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이념보다 참된 만남을 향해
        2009년 01월 12일 08: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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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이 제2 창당 작업으로 바쁘다. 그 와중에 자주 받는 물음 가운데 하나가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는 것이다. 옛 민주노동당의 속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이 물음이 단순히 두 진보정당의 현실적 차이에 대한 물음으로만 들리지 않고, 우리 시대의 진보 정당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으로 들린다.

    진보적 정당정치의 존재 이유

       
      ▲ 김상봉 미래상상연구소 이사장

    과연 진보적 정당정치라는 것이 지금 우리 시대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 시대에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소 추상적이더라도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진보의 다양한 얼굴, 예를 들면 기술적 진보 같은 것은 제외하고 오직 정치적 의미에서 진보만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가장 단순하게 말해 지금까지 정치적인 진보 운동이란 권리를 찾는 운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적 노동운동은 자본가에게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를 찾는 것이고, 진보적 여성운동은 남성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것이며,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비장애인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는 일일 것이다.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할 때 우리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회는 타인의 권리를 부당하게 약탈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왕조시대와 식민지시대 그리고 독재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오는 동안 그나마 이 정도의 사회적 평등과 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그것을 되찾으려 하는 운동이 진보적 정치운동이라면 그것은 당파적인 계급투쟁을 벗어나기 어렵다. 참된 진보 운동은 권리 찾기 운동이 모두를 위한 것일 때 정당성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노동자의 권리 찾기가 단순히 좁은 의미의 노동자계급의 이익 추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이 될 때 보편적인 정당성을 얻게 된다. 이런 이치는 여성해방운동이나 장애인 인권운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참된 진보적 정치운동

    따라서 참된 진보적 정치 운동이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권리 찾기를 뜻하는 바, 이런 문맥에서 보자면 진보적 정치 운동이 추구해 온 정의란 어떤 사람도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 사이에 권리의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이며, 평등이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기준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진보 운동이 모든 사람을 위한 운동이라는 것이야말로 그것의 대중성을 담보하는 근거이며 진보 운동의 현실적 힘도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빼앗긴 권리를 찾고, 확보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 진보적 정치 운동의 궁극 목표가 되어버린다면, 내가 생각건대 더 이상 진보 운동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수하게 권리만이 문제라면 나의 권리와 모든 사람들의 권리는 원칙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리는 자기의 대상에 대한 권리이다. 권리의 충돌과 불균형이 생기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에 대상에 대한 권리의 양이 다르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누구도 자기의 권리를 홀로 지킬 수도 없고 빼앗긴 권리를 홀로 되찾을 수도 없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권리를 되찾고 지키려는 운동은 반드시 집단적 연대와 결속을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빼앗긴 민족의 권리가 문제라면 민족이 하나로 결속할 것이며, 빼앗긴 노동자의 권리가 문제라면 노동자 계급이 단결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권리를 찾고 지키려는 욕구 자체는 자기의 권리를 확장하려 할 뿐 그것을 스스로 제한하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대상이 무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기의 권리를 확장하려는 의지는 자연스럽게 자기와 같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대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진보운동의 자기모순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리스의 자유 시민들이 노예를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한 것이나,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면서 자기들만의 시민적 공화국을 추구한 것,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에 눈감으면서 자기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한편과 연대하면서 다른 편을 배제하는 일이 모두 권리개념의 본질로부터 같이 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보운동이 일종의 자기모순에 봉착한 근본적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명목상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의 균형을 지향하지만 권리 개념 그 자체는 권리의 보편적인 향유라는 진보적 이상을 자체 내에 포함하지 않는 까닭에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당파적인 담합과 배제로 퇴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 정말로 새로운 진보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려면 바로 이 권리의 개념을 넘어서야만 한다. 권리의 개념은 대상에 대한 욕망에 기초한다. 그리고 이 욕망이 결국 나와 너 사이의 대립을 낳고, 이 대립이 보편적 인간해방과 만남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상에 대한 권리의 극대화가 아니라 너와의 참된 만남에 대한 욕구가 진보적 상상력을 추동하고 진보적 운동을 이끌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면 우리가 투쟁하는 것은 투쟁 자체를 원해서도 아니고 그것을 통해 대상에 대한 권리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도 아니며, 오직 불평등하고 왜곡된 만남을 지양하고 너와 나 사이의 참된 만남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권리의 균형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참된 만남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참된 정치, 참된 만남

    참된 정치란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되는 것이다. 참된 만남에 대한 지향이 다른 모든 정치적 이념들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이념도 불화의 씨앗이 될 뿐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진보의 이름으로 안팎으로 싸우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일상화된 불화 속에서 진보적 이념의 현실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일상화된 불화는 우리를 하나 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싸움이 만남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을 때, 진보적 정치운동은 갈라진 사람들을 하나로 만나게 하고 그 만남 속에서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주간 <진보신당> 25호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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