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사정위, 정파갈등 뇌관 폭발시키다
        2009년 01월 15일 11: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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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노사정위원회 이야기를 연재할 것이다. 노동조합운동은 1998년 1기 노사정 합의와 비대위 총파업 철회로부터 2005년 노사정위 복귀를 둘러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사태까지, 8년간에 걸쳐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노사정위 문제는 노동운동에서 정파 갈등을 폭발시킨 뇌관이었다. 노사정위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 과정에서 각 정파는 서로를 향해 자본의 앞잡이, 기회주의, 폭력집단 등 갖다 붙일 수 있는 험악한 딱지는 다 갖다 붙였다. 멱살잡이를 넘어 주먹질과 발길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파 갈등 폭발시킨 뇌관

    모두에게 아픈 기억이다. 지금도 그 때를 이야기하면, 많은 활동가들의 목소리에 시퍼런 날이 설 정도로 상처가 깊다. 정부와 자본에 맞서 오랫동안 함께 투쟁한 활동가들의 관계를 서로 ‘설득하고 타협하는 관계’에서 ‘배척하고 제압하는 관계’로 뒤틀어놓은 핵심 사안이었다. 이른바 현장파, 중앙파, 국민파 갈등의 중심에 노사정위 문제가 있었다.

    노동운동을 되돌아보는 나의 글에서 노사정위가 거론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빠지면 ‘노동운동과 나’ 라는 나의 연재는 김치 없는 밥상처럼 싱겁고 허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당연한 것을 놓고 1주일 동안 갈팡질팡했다. 결국 <레디앙> 연재 마감 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현재 민주노총과 노동운동은 무기력하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도대체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은 어디에 있는가.” 노동운동은 촛불 때도, 언론파업 때도, 속 시원하게 자기역할을 못했다.

    지금 이것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1월 21일로 예정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계기로 꼬여있는 실타래를 풀고 투쟁전선을 복원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한다. 한동안 소 닭 보듯이 했던 노동운동 관련 정파들도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시작했다.

    나의 글이 그러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점에 노사정위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갈팡질팡했다.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 거듭한 이유

    그러나 나는 고민 끝에 지금 쓰기로 했다. 분명 노사정위를 둘러싼 과거는 안 좋은 추억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교훈을 찾아내고, 다시는 그런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서로 모색하고 대화하는 현 시점이 오히려 적절하다는 판단이다. 투쟁전선을 살리려면 운동 내부의 단결과 통합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 훌륭한 사례가 노사정위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었다고 판단한다.

    말머리가 길었지만 한마디 덧붙이고 시작하겠다. 이 글 때문에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드러나서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 있는 동지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 창립식

    1998년 1월 15일 노사정위원회가 발족했다. 노사정위 발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김대중 당선자가 외환 위기를 빌미로 정리해고제의 조속한 도입방침을 밝혔고, 이에 반발한 민주노총이 노사정위 불참선언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노사정위는 발족했다.

    김대중 당선자 측이 노사정위를 필요로 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정리해고 도입은 불가피하지만 이에 따른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세질 경우 오히려 대외신인도 추락 등이 우려되므로 이를 막기 위한 ‘안전판’으로 노사정위를 발족시키자는 것이었다. (노사정위원회 출범에서 합의까지, 이정희, 노동사회 1998. 3.)”

    노사정위, 노조 돌출행동 막는 안전판

    당시 <매일노동뉴스> 기자였던 이정희는 앞의 글에서, 노사정위 출범을 열흘 남짓 앞둔 어느 날 정부 산하기관의 비공개 정책보고서를 우연히 입수했다고 했다.

