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 미네르바 & 가이 포크스 가면들
        2009년 01월 17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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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3년 전에 개봉되었고, 한국에서는 60만 명을 밑도는 신통치 않은 흥행성적으로 제작을 맡았던 <매트릭스> 시리즈 감독 워쇼스키 형제나 주연 배우 나탈리 포트먼과 휴고 위빙의 이름값이 제대로 시장에 먹히지 않기도 한다는 걸 보여준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굳이 다시 찾아보고 싶어진다. 먼저 ‘벤데타’라는 익숙하지 않은 낱말의 뜻부터 새겨 보자.

    3년 전 영화가 다시 보고 싶은 까닭은

       
      ▲영화 포스터. 

    벤데타 vendetta : 1. (특히 코르시카 섬에서 행하여지던) 상호 복수, 피의 복수 2. 장기에 걸친 불화, 항쟁.

    그렇다면 V는 무엇일까? 영화에서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나타나 악을 처벌하고 ‘V’라고 표식을 남기는 그를 ‘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오독이다. V는 사실 정신집중 캠프의 실험용 수감자였던 그가 갇혀있던 방의 번호다.

    그러니까 ‘5호실 무명씨’가 어떻게 피의 복수를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항쟁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면서 혁명의 아이콘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승리의 주역 ‘브이’로 떨쳐 일어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지를 제목 <브이 포 벤데타>에 담고 있는 영화다.

    제3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악의 세력으로 전세계를 짓밟는 동안, 미국을 비난하는 국가주의의 미명 아래 꽁꽁 묶인 2040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통금과 밀고, 언론 통제와 거짓 정보, 감시와 처벌이 독재를 지속하는 방식이다. 이런 세계에서 홀연히 나타난 V는 영화 내내 자신의 원래 이름도, 정신집중캠프에 갇혀 실험대상이 되기 이전의 내력도 끝끝내 밝히지 않고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가이 포크스의 날로 넘어가는 날, 11월 5일로부터 영화가 시작한다.

    귀도 포크스라고도 알려진 가이 포크스(Guy Fawkes)는 영국에서 화약음모 사건을 계획한 로마 가톨릭 혁명가 그룹 멤버였다. 가이 포크스의 날은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고 제임스 1세와 그 일가족을 시해하려 한 가톨릭교도들의 화약음모 사건이 무마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며, 지금까지도 영국에서는 행동대장 가이 포크스의 상을 만들어 거리로 끌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불태우고, 이 시기에 아이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니는 풍습이 있다.

    ‘녀석’을 뜻하는 영어 단어 guy는 바로 가이 포크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니 가이 포크스는 어느 특별한 항쟁의 주인공이 아니라 억압에 맞서는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전해지는 저항의 이름이요, 모습이다.

    Guy(녀석)의 어원이 된 이름

    통금 시간, 어두운 밤길을 몰래 나선 방송국 직원 이비가 못된 남자들에게 잡혀 막 험한 일을 당하려한다. ‘밀고자’의 표식을 내보이며 능글맞게 이비를 압박해오는 사내들을 처단하고 V가 이비를 데려간 곳은 영국 국회의사당의 상징 빅벤 꼭대기. 거기서 V는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을 배경으로 침묵에 쌓인 런던에 폭약과 불꽃을 터뜨린다.

    이제 무기력과 체념에 눌린 채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던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강력한 언론 통제를 바탕으로 정보를 조작하고, 조작된 정보를 바탕으로 국가를 더더욱 강력하게 통제하던 전체주의 정권의 지도부는 V를 찾아내려고 안달이 난다.

    그 와중에 V는 유유히 방송국에 들어와 생방송 중인 스튜디오에 서서 전 국민을 향해 1년 후 11월 5일,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키겠노라고 선언한다.

    마침 V와 함께 있던 이비를 잡으려고 핀치 형사가 방송국에 진압부대를 이끌고 와있던 상황이라 쫓는 자와 빠져나가려는 자가 엉켜 방송국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혼란의 와중에 달아나던 이비가 얼떨결에 위기에 처한 V를 돕게 되면서 둘은 함께 지내게 된다.

    자신과 이비를 지키려다보니 V가 이비를 억류한 모양새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둘은 서로를 알아나가게 된다. 이비는 어릴 때 원인 모를 생체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남동생이 죽은 후 부모가 반체제 활동을 하다 자기 눈앞에서 죽어간 이후,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외로운 아가씨.

    V는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진 살갗을 가면 아래 감춘 채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자들을 처단하면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어버린 괴로움에 고통 받는 테러리스트. 그 와중에 방송에서는 V는 방송국에 잠입한 날 이미 사살 되었노라며, 이후 V의 손에 처단되는 사람들에 대한 모든 살인 사건을 멋대로 날조해서 유포한다.

    미네르바, 촛불 그리고 V들

    처음의 11월 5일에서 예정된 다음의 11월 5일까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비와 V, V와 독재정권, 독재정권과 민중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 사이에 많은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이비와 사람들이 바뀌도록 만든다. V의 칼끝이 점점 더 권력의 핵심을 향해 겨누어질수록, 언론을 통한 조작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나선다.

    이 와중에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던 방송 진행자 고든이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대신 최고권력자를 패러디하는 쇼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한다. 그는 V로부터의 억류에서 달아난 이비를 숨겨준 벗이며, 동성애자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고든의 죽음은 지금껏 숨죽여 살던 이비를 극단으로 몰아붙인다. 저들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기만 하며 살 것인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울 것인가.

    마침내 11월 5일, 혁명의 그날. 거리는 혁명을 진압하려는 군인들로 에워싸이고, 폭약을 가득 실은 차량은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그 차량을 출발시킬 사람은 누구인가? V는 말한다. 그 일을 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고. 그 폭약은 자신의 선물이라고.

    국회의사당을 지키려는 군인들을 향해 수많은 가이 포크스들이 다가온다. 이비와 V를 잡으려던 핀치 형사가 이비에게 묻는다. V는 누구였냐고. 이비는 대답한다. 그는 나의 아버지였고, 또 어머니였고, 나의 동생이었고, 당신이었고, 그리고 나였어요. 우리 모두였어요.

    <브이 포 벤데타>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다. 2008년 7월에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서울 한복판 거리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미네르바’가 체포되었다는 정부 발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나도 미네르바’라며 어이없는 체포와 구속에 항의하고 있다.

    전두환의 아들이 책으로 내다

    정부는 방송법 개정을 통해 언론을 장악하고, 장악한 언론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고, 인터넷 실명제나 사이버 모욕죄 따위 새로운 통제 조치를 취하면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저희들 뜻대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 V의 대사처럼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며, ‘너희들이 가진 건 총알과 내가 그 총알에 쓰러지기를 바라는 희망뿐’이지만, ‘널 쓰러뜨리는 건 내 칼이 아닌 네 과거’이고, 총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는 ‘가면 뒤에는 그저 살덩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념이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엘렌 무어의 그래픽 노블이라는 우아한 장르의 만화책 <브이 포 벤데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이 책 판권을 구입해서 책을 낸 국내 출판사의 사주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이다. 돈이 된다면 뭐든 다 하는 게 자본의 생리이니 뭐 그럴 수도 있나보다.

    그래도 그렇지, 전 재산이 29만1천원 밖에 없다는 사람의 별 경제적 이력도 없는 아들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출판사를 차리고 전 세계에서 좀 좋다는 평이 도는 책의 판권을 싹쓸이할 수 있는 재력을 갖춘 걸 보면 이 나라 참 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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