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네르바 해부 언론이 신상공개 비난?
        2009년 01월 12일 09: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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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4년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접견하고 온 한 언론전문 변호사는 "유영철이 허락만 해줬다면 그에 대해 마구잡이로 기사를 쓴 기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모두 승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3년 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신정아씨 비호사건을 대서특필하던 언론은 신씨와 변 전 실장의 오피스텔 거리를 재다가 신씨의 오피스텔에서 발견됐다며 각종 물건들을 공개하고, 급기야 신씨의 누드사진이라며 한 장의 사진을 지면에 담아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2009년 1월,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 박아무개(31)씨 체포·구속수감을 맞아 한국의 언론은 박씨의 신상명세와 관련해 온갖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지난 9일 시작해 10일 정점을 맞은 박씨 관련 보도는 주말을 지나며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검찰이 문제삼은 박씨의 지난해 12월29일 ‘달러매수 금지공문’ 주장이 형식만 다를 뿐 사실상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누리꾼이 박씨의 영장을 발부한 한 판사의 이력을 인터넷에 공개하자, 일부 언론은 ‘사이버 테러’라며 사이버모욕죄 도입을 촉구하는 듯한 보도를 내놓고 있다. 동아일보는 12일자 사설 <미네르바 구속에 ‘사이버 보복’하는 서글픈 악의>에서 "건전한 비판이 아니라 법관에게 인신공격과 위협적인 언사를 늘어놓는 행위는 사법권에 대한 위협이자 또 다른 범죄행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동아일보 1월12일자 사설.  
     

    일부 네티즌의 판사 이력 공개를 별개로 논의한다면, 지켜야할 권리에는 사법권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인권도 있다. 이를 간과하고 ‘미네르바’ 박씨의 개인 신상을 낱낱이 지면에 올린 언론들이 있으니, 과연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 있을까. 다음은 12일자 전국단위 종합일간지 1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 <이스라엘의 만행>
    국민일보 <유명 음대교수 과외교습 성행>
    동아일보 <영어 지문-수학 풀이 문제 대입논술에 출제할 수 있다>
    서울신문 <담보주택 마구잡이 경매 제한>
    세계일보 <세계 물가는 뚝뚝 떨어지는데…국내는 ‘찔끔’>
    조선일보 <"폭력 의원 반드시 징계위 회부">
    중앙일보 <대학생 ‘영·수 과외’부터 끊고 부부가 직접 아이들 가르치고>
    한겨레 <‘미네르바, 허위사실 유포’ 근거 부족>
    한국일보 <"글로벌 리더는 환상일뿐 실상은 외국인 노동자죠">

       
      ▲ 중앙일보 1월12일자 10면.  
     

    중앙일보는 12일자 10면 기사 <미네르바 영장판사에 사이버테러/인터넷서 비난 글 확산…신상정보도 나돌아>에서 박씨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울중앙지법 김용상 부장판사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나돌고 있는 것을 지적했다. 동아일보도 5면 머리기사 <"법복 벗겨라…막가는 ‘사이버 테러’>기사에서 "법관에 대해서도 이런 사이버 공격을 할 정도로 누리꾼들 스스로 자제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퍼지면 사이버모욕죄 도입이 정당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지적을 옮겼다. 그러나 굳이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해 본다면, 자제하지 못하고 한 개인의 이력과 신상을 공개한 쪽은 언론이 먼저다.

       
      ▲ 동아일보 1월12일자 5면.  
     

    일단 중앙일보가 지난 9일자 1면에서 보도한 내용 가운데 ‘미네르바’로 추정되던 박씨의 출입국 기록과 경제학관련 학위 취득 여부를 밝힌 것은 나름 보도할 가치가 있다. "외국의 금융기관에서 근무했다"고 한 박씨의 발언 진위여부와, 그가 ‘경제학’ 전문가인지는 이 사건에서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날 10면 머리기사 <"오빠, 몇 달 간 집에서 온종일 인터넷에 글 써"/ 여동생·이웃들이 말하는 미네르바>는 그렇지 않다. 중앙일보는 박씨가 살고 있는 서울 소재 한 빌라를 찾아가 카메라에 담았으며, 그의 집을 흰 동그라미까지 쳐서 지면에 올렸다.

    중앙일보는 "무직인 박씨는 여윳돈은 거의 없었지만 경제적으로 극도로 궁핍한 상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집은 유난히 택배 배달도 잦았다. 경제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배달시켜 읽은 것으로 보인다", "무직자였지만 그는 정신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와 같은 확인되지 않은 내용도 기사에 담았다. 이튿날(10일)은 박씨 아버지 인터뷰와 고교 3학년 담임교사, 고교동창, 대학교수, 대학동창들의 평가를 지면에 담았다.

       
      ▲ 중앙일보 1월9일자 10면.  
     