    이 기자는 그 보고서에는 “노사정위는 △정리해고 도입에 따른 노조의 돌출행동을 막는데 안전판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 △노조가 정리해고 제도화에 합의하지 않더라도 파업 등 극한 상황에 가지 않도록 하는데 에만 기여하면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로자 복지 및 임금, 사교육비 경감, 조세형평문제 그리고 실업자의 생계지원 및 고용안정대책 등 노조에게 ‘선물’을 줄 수 있는 것만 집중적으로 논의해서 합의를 도출하도록 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 당시 정리해고 제도는 96년 말 김영삼 정권의 날치기 노동법 개악 때 법제화되었으나, 민주노총의 완강한 총파업 투쟁으로 99년 3월까지 2년간 유보된 상태였다. 김대중 당선자 측은 그것을 1년 앞당기기 위해 98년 2월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의 법 개악을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 민주노총과 노동운동은 정세판단에 따른 전술적 필요에 의해 노사정 사회협약과 노사정위를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권과 노사정위원회

    97년 3월, 정리해고가 2년 유예로 법제화된 뒤, 민주노총은 99년부터 닥쳐올 고용대책 차원에서 ‘노사정으로 구성되는 고용안정위원회 구성’을 이미 정부에 제안했었다. 그리고 97년 11월 13일의 단위노조 대표자 결의대회에서도 그것을 재차 요구했다.

    97년 11월 21일 김영삼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후 열린 12월 10일 중앙위원회에서는 “재벌개혁, 고용안정에 대한 제도개선과 노사정 사회협약을 공세적으로 제기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97년 12월 18일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 노사정위 구성을 위한 논의가 본격 진행되었다. 이 때 열린 98년 1월 7일의 민주노총 중앙위는 “민주적 구성과 운영을 전제로 노사정 3자 협의체를 구성하고 중앙교섭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최종 확정했다.

    “이번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노동자의 피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노ㆍ사ㆍ정 3자 동수 기구를 상설화해 경제정책과 노동정책 전반에 관해 매 시기별로 요구되는 중앙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이 방침이었다.

    물론 민주노총은 투쟁에 근거한 교섭이라는 기본원칙에 따라, “사회적 협약은 밀실합의, 내용 없는 들러리 합의, 또는 투쟁 없는 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 대중투쟁을 기본으로 재벌해체, 고용안정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기해나가야 할 것이다.” 는 점을 확인했다.

    노사정 기구 구성에는 반대 없어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 당시는 아직 현장파, 국민파, 중앙파라는 정파흐름이 형성되지 않은 때이기는 했지만, 그러한 민주노총 방침에 대해 어떤 세력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사정 사회협약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노사협조주의라는 비판이 있기는 했지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민주노총의 방침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김상복과 김태연의 당시 글을 인용해 보겠다. 이후 그들은 1999년 출범하는 ‘노동자의 힘’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고, 노동자의 힘은 현장파의 중심에 서서 2005년에 이수호 집행부가 노사정위에 재가입하려고 할 때 대의원대회 단상을 점거하면서 격렬하게 반대했다.

    당시 민주금속연맹 정책1국장이었던 김상복은 “현재 우리의 조건에서 사회협약 체결을 위한 투쟁이 곧 ‘사회적 합의주의’ 나아가 노사협조주의로의 귀결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현 시기 재벌해체, 경제구조개혁을 제기하고 노동시간 단축과 경영참가를 전제로 한 사회협약 체결 투쟁은 대중투쟁 조직화와 투쟁에 유리한 무기이자 사회 심리적 조건을 형성한다. 현재의 노사정 합의 시도의 귀결과 향방은 투쟁동력의 세부적 배치와 조직화에 달려 있다. (IMF 구제금융과 김대중 정권하 노동운동, 노동전선, 1998 1)” 고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민주노총 기획부국장이었던 김태연은 “노사정 사회협약 전술 자체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다. 거칠게 표현하면 노사정 사회협약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노사협조주의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단위노조, 연맹, 중앙조직 등 각급의 노동조합이 자본이나 정권에 대해 일상적으로 교섭과 투쟁을 병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노사정 사회협약을 전술로 채택하는 것 자체는 옳다. (IMF의 영향과 민주노총의 투쟁방향, 앞의 책)” 고 했다.

    출발은 그랬다. 1998년 1월 15일 노사정위가 발족할 때, 그 문제는 노동운동의 논쟁 대상이 아니었다. 갈등의 요소도 아니었다. 투쟁과 교섭 전술의 하나로 충분하게 활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쉽게 합의했다. 그리고 민주노총이 적극 제기했다.

    그랬던 노사정위 문제가 노동운동의 격렬한 쟁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왜일까. (노사정위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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