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조가 정치세력화에 몸댄 적 없다
        2009년 01월 28일 12:45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1. 들어가는 말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은 천상의 잔치에 내놓은, 영생한다는 하늘의 복숭아를 훔쳐먹고 깽판을 치다가 그 죄를 물으려는 부처님을 만나 내기를 하게 된다. 내기의 내용은 손오공이 세상의 끝까지 다녀오면 깽판 친 죄를 면해주는 거였다.

    까짓 거 하며 손오공은 근두운을 타고 쌩쌩 날아가 세상의 끝처럼 보이는 5개로 이루어진 봉우리에 자신의 이름을 써놓고 관세음보살에게 돌아온다. 돌아와 의기양양하게 관세음보살에게 세상의 끝에 다녀왔다며 큰 소리친다.

    이에 빙긋이 웃으며 부처님이 손을 내미는데, 가운데 손가락에 손오공 자신의 필체가 선명한 ‘손오공’의 이름이 써 있는 게 아닌가? 손오공은 열심히 날아갔다 왔지만 그것은 부처님의 손바닥이었다.

    97년 대선 이래 10여 년 간 민주노동당을 통해 이루려던 노동자정치세력화 사업은 2004년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키고 지지율이 20%를 넘으면서 정점에 다다른 이후 지속적인 내리막길을 걷다가, 07년 대선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이 분열됨으로써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험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노동자정치세력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10여 년의 민주노동당운동과정에서 선거 때만 되면 조합원들은 돈대고 몸 대주는 동원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합법선거에 의해서 집권을 지향하는 만큼 정치세력화의 상징적 징표는 국회의원을 적어도 교섭단체 수준만큼은 확보할 수 있어야 하고, 국회의원선거에 세력을 형성하여 도전할 수 있어야 했다.

    2000년 총선에서부터 3번의 선거를 치루는 동안 연맹, 지역본부, 총연맹 임원들 당시의 노조운동의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것은 연인원 9명에 불과했다. 사실상 세력화를 했다기보다는 가능성이 있는지 시험출마를 해봤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07년 대선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이 분열되고 이후 진보운동의 재편이 진행되고 있다. 진보신당이 재창당과정에 있고, 사회주의노동자정당준비위원회가 만들어져 활동하고 있으며, 사회당이 분화과정에 있다. 또 민주노동당에서 탈퇴했던 노동자들 중에는 노동자정당건설전국추진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흐름들이 과거의 실패를 딛고 집권에 다가가는 정당이 될 수 있을까? 분열사태에까지 이른 현재의 진보정당운동에 대하여 조합원대중은 여전히 무관심한 채 정당건설논의는 활동가들만의 논의에 머무르고 있다.

    실패의 근본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올바른 전략은 나올 수가 없다. 결과가 잘못됐지만 필요한 길이므로 다시 한 번 노력해보자는 식으로는 설득해서는 조합원들의 지지를 조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조합원들보다도 현장간부들부터 설득하기 힘들 것이다. 97년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시도할 때는 총파업의 열기와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무조건적 열정이 있었다. 지금은 10년 운동의 학습효과를 경험했기 때문에 모두들 전망이 무엇인지를 요구하고 있다.

    전략 없는 진보정당운동,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향후 10년 다시 실패의 쓰라림을 겪지 않으려면, 아니 진보정치를 문닫을 게 아니라면 실패의 근본원인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이미 조합원들의 입장에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분열된 진보정당운동의 구도는 민주노동당 시절보다도 더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현재의 문제를 극복할 전략이 없는 한 그렇다는 것이다.

    전략 없음, 기업별체제와 소선거구제에 안주

    근본원인부터 찾아보아야 한다. 왜 노동운동의 지도부들은 눈치만 보고, 조합원들을 선거 때 돈대주는 상태로 전락하게 하고 말았을까? 김대중 노무현 등 자유주의 세력이 정책실패로 물러간 뒤에 왜 진보진영이 진출하지 못하고 더 왜소한 결과로 나타났을까?

    필자는 노동조합의 기업별체제와 국회의원소선거구제가 노동자정치세력화를 가로 막는 아주 중요한 요인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한국자본주의의 87년 체제, 즉 국가적 체제적 차원의 의제는 배제하게 하고, 동네의 작은 의제에만 일상적 정치활동을 묶어두는 국회의원소선거구제와 기업단위의 임금과 근로조건에만 관심을 갖게 하는 기업별노조체제가 87년 체제의 핵심이다.

