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쟁 없이 양보 없다"
        2009년 01월 29일 01: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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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월 7일 금속노조 중앙위원회는 <노동자-서민 살리기 금속노동자 투쟁본부>(이하 ‘투쟁본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회의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금속노동자 투쟁본부 구성을 확정하고 세부계획(안)은 차기 중앙위원회에서 확정키로 함. 단, 1단계 투쟁계획 중 <금속노조 사회선언 기자회견>은 1/8(목) 09시30분 중앙집행위원회 성원을 소집하여 기자회견문내용 검토 및 확정 후 실시키로 함.”

       
      ▲ 금속노조 기자회견 장면(사진=손기영 기자)

    이날 중앙위원회에서는 투쟁본부(안) 심의를 시작하자마자 정갑득 위원장이 다음날(1월 8일) 기자회견을 할 것이라는 소문에 대한 사실 확인부터 많은 논란을 벌였다. 부위원장 한 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중앙위원들이 기자회견 자체를 반대했고, 예정된 기자회견문의 내용을 요구하였다. 정 위원장은 기자회견문이 따로 준비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중앙위원들은 그럴 리가 있느냐며 따졌다.

    중앙위원 모두가 반대한 금속노조 기자회견

    투쟁본부 구성안에 들어가서도 5대 요구(1.국민기본생활 보장 2.모든해고금지, 총고용보장 3.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나누기 4.재벌기업,투기자본 잉여금 사회환원 5.제조업·중소기업 기반강화) 중에서 특히 3번인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에 관해 열띤 논쟁이 붙었다. 논쟁이라고는 하지만 의견이 중앙위원들 간에 비등하게 갈린 게 아니고 사실상 위원장과 전체 중앙위원들이 대립해 토론을 벌였다고 보아도 될 정도였다.

    1월 8일 새벽 3시까지 이어진 장시간의 토론 결과는 크게 3번 요구안을 빼자는 것이었지만 결국 중집위에서 최종 확정된 기자회견문에는 3번 요구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만들기’로 몇 글자만 바뀌어 결정되었다.

    중앙위원회를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 온 나는 기자회견 내용을 보고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밤새도록 중앙위원들이 주장한 취지가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이지만 솔직히 일자리나누기에 관한 지도부의 생각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불신이 더 강하게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임금이 전무한 한국에서 유럽모델 베끼기

    나 역시 중앙위원회에서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주장을 했다. 내가 주장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위원장이 제안한 ‘일자리 나누기’는 독일의 폭스바겐 사례를 근거로 하는 것 같은데 독일과 우리나라의 경제사회적인 조건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노동시간단축을 통해 임금 삭감이 이루어질 경우 노동자들이 받게 될 생계의 충격 정도도 다르다.

    독일이나 북유럽 복지국가의 경우 임금 구조에서 소위 사회보장제도 등으로 인한 ‘사회적 임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으로부터 받는 직접 임금이 약간 줄어들더라도 전체 생계비용(사회적 임금을 포함한)에서의 비중이 우리나라의 경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충분히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노동자들이 기업으로부터 받는 직접임금으로 교육비, 주거비, 의료비 등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단축과 임금을 연계하여 삭감할 경우 그 충격이 상당히 크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임금을 보전하기 위한 방안이 전제되어야 한다.

    공감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일자리나누기

    이에 대해 금속노조 내부의 논의가 좀 더 충분히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도 함께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부분 중앙위원들의 의견은 묵살된 느낌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금속노조의 조직 현실이다. 아직은 금속노조 투쟁본부의 계획에 일자리 나누기(만들기)는 안개 속에 가려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최근 금속노조 중앙에서는 임금삭감을 감수하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다시 거론되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경제위기와 고용문제에 대한 생각을 더욱 깊이 하고 있지만 금속노조 내부의 논의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는 것 같다.

    조직의 힘은 가장 먼저 ‘공감대 형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중앙위원회의 회의도 그렇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투쟁방침(안)’ 논의도 너무나 형식적이고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쌈박한 정책’으로 위기상황 극복?

    이러한 현재의 상황에서 일자리나누기와 경제위기 극복에 관한 몇 가지 주장을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가장 중요한 점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금속노조의 역할은 ‘쌈박한’ 정책적 제안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의 사례를 많이 들고 있지만 오히려 그들 노사관계의 제도적 측면과 그 역사적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중요한 정책과 교섭 의제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조합의 강력한 사회적 위상이 전제되어야 한다.

       
      ▲ 독일의 금속노조

    그런데 이러한 노동조합의 높은 위상은 멋진 정책을 제안하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강력하고 폭발적인 투쟁으로 인해서 사회적으로, 또는 자본의 엄청난 비용손실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사회적인 양보 또는 자본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는 자본의 본성은 노동자들의 양보조차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뿐이기 때문에 일정한 양보보다 더 큰 위기를 느끼도록 투쟁하지 않고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노동자의 양보조차도 힘이 없으면 받아지지 않는다. 설령 노동시간 단축이 노사, 또는 노정간에 중요한 의제가 된다 해도 미리부터 ‘임금 삭감’을 전제로 하는 제안은 어리석은 결과만을 가져올 것이다.

