장’만 끼어있으면 어디 지역토호 모임으로 손색이 없다는 점이겠다.

    변희재는 2008년에 나에게 몇번 연락을 시도했다. 『88만원 세대』가 출간된 게 2007년 8월이니, 책이 나왔을 때는 아무 말이 없다가 88만원 세대 담론이 시쳇말로 확 뜨고나자 연락을 취해왔다는 이야기다. 아마 우석훈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나는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나는 그즈음 변희재가 어떤 단체를 꾸려 모종의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별 반응이 없자 그는 이번엔 "88만원 세대론을 폐기처분해야한다"며 실크로드 CEO포럼 명의의 공개토론서를 어딘가에다 발표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그 글을 나도 읽어보긴 했다.

    개인적인 소감을 말하자면, 대꾸하기조차 민망한 글이었다. 요컨대 "88만원 세대는 386을 예찬하고 20대를 폄하하는 나쁜 용어이니 폐기하라. 그리고 비겁하게 숨지말고 우리와 같이 세대 명칭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 정도다.

    내 잠정적 대답은 "고생하시는데, 일단 책부터 끝까지 읽으셔야죠"였지만, 사실 그런 대답조차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변희재의 수법은 똑똑한 중학생도 알고 있는 그것, ‘노이즈 마케팅’이기 때문이다. 만약 변희재가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었다면 내 대답은 달랐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지난 수년간 곳곳에서 그 수법을 너무 많이 써먹는 바람에 소위 이 바닥의 알만한 사람들은 전혀 ‘낚이질’ 않게 됐다는 거다.

    ‘근성남’ 변희재, 우석훈을 낚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변희재가 하고싶은 말은 결국 "88만원 세대 대신 내가 만든 실크세대를 써야한다"는 소리가 전부다. 설령 토론을 한다해도 386에 대한 비난, 세대명칭에 대한 공방 밖에 나올 게 없다.

    실크세대라는 명칭을 홍보하기 위해, <조선일보>가 그토록 싫어하는 386세대를 비난하기 위해, 88만원 세대가 일방적으로 동원될 뿐이다. 그러면 책의 핵심이라 할 20대들이 처한 구조적 모순들에 대한 논의는 연기처럼 날아갈 게 분명하다. 그런 사태야말로 상상가능한 최악의 경우다.

    그런데 1월 14일자 <한겨레>에 실린 우석훈의 칼럼이 ‘최악의 경우’를 현실로 만든 것 같다. ‘20대 당사자 운동과 변희재의 실크세대‘라는 글이 그것이다.

    그동안 변희재는 박권일보다 훨씬 학식과 명망이 높은 우석훈을 집중공략 했을테고, 우석훈이 변희재의 근성과 열정에 감동을 했거나, 아니면 귀찮아서라도 한 마디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사실 이 글이 실크세대론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것이라 보긴 어렵다. 텍스트 자체의 밀도를 봐도 변희재의 활동에 대한 그저그런 수준의 ‘덕담’이라 보는 게 공정하리라. 하지만 이 심심하기 짝이 없는 글 하나가 가져올 효과는 작지 않다.

    88만원 세대론은 이제 조선일보의 실크세대 기획의 ‘부록’으로 움직이게 될 가능성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또한 이것이 우석훈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응이라 할지라도 변희재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마르고 닳도록 이 글을 써먹을 것이다.

    ’20대 진보 활동가’의 근황

    우석훈은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변희재와 그의 동료들이 ‘실크 세대’라는 이름으로 창업을 운동처럼 하는 것도 일종의 당사자 운동이다.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운동에는 좌파 버전이 있을 수 있고, 우파 버전이 있을 수 있고, 또 전혀 상관없는 중도 ‘소통 그룹’이 있을 수 있다. 창업 운동이 먼저 움직인 형국이고, 다른 운동은 이제 막 움을 틔우는 상황이라는 게 내가 이해하는 현 상황이다."