    기업별체제와 국회의원소선거구제를 기축으로 한 87년 체제는 진보정치세력을 배제한다. 노동자정치세력화 실패의 근본원인은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추진을 자임한 진보정치세력이 87년 체제를 뛰어넘을 주체형성과 이행에 대한 전략을 갖지 못한 채 기업별체제와 소선거구제라는 제도의 형식적 틀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87년 체제는 부처님의 손바닥이고, 그 체제에 매몰된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운동은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손오공 같은 존재였다.

    97년 대선 이래 10년 가까이 민주노총서울본부에서 정치사업을 담당한 필자 역시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책임을 통감하면서 고민을 같이 나누어 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글은 짧지만 한국사회의 총체적 맥락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실패요인과 대안의 방향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이 글의 기본논지는 2002년 필자의 고대노동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인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제약요인에 관한 연구’에서 확인한 것이며, 당시의 구조가 전혀 변화하지 않은 채 역사만 흘렀기 때문에 이후 진행된 역사를 반영하여 논지를 재확인한다.

    2.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개념

    자본주의 계급관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진보진영의 변혁전략은 국가권력의 장악과 재편이라는 1단계를 거쳐, 그 권력을 수단으로 체제의 변혁을 추구하는 과정의 2단계라 할 수 있다.

    또한 집권의 방식은 87년 민주화투쟁의 성과로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함으로써 선거를 통한 방식이 제도화되었다. 합법진보정당운동의 기조 하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시도된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97년 대선에 후보를 내면서부터 실질적으로 시작되어 99년 민주노동당 창준위를 설립하여 노동자정치세력화는 10년이 넘는 역사를 갖게 되었다.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좁은 의미로는 노동조합 및 노동자운동의 힘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정도를 넘어서 집권과 변혁을 지향하는 진보정당에서 강력한 세력의 일부가 되겠다는 뜻이다.

    넓은 의미의 정치세력화는 노동운동의 이해를 대변할 진보정당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책적 요구를 실현해나가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전자의 입장에서 실패의 요인을 진단한다.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집권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노동운동출신의 지도집단과 그만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가져야 한다.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적 조직 이외에 대중과 당 사이를 매개하는 활동가그룹(정파든, 써클이든)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3.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실패의 요인

    가. 전국전선의 형성 실패

    실패의 핵심요인은 기업별체제를 뛰어넘을 운동진영의 전략부재다. 앞에서 확인한대로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조직률은 전체노동자의 5% 정도에 불과해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성공하려면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중소영세사업장 및 비정규노동자의 지지와 영세자영업자 등 광범한 민중들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생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투쟁을 조직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별체제를 완강히 고수하려는 자본의 전략에 포섭되어 그러한 실천을 조직할 수 없었다.

    급진의제를 내용으로 전국전선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금과 관련된 사회연대전략이나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 주택문제 등, 전국적 전선을 형성할 만한 사안들은 선거 때 반짝했을 뿐이고 노동조합의 핵심의제로서 전국적 대중투쟁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추진세력의 근성의 부족, 추동력의 부족이었다. 또 이를 비판하는 한편의 운동진영은 이러한 민중의 기본적 생존권 의제를 개량주의, 실패한 사민주의 의제, 생산현장이 아닌 소비영역의 투쟁, 소유권을 건드리지 않고 비용의 문제로만 접근했다는 등의 비판을 제기하고는 정작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아 투쟁전선을 무력화시켰을 뿐이다.

    나. 기업별체제의 안주

    급진의제를 중심으로 한 전국전선의 형성이라는 실천주체가 형성되지 않은 조건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제도가 보장한 당면한 투쟁인 조직화된 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기업수준에서의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에 머물렀다.

    임금에서 뿐만 아니라, 교육비와 주거비 등 사내복지를 확대하려는 대기업노조의 활동은 중소영세사업장의 노동자 및 비정규직 노동자와의 격차를 훨씬 확대하도록 방치했고, 노동조합운동으로 묶인 노동자들조차도 하나의 계급으로서 단결할 수 없었고, 노동자 전체를 대표하는 계급대표성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민주노총 차원의 투쟁은 권력과 자본의 파상적이고 분할적인 공세에 수세적이고 방어적으로 사업장 지원투쟁에 급급할 뿐이었다. 기업별체제가 고수된 20년 동안 기업간 실질임금격차가 너무나 커져 그를 극복하겠다고 산별노조를 만들었지만 산별교섭에 자본 측이 응하지도 않을 뿐더러 노동조합의 요구의 핵심 중의 핵심인 임금에서 공동의제를 내놓을 수 없는 조건에 이르게 되었다.

    노동운동의 투쟁의제가 대중의 보편적 요구를 실현하지 못한 조건, 즉 전략의 부재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는 이미 근본한계를 안고 있었다.