    짧은 20여년의 투쟁 경험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노동조합이 당면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내부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한 조직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 투쟁력은 무엇보다 조직원의 요구에 기초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만들어지고 또 지속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일자리 나누기’라는 요구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조직력과 투쟁력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는 관점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조직된 노동자 뿐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들을 어떻게 투쟁에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직 투쟁의 관점은 뒷전이고 대 사회적 제안을 어떻게 할 것인지만 고민하는 모습은 실력은 없으면서 겉멋만 내려는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야만적인 자본주의 철폐의 기회

    만약 금속노조의 ‘일자리 나누기’가 임금 삭감을 전제로 할 경우 현재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나는 경제학자도 경제전문가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리’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주장한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무성하지만 답이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을 건드리지 않고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처방은 자본주의 자체에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것이다. 금속노조도 가장 먼저 이 부분에 대한 주장을 강하고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투쟁본부 5대 요구 이전에 현재의 경제공황 상황의 원인과 책임을 강하게 주장하고 전 사회적인 공감대를 확고하게 다져 나가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와 민중들을 위한 정책이 힘을 얻게 된다. 자본과 무책임한 정부의 잘못이 너무나도 분명한데도 이를 강하게 문책하지 않은 결과가 지금 어떻게 나오고 있는가?

    금속노조의 ‘순진한’ 일자리 나누기는 ‘임금삭감을 전제로 하는’ 애초의 예상과 다르게 나오자 보수 언론들이 외면하고 ‘별 볼일 없는’ 이기주의로 치부하고 말았다.

    작년 하반기 경제위기가 터졌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야만적인 자본의 책임을 강하게 질타하고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투쟁을 통해서 자본과 정권을 압박하고 그들이 먼저 노동자 서민을 위한 대안을 내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87년 6월 항쟁에서 민중의 저항이 멈추지 않는 기세로 나가자 결국 6.29 선언이 나오지 않았던가?(그 내용이 부족했던 점은 논외로 하자) 따라서 지금 부족한 것은 정책적 대안이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조직하고 금속노조가 투쟁에 앞장서는 것이다.

       
     

    경제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투쟁의 기회도 이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금속노조가 진정으로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선도적 조직으로서 자기 사명을 다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이에 대한 준비를 하는데도 모자랄 판에 ‘임금 삭감’ 여부에 목매고 논쟁을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경제위기 극복 위해 일자리 나누고 임금 보존해야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덧붙이고 싶다. 첫째,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만큼 임금을 삭감하고 그 만큼 남는 임금으로 일자리를 만들자는 것은 자본에게는 아무런 손해도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는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자본에게도 아무런 실익이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을 치유하는 것이 장기적인 과제이기 때문에 우선 단기적인 경제위기 극복 처방으로 하더라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 속사정은 이렇다. 경제위기란 한마디로 ‘돈 경맥’, 즉 돈이 안도는 것인데 돈이 안돌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돈을 풀어야 한다. 그런데 은행이나 기업에 돈을 푸는 것은 돈을 돌리는 데 쓰이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풀은 돈 마저도 묶어 두게 된다.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돈이 돌려면 돌을 쓸 사람에게 돈을 풀어야 한다. 가진 자들은 지금 쓰고 있는 이상으로 쓰지 않는다. 노동자 민중들은 돈이 없어 쓰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 민중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 그 중 한 방편이 노동자의 총임금을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단축 만큼 임금을 줄이고 줄인 임금만큼 일자리를 늘리면 총임금은 그대로가 된다. 노동자(소비자)의 주머니가 그대로인데 돈이 더 잘 돌 리가 없다. 경제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장기화될 뿐이다. 해답은 노동시간 줄여서 일자리 늘리고 늘어난 일자리에도 같은 임금이 지급되어야 총임금이 늘고 이것이 바로 소비로 직결되는 구매력을 높이면 경제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독일의 교훈 “투쟁 없이 자본의 양보 없다”

    둘째, 5대 요구안과 중앙교섭 요구안의 세부 내용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투쟁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국민기본생활 보장을 위해 최저생계비 기준을 평균가구소득의 50%로 올리고 지원대상도 확대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다. 진보신당에서는 이와 비슷한 민생구조개혁방안을 제안하고 있는데 200조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 비정규직과 협력업체를 지원하는 특별기금 조성을 위해 기업 잉여금의 사회 환원을 요구하는데 10%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원은 그냥 순순히 내 놓을 자본가들이 있을까? 제안 취지는 좋지만 투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노동자의 경영참여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노사공동결정제도’ 역시 독일의 사례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독일에서 이 제도가 생기게 된 배경에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고조되는 상황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이고 더구나 이러한 투쟁은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기운이 강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그럴듯한’ 의제를 던지는 것에 앞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바로 학습하고 조직하고 투쟁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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