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로화, 네덜란드 땜에 죽다 살아나다
    [유럽통신] 자유주의+생태주의+기독교 정당 ‘구국의 결단’
        2012년 05월 07일 11: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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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호에 저는 네덜란드 우파 연정이 새해 예산안 편성 시 재정적자가 GDP의 3%를 넘지 않도록 정부 지출을 대폭 축소하는 예산안에 합의하지 못하여 붕괴되었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단 5일 만에 예산안이 의회에서 합의되는 극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졌습니다.

    네덜란드 긴축 예산 극적 합의

    말 만들기 좋아하는 신문들은 역사적 합의라는 말을 붙이고 있는데, 이 드라마는 연정에서 발을 뺀 유럽연합의 문제아 ‘히어트 빌더스’의 자유당 대신 민주주의66과 녹색좌파당, 기독연합당이 1박2일 벼락치기로 집권 자민련, 기독민주당에 자신들의 긴축안을 들여 밀어 상당부분 관철시킨 것이지요. 집권연정이 7주 동안 못 만든 예산안을 이틀 만에 만들어 낸 것은 자신들 말대로 노동과 주택, 의료분야에 엄청난 변화를 통해 이뤄낸 ‘대개혁’이라고 할 만 합니다.

    네덜란드는 지역구 없는 100% 정당명부제이고 전체 의석은 150석입니다. 참고로 네덜란드 정당의 의석수에 대해서 알려드립니다.

    연정참여 제1당 자민련은 31석, 기독민주당은 21석, 연정 후견파트너인 자유당은 24석(세 당 합치면 76석, 총의석 150석의 과반수 턱걸이), 야당에서는 제1야당 노동당은 30석, 사회당은 15석, 민주주의 66은 10석, 녹색좌파당은 10석, 기독연합당 5석, 기독근본당 2석, 동물의 당 2석입니다. 표로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정당명 자민련 기독민주당 자유당 노동당 사회당 민주주의66 녹색좌파당 기독연합당 기독근본당 동물의당 총계
    의석수 31 21 24 30 15 10 10 5 2 2 150

    우파연정: 31+21+24=76석
    예산안 합의 5당: 31+21+10+10+5=77석

    자유당은 자신들의 행위는 유럽연합이 3% 가이드라인을 설정해서 네덜란드 내정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에 대한 항의 표시라고 얘기했었습니다. 유럽연합에 대한 반대 정서를 자극해서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것이었지요.

    자기들은 이번 기회에 존재를 과시했는지 모르지만 정작 네덜란드는 유로권의 모범생에서 졸지에 문제아가 되어버렸었습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이른 바 남유럽 갈릭 공화국(Garlic Republic, 마늘을 즐겨먹는 나라들이고, 마늘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들어 있는 명칭)들이 일제히 네덜란드의 3% 가이드라인 위반에 반발하는 기자회견을 할 정도로 반발이 셌었지요.

    유로화 해체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다

    4월 말까지 네덜란드 정부는 긴축예산안을 유럽연합에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단 일주일 만에 새로운 연정이 구성될 가능성은 희박했지요. 그런데 이때 기회를 포착한 것이 민주주의66당입니다.

    이 당은 1966년에 민주주의의 확대를 내걸고 창당한 자유주의 좌파 정당(전체정당 중에선 중도성향)인데 90년대 중반에는 의회에서 16%(24석)를 차지하는 제 4당이었다가, 그 후로 네덜란드 정치의 좌우 양극화로 의석이 줄어 현재는 6.5% 지지로 10개 의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당은 친 유럽연합 성향이 강한데, 이 당의 당수인 알렉산더 페흐톨드가 녹색좌파당과 기독연합당을 추동하여 무산 위기에 놓인 예산안 협상에 들어갈 것을 월요일에 긴급 제안하면서 돌파구가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집권당인 자민련과 기독민주당, 그리고 민주주의 66과 녹색좌파당, 기독연합당이 1박2일간 마라톤협상을 벌여 금요일 극적으로 예산안 합의를 발표하였고, 네덜란드를 유로화를 해체의 구렁텅이로 집어넣을 뻔했다가 빼내게 됩니다.

    지난 번 소식을 읽은 분들은 이쯤에서 짐작하겠지만, 저는 이런 합의가 가능할지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네덜란드 경제가 급속히 불황으로 들어가고 있는 가운데 3% 가이드라인을 지키는 긴축안에 합의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임을 알고 있던 건 자유당뿐만 아니라, 야권 제 1당인 노동당도 마찬가지였고, 4월 30일까지 이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 합의가 이뤄지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본 거죠.

    평소 꿈꾸지 못했던 대합의

    그러나 이번 합의는 유럽연합의 위기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네덜란드 정치권에서 유럽통합에 대한 합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준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번 합의가 불발되었다면 네덜란드의 신용등급은 애초의 AAA(triple A)의 우수생 지위를 잃게 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이와 함께 유로화의 가치를 지켜주는 버팀목 구실을 하는 3% 가이드라인이 유명무실화 되어 네덜란드가 유로화 위기의 주범 대열에 합류하는 엄청난 사태가 날 것이고, 유로화의 위기는 주변국에서 중심국까지 확산되는 단계로 올라갈 것이기에 네덜란드 정치권은 이번 사태를 단지 정권의 위기가 아니라 나라의 위기로 보고 2박 3일만의 합의라는 평상시에는 꿈꾸지 못할 대합의를 이뤄 낸 것이지요.