       
      ▲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그리고 확인해 본 상황은 우석훈의 판단처럼 한가롭지가 않다. 특히 우석훈이 관여한 20대 당사자 운동들은 변희재의 ‘그 단체’보다 먼저, 더 왕성하게, 더 20대답고, 더 진보적인 활동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악전고투, 아니 지리멸렬하고 있다.

    20대 당사자 운동단체인 ‘희망청’의 경우를 보자. 『88만원 세대』라는 책에서 힘을 얻어 뭔가 해보려했던 20대 활동가들이 "우리가 무슨 이벤트 대행업체냐"며 자괴감에 빠져있다가 최근 한 명만 빼고 전원 그만뒀다고 한다.

    ’20대 저자’ 데뷔 프로젝트 역시 참담하긴 마찬가지다. 내가 알기로 애초에 우석훈이 관여한 팀이 세 개였다. 그런데 정작 구성원들은 자기들 외에 다른 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되어 ‘설마 우리를 경쟁시키고 있었던 건가?’라는 의심까지 했다고 한다. 내가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두 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상 공중분해됐고, 나머지 한 팀이 출판사 담당 편집자의 개인적 열정과 지원에 힘입어 겨우 살아남은 상태다. 물론 책이 언제 나올지, 나올 수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로, 나 역시 이 팀에 ‘코가 꿰어’ 끝까지 함께 가야 하는 상태다.

    나는 이들 당사자 운동이 지리멸렬하는 것이 우석훈의 책임이라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지금 우석훈이 <조선일보>-변희재와 함께 ‘CEO 운운’할 때는 아니지 않은가, 묻고 있는 거다.

    88만원 세대론의 ‘약한 고리’

    위에 적은 것들이 이번 사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핵심이라 할 수는 없다. 심지어 88만원 세대가 실크 세대가 되든, 앙고라 세대가 되든 그것조차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근본적인 문제는 『88만원 세대』가 글자그대로의 ‘세대론’에 갇혀버리는 상황이다.

    처음 우리가 『88만원 세대』를 기획할 때 나는 20대, 구체적으로 20대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기자생활을 할 때 가장 열심히 썼던 기사들이 비정규직, 저학력, 여성노동자 문제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도 작용했다. "열악하고 위험한 지역일수록 봉사 점수가 높아 취업에 유리하다"며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는 어느 후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그 아득한 느낌, 내 안의 무언가가 송두리째 무너지던 기억이 그것이다.

    우석훈은 "20대보다는 10대에 희망을 걸어야한다"는 게 평소 지론이었고, 실제로 『88만원 세대』는 10대의 동거권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우석훈의 통찰이 20대 문제를 분석할 때도 날카롭게 발휘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공히 세대론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계급문제를 전면에 내세울 경우 책이 얼마나 팔리지 않을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떠올린 방책이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라는 다분히 계급적인 문제에 세대론의 ‘당의(糖衣)’를 입힌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우석훈은 우파들조차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하려면 ‘세대’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그의 영민한 지적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러나 그 작업이 말처럼 순조로울 리 없었다. 세대론에 집중하다보니 세대 내부의 양극화, 20대와 50대에서 쌍봉형으로 나타나는 불안정노동과 같은 주요 문제들이, 언급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쉽다. 그래도 새로운 형태의 계급모순들을 세대모순의 형태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힘이 센 세대, 이른바 386세대 비판은 필수적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변희재가 주장하는 ‘이게 다 386, 특히 진중권 때문이다’ 식의 억지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88만원 세대가 뚫어내야 하는 벽은 386세대 개개인이 아니라, 386세대가 싸우며 만들어냈지만 이제는 20대에게 굴레와 질곡이 되어버린 사회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88만원 세대론’은 단순히 세대끼리 싸움 붙이는 담론 외에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88만원 세대론이 진짜 ‘소통’해야하는 사람들

       
      

    <조선일보>는 괜히 1등 신문이 아니라서 『88만원 세대』가 출간되자마자 이 부분을 치고들어왔다. 2007년 8월 24일자에 실린 박해현 문화부 차장의 칼럼 ‘포스트 386의 봉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잠깐 그때로 돌아가보자.

