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상계동과 이명박 용산
        2009년 01월 25일 09: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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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니 한 평에 1억 원이 넘는 땅에서도 살아보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거기서 아이는 방긋방긋 웃고 아장아장 돌아다니며 잘 놀기도 하지만, 어른들은 그곳을 떠날 수 있는 날을 간절히 바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는 ‘집’이 아니었으니까. 88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외국인들이 와서 보기에 그럴듯한 서울을 만들겠다고 재개발 바람이 몰아치던 시절, 살던 곳에서 내몰린 상계동 사람들이 집을 잃고 명동 한가운데 세운 천막이었으니까.

    땅 한평 1억, 명동의 상계동 사람들

    ‘집’이란 무엇일까? 머물러 살기 위해 지은 건물, 벽과 지붕이 있어 추위며 더위, 비바람을 막아 주는 구조물,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보금자리.

       
      ▲기록영화 <상계동올림픽>의 한 장면. 

    <상계동 올림픽>은 집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벽이며 지붕이 있는 그럴듯한 꼴의 집은커녕, 얼추 나무기둥 세우고 천막 씌워 머물 자리 하나 찾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모습에 대한 기록영화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서울은 도시 미관을 위해, 그러니까 한국을 보러 올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이 나라가 번듯해 보이도록 하기 위해 목동이나 상계동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허름한 환경에서 살던 곳들을 아파트 단지로 바꾸어 버리고자했다.

    도시 미관이라는 명분 뒤에는 엄청난 규모의 부동산 개발로 거두어들일 어마어마한 규모의 개발 이익에 대한 계산도 있었고, 광주의 피를 제물 삼아 거머쥔 정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비난을 올림픽이라는 세계적 규모의 이벤트로 잠재워보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다.

    사람을 두루 살리도록 하려는 것이 정치인데, 군홧발로 차지한 독재정치를 살려보겠다고 사람을 희생시키는 개발논리 앞에서 많은 무려 70여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철거 용역 깡패를 앞세운 공권력에 밀려 삶의 터전을 떠나야했고, 상계동 173번지의 80여 세대도 그렇게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고교생의 피울음은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계동 사람들고 만나게 된 김동원 감독은 1985년 8월에 시작해 88년 2윌 까지 무려 3년에 걸쳐 상계동 사람들의 고난을 함께 하면서 <상계동 올림픽>을 만들었다.

    상계동 판잣집에서 내몰린 사람들은 명동 성당에 천막을 치고 서로 의지하고 부대끼며 추운 겨울을 버텨내면서 겨우겨우 부천 도로 옆 자투리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바로 옆에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휑한 찻길가지만 그래도 살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으로 나무기둥을 세우고 바닥을 다져 천막촌을 만들면서 모처럼 웃음을 짓던 것도 잠시. 그 길이 올림픽 성화가 지나갈 자리에 있다는 이유로 다시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상계동 사람들을 위해 아이들이 모아준 돼지저금통, 칠순 노부부가 결혼반지를 기꺼이 빼서 보탠 돈, 자신들이 살 곳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기 위해 흘린 땀으로 모양을 갖춰가던 천막촌에 깃든 정성과 희망은 1월의 매서운 바람보다 더 싸늘한 개발논리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아들 앞에서 어머니를, 어머니 앞에서 아들을 짓밟고 희망을 담아 세운 기둥들을 부숴버렸다. 고등학생 아들은 가슴을 쥐어뜯고, 땅바닥에서 몸부림치며 "억울해, 억울해."라며 울부짖지만 그 피울음은 세상에 전해지지 못하고 그들만의 공동체 속에서 잦아든다.

       
      ▲<상계동올림픽>의 한 장면. 

    그날은 바로 며칠 전 사당동에서 철거 용역의 철퇴로 무너진 담장에 깔려 죽은 어린 소년의 장례식 날이었다.