    이번 합의에 참여한 정당들은 자유주의와 생태주의, 기독교 정신의 서로 아주 다른 색깔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 당 모두 ‘친 유럽연합, 친 유로화’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당 셋이 ‘구국의 결단’을 내릴 수 있던 것이죠.

    마지막으로 이번 합의로 제일 많은 손해를 본 건 연정을 깨고 나온 자유당보다 제1야당인 노동당이라고 합니다. 노동당은 예산안이 불발되자 차기 선거에서 제1당이 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경제위기 하에 긴축정책에 반발하는 노동자와 중산층의 지지를 획득해서 프랑스처럼 유권자들의 표심이 좌클릭 하는 분위기에 편승할 것을 기대한 거죠.

    그러다 보니 재정적자 3% 이내의 긴축 예산에 합의해 주기보다는 차라리 버티면서 자민련과 기독민주당이 손 벌리고 나와서 협상 테이블로 불러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야 노동당도 지지층을 지키면서 예산안 내용에 자기 색깔을 많이 넣을 수 있으니까요.

    낙동강 오리알 된 노동당

    그런데 작은 3당이 먼저 선수를 치는 바람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지요. 노동당에겐 제1야당으로서 국정에 책임 있게 임하지 않고, 자당의 이익만 생각했다는 평가가 사후에 나오고 있어서, 한 달 전에 새로 당의 얼굴이 된 40대의 젊은 당수 디드릭 삼손은 체면을 구기게 되었고, 9월에 예정된 선거에서도 선전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삼손은 5개당이 합의한 예산안에 부가가치세 2% 인상과 연금 수급 연령 인상 시기 앞당기기(65세에서 66세로), 공무원 임금 동결 같은 조치들이 저소득층에 불리한 것이기 때문에 합의할 수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마당에 적극적으로 좌우 합작을 시도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당 내에서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이번 합의의 후폭풍은 9월 12일로 예정된 차기 총선의 판짜기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전문가들은 벌써 차기 총선은 예산안에 합의한 5개 정당이 그 결단에 대해서 평가받는 선거가 될 거라고 합니다.

    다섯 당은 현재 77석을 가지고 있고, 합의안 발표 직후 여론 조사 결과 지지도가 51%를 보이고 있습니다. 연정의 제2당인 기독민주당이 지지율이 반토막 난 악조건에서(현재 여론조사 12석) 그 정도의 지지율을 지킨다는 것은 상당히 희망적인 현상입니다.

    정치, 가능성의 예술임을 보여줘

    이번 협상에서 배제된 노동당과 사회당, 스스로 박차고 나간 자유당의 지지율은 68석 정도 됩니다. 결국 차기 선거는 유럽연합과 유로화 현재 노선에 찬성하는 5개당과 반대하는 3개당의 구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경제 불황인 상황에서 3% 가이드라인을 고수하는 게 맞는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서 그 짐을 누구에게 지우는 게 맞는지가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기업이냐, 부자냐, 서민이냐, 노동자냐, 연금 생활자냐, 학생이냐, 젊은 세대냐, 자녀 많은 가정이냐를 놓고, 합의안을 옹호하는 5당과 반대하면서 자신들이 집권하면 다시 대폭 손 볼 수도 있다고 얘기하는 세 당의 대결이 될 것 같습니다.

    노동-사회-자유 세 당의 색깔도 아주 다릅니다. 노동당은 중도 좌파성향에 친 유럽연합, 유로화 노선을 지향하고 있지만 근래 지지자들을 좌파 색깔이 분명한 사회당으로 옮겨가는 걸 저지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사회당은 신자유주의 반대 입장을 초지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어서 꾸준히 지지율 상승을 하고 있는 좌파 성향이고, 자본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유럽연합에 반대하고, 브뤼셀의 권한이 점점 강화되는 걸 반대하고, 유럽연합 회원국의 재량권 강화를 요구하며, 유로화는 너무 일찍 탄생한 미숙아라고 보면서 유로화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까지 생각하는 정당입니다.

    이에 반해 자유당은 반 이슬람, 반 외국인, 반 유럽연합, 반 유로화를 표방하고, 네덜란드를 다시 개신교-가톨릭-유대교 문화, 본토박이 네덜란드인 중심의 나라로 되돌려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90년대까지 유럽강대국들 사이에서 작지만 강한 나라로 유럽통합의 주역을 맡아온 네덜란드는 유럽연합의 위기를 맞아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과거 역할을 계속 맡기로 할 지 아니면 유럽연합의 궤도 수정에 한 몫 거들게 될지 궁금증이 커지고 있습니다.

    누구는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급변하는 정세에 손익 계산을 잘하고, 큰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이번 사건은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네덜란드 통신원/ 개인 이메일 jjagal55@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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