    조선일보도 같은 날 4면 기사 <이웃·동창이 본 박씨 "집 밖 거의 안나온 얌전한 청년">에서 박씨의 대학 성적과 고교 등수, 회사 이직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지난 9일자부터 박씨의 실명을 보도하기는 중앙일보와 마찬가지다. 동아일보는 9일자와 10일자 모두 박씨를 익명으로 처리했지만, 10일자 10면 기사 <이웃들 "외출 거의 안하고 택배상자만 수북">에서 이웃에게 돈을 빌려간 사실까지 적는 ‘꼼꼼한’ 모습을 보였다.

    경향신문도 10일자 4면 사진기사로 <미네르바의 집>을 싣고 박씨가 살고 있는 빌라의 전경을 지면에 올렸다. <고교동창 "그는 평범했던 친구"> 기사에서는 조선·중앙·동아일보와 마찬가지로 박씨가 나온 서울 소재 고교와 경기도 소재 대학을 이니셜 처리해 보도했다. 박씨가 대학 2학년 1학기 때 교양선택으로 들은 수업이 무엇이었는지, 학점은 어떻게 됐는지, 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는 지 없는 지도 적었다. "아주 착실하고 똑똑한 청년이다. 정부를 비판해서 들어간 것 같은 데, 그게 아니면 잡혀갈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웃의 색다른 ‘진술’이 여타 신문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 경향신문 1월10일자 4면.  
     

    사실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의 ‘취재 열’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들은 지난 2007년 9월20일자 기사에서 신정아씨가 어떤 과자를 먹고 싶어했는지 소소히 알려주는 보도태도를 보인 바 있다.

    반면 한겨레의 같은 날(10일) 3∼4면 편집은 이들과 대조적이다. <미네르바 구속영장 정당한가>, <검찰수사 안팎>, <‘학벌 낮으니 속았다’…또 드러난 ‘간판사회’>, <‘대정부 긴급공문 발송’ 글 시비> 등 관련기사 가운데 박씨의 신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대목은 단 한 곳도 없다. 하루 전인 9일자 1면과 3면의 기사에도 박씨의 신상이나 주변인물들의 평가를 일체 담지 않았다. 단지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올린 글을 법적으로 문제삼을 수 있느냐 없느냐, 검찰 수사의 옳고 그름과 미칠 영향은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췄다.

       
      ▲ 한겨레 1월12일자 1면.  
     

    이러한 보도태도는 12일에도 이어져 한겨레는 1면 머리기사 <‘미네르바, 허위사실 유포’ 근거 부족>과 5면 머리기사 <‘허위사실 유포’ 처벌 논란 / 명예훼손 없어도…걸면 다 걸린다> 등에서 사태 본질에 맞는 기사를 내놨다. 그 외 한국일보와 서울신문, 국민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 등은 지난 9∼10일자에서 박씨를 익명 처리했으며, 한국일보와 문화일보 외에는 박씨의 집 사진을 지면에 담지 않았다. 이 가운데 문화일보가 박씨의 신상을 밝히는 별도의 기사를 올렸으나, 조선·중앙·동아·경향처럼 상세한 수준은 아니었다. 국민일보는 12일자 들어 박씨의 실명을 본격적으로 달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미네르바’의 신상을 낱낱이 보도한 기사들이 실정법에 위반된다는 사실이다. 박갑주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한 기고 글에서 "국민의 알 권리, 언론의 자유, 공공의 이익만이 일방적으로 강조될 경우 헌법에 규정된 형사피의자 및 형사피고인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제29조 제4항), 개인의 인격권(제10조),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제17조), 그것을 법률로 뒷받침하는 피의사실 공표죄(형법 제126조, 형사소송법 제198조) 등은 법전에서만의 권리, 사문화된 기본권이 되고 만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한겨레 1월12일자 5면.  
     

    더군다나 ‘미네르바’는 연쇄살인범도, 영아유괴범도, 실정법을 어긴 선출직 공무원도 아니다. 그렇다면 언론은 ‘미네르바’가 전기통신기본법 47조를 어긴 것인지 아닌지, 사법당국이 이 법을 적용하며 구속수사를 하는 것은 과연 옳은지, 이로 인해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논란은 어떻게 되는지만 밝히면 된다. 박씨의 학적부를 뒤지고, 옆집에 빌린 돈은 얼마인지 받아 적고, 그가 시킨 택배에 뭐가 들었는지 유추하는 것은 뛰어난 취재능력을 과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앞서 2007년 10월 매일경제의 한 데스크는 삼성비자금사건과 관련한 칼럼 <불편한 진실, 불량한 폭로>에서 "진실에는 공개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황과 칼럼의 타당성을 별개로 한다면, 이 칼럼 가운데 "자기 침실과 욕실에 CCTV를 설치할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봐야 할 상대는 김용철 변호사가 아니다. 일부 네티즌의 부장판사 이력 공개를 나무라기 전에 먼저 돌아봐야 할 대상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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