    성남으로 가라거니, 알량한 보상금 몇 푼으로 어딘가 다른 살 곳을 찾아 떠나라느니 정치권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상계동 사람들은 땅굴을 파고 추위를 가리며 살아야했다.

    땅굴 위에 비닐치고 열 달을 버티는 동안 그 옆으로 올림픽 성화가 지나가고,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들은 아파트 공화국을 만들어 나라 안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나라 밖 사람들의 따가운 눈길을 피했다.

    기본적 인권인 주거권의 유린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그날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람다움을 지키려던 <상계동 올림픽>을 치러낸 지도 21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가난한 마음으로도 살 수 있는 그날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사람이 살자면 가장 필요한 것이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살 곳이다. 잘 살고 못 살고를 가르기 전에 이 세 가지는 기본 중의 기본이고, 그래서 이 셋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한다.

    그래서 주거권은 세계인권선언,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 규약, 세계 주거 회의와 같은 국제적 합의를 통해 기본적 인권으로 선언되었다. 88올림픽 이후 세계화를 지상 과제로 여기는 한국도 이미 지난 1990년 정식으로 국회 비준을 거쳐 사회권 규약에 대해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인정했다.

    한국인이 사무총장으로 있는 가장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인 UN의 사회권 규약 위원회에서는 ‘불가피하게 철거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진솔한 협상의 기회 제공, 사전 고지, 예정된 철거에 대한 정보의 공개, 철거 시 공무원이나 그들의 대표자 입회, 철거수행 인원의 신원 확인, 야간 또는 악천후 등 하에서의 철거 금지, 합법적 보상책 제공, 법적 지원 제공이라는 사전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강제 철거를 일삼아온 이 나라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한낱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1997년 7월 25일, 전농동에서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싸우던 철거민이 18m 철탑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철거반원들이 포크레인을 앞세워 주민들이 있는 철탑 쪽으로 접근하자 이를 막으려던 주민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지만 최루탄을 쏘아대며 밀어붙이는 물리력 앞에서 철탑이 무너지고 인화 물질에 불이 붙자 불길을 피하려던 사람들이 5층 철탑에서 뛰어내렸고, 그 중 한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상계동 올림픽, 그 후 

    그리고 2009년 1월 20일, 한강로 변 건물 옥상에 망루를 쌓고 제대로 된 이주대책을 요구하던 용산4구역 철거민들이 25시간에 걸친 살인진압 과정에서 망루 꼭대기에 몰려 결국은 불에 타 숨졌다. 아래에서는 철거 용역들이 폐타이어에 불을 붙여 숨이 막히도록 연기를 피워대고, 위에서는 경찰특공대가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내려왔다.

    망루 꼭대기로 몰린 철거민들이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와중에 인화물질에 불이 붙어 타오르면서 철거민 넷이 그 자리에서 죽었고, 살인 진압을 피해 망루 꼭대기에서 뛰어 내린 한사람도 끝내 숨졌다. 진압에 동원된 경찰도 한사람 목숨을 잃었다. 2006년 5월부터 시작된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이렇게 불길 속에 재가 되었다.

    김동원 감독은 지난 해, <상계동 올림픽, 그 후>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계동 올림픽>의 뒷이야기를 따라가기에는 아직도 너무 많은 상계동과 너무 많은 올림픽이 계속되고 있다.

    27분짜리 다큐멘터리 한 편이 2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도 옛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나라에서 개발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사람다운 삶을 짓밟다 못해 생목숨을 앗아가면서까지 밀어붙여야할 개발이라면 더 이상 그것은 개발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부자로 살게 해주겠다며 ‘경제 대통령’이 집권하는 부유한 정권 아래서 아무리 애써도 부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계동 올림픽>의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만이라도 지켜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소박한 바람조차 이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재가 되어 버렸다. <상계동 올림픽>이 한국 다큐멘터리의 고전이 되어 과거의 한 자락을 증언하는 기록영상으로 남지 못하고, 여전히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에 대한 생생한 거울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수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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