    더구나 치명적이었던 것은 노사정위원회 참여 문제를 놓고 대의원대회에서 벌어진 폭력사태와 총연맹 임원 및 대기업노조에서의 금품수수 비리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이미를 실추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이후 지지율은 한 자리수에서 좀처럼 올라가지 못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복수노조의 금지해제와 전임자임금지급금지는 노조운동의 존립기반자체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다. 노동조합의 기반을 무력화시키는 소선거구제 장벽

    87년 대투쟁 직후 민주화과정에서 진보진영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시 제도를 설계했던 보수정치인들이 권력교체를 명분으로 동반 당선제인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꾼 것이었다. 당시 전면비례제에 대한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남북관계의 특수성상 정당난립을 가져올 비례제는 곤란하다며 소선거구제가 채택되었다.

    1) 유력한 두 개의 정당에만 유리한 소선거구제의 원리

    소선거구제는 1인만을 뽑기 때문에 유력한 두 개의 대정당 사이에서 경쟁을 하게 되어 있다. 기이하게도 한국은 지역주의와 결합하여 호남과 영남에서는 지역주의 정당이 싹쓸이 하고, 이 정당들이 특정지역의 싹쓸이를 기반으로 유력한 정당의 반열에 오르고 전국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수도권 1, 2위를 다투게 된다.

    형성과정에 있는 진보정당의 입장에서는 유력한 경쟁에서 배제되고 지지표는 사표가 된다.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는 대통령선거처럼 소위 비판적 지지의 함정에서 유권자를 헤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제도원리가 갖는 이러한 문제로 인해 진보정당은 지지율보다 못한 의석을 챙기게 되고 제1당과 제2당은 지지율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강탈해 간다. 87년 이후 소선거구제 국회의원선거에서 1당은 30여 석, 2당은 10석 정도의 득을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정당지지율 13%를 획득하고도 지지율대로라면 39석이어야할 의석이 10석에 머무른다. 이상한 것은 이렇게 30여 석을 강탈당하고도 투쟁하지 않으려는 진보운동권의 태도이다.

       
      ▲ [노동자대안사회학습원 엄관용의 ‘한국정치체제’에서 인용]

    2) 노동조합역량을 무력화시키는 소선거구제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관점에서 소선거구제가 갖는 더 결정적인 문제는 수도권과 광역대도시의 경우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직장은 거주지와는 멀리 떨어진 시내 중심(종로․중구, 강남․서초, 여의도)에 있는 반면 투표는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이나 수도권 등 도시 변두리 거주지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직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동조합의 단결력이 무력해진다.

    노동자들이 연장근로를 밥 먹듯이 하는 조건에서 일상적 정치활동에 조합원이든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든 참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조합원이 정치활동을 위해 선거구에서의 문제에 관심 갖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런 조건에서 연맹 임원급 이상 그나마 노조운동에서 검증됐다는 지도자들이 정치세력화를 위해 지역구활동을 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같이 선거운동해줄 조합원이 없고, 활동자금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시간 내어 조직사업을 하려 해도 노조를 위해 상근하라고 한 것이지 정치하라고 상근에 동의해 준 게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대의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정치활동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정치세력화를 주도할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은 노조운동에서 선거를 여러 번 치루어 봤기 때문에 판세 읽기에 탁월하다. 해당 선거구에서 조직활동도 하지 않았고, 당선가능성이 없는데 정당명부비례후보를 위해 득표율 올리려거나 장기적인 지구당 조직사업을 위해 출마한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래서 울산과 창원을 빼고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구심을 형성할 수 없게 된다.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위한 활동이라는 게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국회의원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노동자들은 면피용으로 마지못해 돈 대주고 투표를 조직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3) 의제를 동네개발로 묶어 놓은 소선거구제

    기업별 체제가 요구를 사업장 안으로 국한시키듯이, 소선거구제 역시 선거운동의 내용을 선거구 차원의 요구로 국한시킨다. 지역주민의 피부에 와 닿는 공약을 내놓는다고 국가적이고 체제적 차원의 의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뉴타운 공약에서 보았듯이 선거구의 지역개발론에 머무르거나, 방과 후 학교, 급식 등등의 기초의원이 내놓을 만한 공약을 가지고 선거운동을 한다.

    이는 소선거구제하에서의 선거운동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업주부이거나 동네의 자영업자들이기 때문에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 때문이다.

    내용의 부재는 후보들이 이미지 정치에 빠지게 한다. 화려한 언사나 이벤트성 행사로 언론에 노출되는 빈도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2편에 계속>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