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선반공과 닌텐도
    2009년 01월 19일 02: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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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 행복해요?” 엊그제, 우연히 복도에서 부딪친 한 불교 전공의 노학자가 제게 그런 질문을 던졌어요. 사실,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저 자신도 몰랐습니다.

철학적 차원을 이야기하자면 고통 밖에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삶을 그 어떤 경우에도 ‘행복’이라고 부르기 힘들지만, 굳이 “사바세계는 苦海요”를 떠나서 생각을 해도 제가 여기 오슬로에서 사는 하루하루에 대해서 별로 행복감을 느끼지 않아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그냥 계속 하는 만큼 별로 불행하다는 감도 없지만 행복감 내지 이 사회에 대한 일체감이랄까 친화감이랄까, 그걸 별로 느껴본 적이 없어요. 배부른 소리 집어치우라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가난하고 불안한 사회가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풍요’를 도덕적으로 질타할 생각도 없어요. ‘풍요’라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가능성’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예컨대 학비도 입학시험도 연령제한도 없는 노르웨이 같으면 거의 누구나(학교 성적이 아주 나쁘지 않은 이상) 고졸 이상이면 언제든지 대학에 들어와서 좋아하는 과목을 그저, 자기 자신의 ‘자아 실현’을 위해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인 노르웨이에서, 이 사회의 보편적인 통념들을 어릴 때부터 익힌 이들이 이 가능성들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면 별로 행복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유아 재산가’가 돼가는 아이들

아이를 키우면서 오슬로에서 사는 처지인지라 이쪽의 유아 세계를 꽤나 자주 접하게 돼 있는데, 절감하는 것 하나는 아이들이 벌써 2~3살부터 일종의 ‘유아 자본가/재산가’가 되는 듯한 사실에요.

부모들이 아이에게 애정을 주는 것보다 장난감을 줌으로써 아이를 달래는 것이 더 편하다 하여 아이에게 자주 선물을 사주는 게 의례화돼 있고, 또 유아용 완구 산업과 유아 문화 산업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에 – 예컨대 포케몬 만화가 나오는대로 포케몬 관련 새로운 완구도 곧 출시되는 등 – 아이들이 완구에 대단한 의미를 두어 ‘완구 수집가’가 되는 것은 보편적입니다.

또 운동 등 가시적인 경쟁의 이미지가 많이 나도는 이미지 자본주의 사회인지라 아이들도 경쟁을 하지요. 완구를 누가 더 많이 갖고 있는가를 가지고 말에요. 그래서 저도 제 아이에게 ‘벤텐’(그 무슨 우주 전쟁 영웅인지 뭔지 어쨌든 아주 파괴적인 이미지의 주인공임)을 사달라는 당부를 늘 받아, “사람을 죽이는 건 나쁘다, 이런 완구를 사면 당신도 결국 불행할 것이다”라는 걸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면서 살아요.

그 ‘벤텐’ 수집을 놓고 아이들 사이에 일종의 경쟁이 붙은 모양입니다. 참, 한 번 아이들 놀이 시간에 닌텐도 (任天堂) 게임기를 허용해준 담당 선생에게 “과연 이게 건전한 놀이 문화라고 보시는가?”라고 물었는데, “아이고, 아이면 그런 것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나요?”라고 되묻더라고요.

저의 아이가 닌텐도라는, 제가 좋아할 일도 없는 자본의 돈벌이 수단이 되는 셈인데, 이 마약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줄 만한 그 어떤 방패도 보이지 않아 그 무슨 행복감도 느낄 수 없어요.

뭐, 아이들이 노는 것이야 나쁠 것 전혀 없지만, 각종 완구/만화 생산이 커다란 국제적 산업이 되어 아이들이 이 생산 주체들에 의해서 충분히 욕구 조작이 가능한 소비자 – 사실상 소비의 노예 – 가 된다는 것은 저로서 부자연스럽고 분노스러울 뿐이지요.

소년공산당궁전에서의 기억

제가, 소비가 극도로 억제된 스탈린주의 사회에서 자라서 그런가요? 저희들은, 그 무슨 닌텐도가 없어도 아주 잘 놀았어요. 하천에 가서 헤엄치든지, 국가에서 동네마다 세운 공립아동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든지 소년공산당 궁전(일종의 아동문화회관)에 가서 운동하거나 체스 같은 걸 두든지 말입니다.