    "현실 공간에서 386과 포스트 386은 경쟁사회의 원리에 따라 한판 승부를 벌일 때가 됐다. 정치·사회적으로 기득권 세력이 된 386세대가 포스트 386세대를 위해서 한 일이 없다는 비판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나온다. 386과 포스트 386의 투쟁은 정치적 이념적 차원에서 이른바 ‘진보 정권 10년’에 대한 판정을 대행한다." (강조는 필자)

    나는 이 칼럼 하나에 <조선일보>가 세대론에 집착하는 이유가 모두 들어가 있다고 단언한다. 이 칼럼의 대단한 점은 이후 무수히 쏟아지는 <중앙일보>와 <동아일보>의 세대론이 노리는 부분까지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변희재의 ‘실크세대론’ 같은 글을 ‘무려’ 기획연재물로 실어주는 건 <조선일보>가 젊은 필자 하나를 북돋아주고 싶어해서가 아니다. 20대 이하의 세대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구조적 모순에 눈감아 버린 채 오직 386세대만을 증오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우리가 처한 문제를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다.

    게다가 "능력과 전문성도 없는 386세대"와 "무한한 잠재력과 전문성을 가진 젊은 세대"로 구별짓기하는 변희재식 세대론은 세대론이 아니라 차라리 변형된 인종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저 발언을 보면서 나는, ‘능력도 없으면서 탐욕스러운 유태인’과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지만 유태인들 때문에 고난을 겪는 아리아인‘을 명확히 구별한 콧수염 달린 어떤 사내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프랑스철학의 거인 자크 랑시에르는 인간 능력의 차이를 과장하고 강조하는 담론들이 얼마나 무용하며 해로운 것인지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인류에게 절실한 것은 ‘만인의 역량’을 각기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 분류하고, 차별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세대의 능력은 동일하다. 다만 그 세대가 처한 환경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386세대의 성찰을 요구하고 그들이 88만원 세대의 손을 잡아줄 수 있으며 잡아주어야 한다고 했던 『88만원 세대』의 주장과, 386세대는 사회적 해악이며 투쟁의 대상일 뿐이라는 주장의 차이를 이해하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나는 우리가 정말 소통해야 하는 사람들은 <조선일보>나 변희재같은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통해야할 사람들은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전략)이날 모임에선 세대간 불평등의 심각성을 부각시킨 ’88만원 세대론’이 도마에 올랐다. "과도하게 부풀려진 담론"이란 의견이 많았다. 노동시장의 ‘인사이더’에 대한 보호장치가 두터워 청년 세대의 신규 진입이 쉽지 않은 유럽과 달리, "외환위기를 계기로 일자리 보호장치가 파괴된 한국의 경우엔 불평등이 모든 세대에 걸쳐 증가하고 있다"(김영미)는 이유에서다.

    "젊은층이 88만원 세대라면, 고령층은 50만원 세대"(박경숙)라는 지적과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우파 담론에 88만원 세대론이 이용당하고 있다"(한준)는 비판도 이어졌다. (후략)" (‘한국사회 불평등 핵심고리를 천착하라’-비판사회학회 불평등연구회 <한겨레> 2009.1.12) (강조는 필자)

    학자들 뿐만 아니다. 충남 서산에는 100% 비정규직 고용에, 법정최저임금‘만’ 주기로 악명이 자자한 동희오토라는 공장이 있다. 거기서 콘베이어벨트를 타고있는 노동자들 대다수가 20대, 즉 88만원 세대에 속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청년들이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중 한명으로서 내가 늘 부끄럽고 고민스러운 건, 이 책을 가장 열심히 읽는 20대가 이른바 명문대생이란 점이었다. 정작 88만원 세대에 한없이 가까운 20대들일수록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읽지 않는다.

    지난 일년 반 동안 나를 괴롭혀온 숙제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좀체 사라지지 않을 화두다. 자, 이 글의 결론을 내릴 때가 됐다. 한줄 요약이다. “<조선일보>와 변희재는, ‘소통’하기 전에 줄부터 서시라.”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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