저는 예컨대 소년공산당 궁전에서 선박 모형 제작부에 가서 나무를 깎아 선박 모형 부품을 만들어 그걸 조립하는 게 제일 좋아하는 놀이거리였어요. 선반공처럼 기계를 다루고, 노동자가 되는 듯한 느낌이어서 늘 뿌듯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뭘 하든간에 돈을 들이는 일, 즉 누군가와 거래를 해서 누군가의 자본증식을 도와주는 일은 한 번 없었어요. 제가 지금 스탈린주의를 찬양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스탈린주의 사회들은 예컨대 아이들에게 전쟁 찬양을 하고 ‘자랑스러운 군인이 되는 일’을 당연지사로 익히게 하는 것부터 범죄적인 행각이지요.

그러나 그 사회들을 국가자본주의로 보든 권위주의적 개발주의의 특수형으로 보든 어쨌든 그 사회들은 소비없이, 아이들이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행복’이라는 건 참 주관적인 것이고 상점에서 사는 완구의 가격과도, 월급 명세서에서 나오는 숫자와도 꼭 동일하지 않아요. 제가 그 무서운 전체주의(?) 사회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선박 모형을 만들 때처럼 그 다음에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그 사회의 그 나름의 고질이 어땠든 간에 ‘소비’가 아닌 ‘노동’을 즐겼으니까요. 제 손으로 완구를 만들 때에 사람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제 아이는 아마도 모를 것입니다.

참,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한 번 사람이 돈없이도 행복했던 시절로 갈 수도 없는데, 어찌 해야 합니까?

아이들과 함께 제가 여기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학생들인데, 한국 학생에 비해서 온갖 ‘가능성’들이 참 많은 아이들이지요. 학비를 낼 것도 없고 국가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저희 학교에서 4월달에 총장선거할 때에 투표권까지도 있는 것에요.

참, 궁금해서 물어보지만 대한민국에서 학생들이 총장선거에서 투표권을 갖고 있는 학교는 몇 군데 있는지요? 그런데 지난 총장 선거(2005년) 때에 저희 학교 학생들의 투표율은 어느 정도이었는지 아십니까?

믿으실는지 모르지만 약 12%이었어요. 2001년 같으면 5%도 안됐지만 상당히 활발한 투표 참여라는 평가도 있었어요(http://www.admin.uio.no/ia/rektorvalg/2005/valgresultat/deltakelse.html).

다함께, 놀라운 신앙의 힘

뭐, 총학 임원 선거 때도 투표율 10% 되면 다들 행복하지요. 보통 그것도 안되니까요. 투표시 기권의 이유는? 간단하지요. 대다수는 모든 것이 다 보장된 사회의 생활에 대해서 “대체로 만족스럽다”는 분위기고 그냥 각자 개인 취미, 개인 생활, 개인 공부, 개인 사회 활동 (티베트 지원이든 뭐든)에 몰두해 있지요.

   
  

투표마저도 관심 없어 하는 이 아이들을 보면서, “서구 복지 국가에서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다함께’ 류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신앙이 강한 이는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혁명을 하려면 일단 시민형 인간들부터 요구되는데, 제가 여기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소비자형 인간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계속 보기만 합니다. 물론 자본이나 정부가 그들을 크게 건드린다든가 해외 소식 중에서 오늘날 가자학살과 같은 충격적 소식이 들리면 이들도 들고 일어날 줄을 알지요.

그러나 어릴 때부터 ‘벌고 쓰는 재미’를 몸으로 익힌 사람들의 ‘혁명적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건 사회과학보다 어떤 신앙에 가깝다는 게 제 느낌입니다.

하여간 제가 오슬로에서 거의 9년간 살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한국사 관련으로 작업할 때나 소련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에 말고 없었어요. 그리고 제 아이가 커가는 걸 보면서 가면 갈수록 더 불행해집니다. 배부른 소리인지 뭔지 모르지만 그렇다는 것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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