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에 쫓기는 이스라엘 청년들
    2009년 01월 09일 08: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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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 

개들이 달려온다. 사납게 달려온다. 거리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제치고 무리지어 달려온다. 필사적으로, 처절하게, 그러면서 집요하게. 하나, 둘, 셋, 넷…… 모두 스물여섯 마리. 개들이 찾아낸 것은 한 사내가 사는 집.

개들에 쫓기는 이스라엘 청년

창을 열고 개들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소스라친 남자는 불현듯 깨닫는다. 개들이 자신을 찾아낸 이유를.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기억이 불길하게 귀환하고 있음을. 그것은 전쟁, 학살, 그리고 죄의식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개들의 추적은 레바논 전쟁에 참여했던 이스라엘 사내들의 망각을 악몽으로 일깨우고,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그들은 거기서 무얼 겪었던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쪽같이 지워버린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를 묻고 답을 찾아 나서도록 한다.

친구 보아즈가 영화감독 아리 폴만에게 개들에게 쫓기는 악몽에 시달리는 고통을 털어놓는 데서 영화가 시작한다. 보아즈는 그 개들은 레바논에서 한밤중에 마을 하나를 공격하려던 때, 마을 사람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자신이 쏘아죽여야 했던 바로 그 개들이라는 것을 기억했노라고 고백한다.

막상 감독에게는 그 당시 기억이 전혀 없다. 자신도 분명 병사로 전장에 나갔는데 도무지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영상, 학살의 바다에서 일어서는 벌거벗은 젊은 날의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만이 환상처럼 남아있을 뿐. 그래서 감독은 망각의 이유를 찾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 참혹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럼, 너도 거기 있었잖아"

감독은 묻는다. "거기 나도 있었어?" 그러면 옛 친구들은 대답한다. "그럼, 바로 옆에 있었잖아." 각자 지닌 전쟁의 기억을 꺼내어 털어놓는 동안 감독의 영상은 점점 또렷해진다.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교차하면서 <바시르와 왈츠를>은 감독과 관객을 이끌고 한 장소를 향해 간다.

그 기간이 무려 4년.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아리 폴만 감독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을 먼저 카메라로 찍었으나 영화는 정작 실사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사건이 벌어졌다가 기억에서 지워지고 나서 다시 생생한 장면으로 현실을 관통한 것처럼, <바시르와 왈츠를>을 만들어낸 과정도 한번 카메라로 찍은 필름을 꿈과 환상과 실제의 기록 영상을 거쳐 온전한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는 영상이 되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고통을 관통한다.

바시르는 1982년 9월 14일, 레바논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식을 아흐레 앞두고 폭탄 테러로 죽은 친이스라엘 기독교 팔랑헤당 당수의 이름이다.

1943년 독립한 이래, 레바논은 줄곧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친서구적 기독교 세력과 급진적 이슬람교 원리주의 세력의 오랜 갈등과 대립으로 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나라였다. 1958년, 기독교도 대통령이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재선을 노리자 이슬람 세력이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화의 한 장면. 

미군 1만5천 명이 수도 베이루트에 상륙하면서 표면적으로 내전은 끝났으나, 1970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레바논 남부 지역에 난민촌을 건설하고 이스라엘과 무장투쟁을 시작한데다가, 1972년 베이루트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본부를 설치하자 다시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1978년부터 이스라엘이 여러 차례 레바논을 침공하면서 레바논 내전은 이슬람 게릴라 세력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1982년 8월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에 휴전이 성립되고, 1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축출되는 불안한 정국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친이스라엘 성향의 바시르 제마엘이 폭사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서 감독의 기억이 멈추어버린 것이다.

그토록 큰 사건이었고, 자기 자신이 바로 그 당시 베이루트에 있었는데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그렇게 기억을 가둔 채 26년 동안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저 죄의식 때문이 아니라 더 깊고 오래된 학살, 아우슈비츠로부터 비롯된 망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우슈비츠로부터 비롯된 망각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의 충격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자 한 것이며, 학살의 방조자 내지 조력자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자 한 것이다. 마침내 충격의 수용소 사브라와 샤틸라가 또렷이 떠오르고 애니메이션은 통곡소리와 함께 생생한 기록영상으로 바뀐다.

바시르가 죽던 당시, 팔레스타인 해방전선이 레바논에 설치한 미사일 기지를 색출하려고 이스라엘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바시르의 죽음으로 광분한 기독교 팔랑헤당 민병대가 이스라엘군이 포위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수용소 사브라와 샤틸라에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잡겠다는 구실로 난입해서 사흘 동안 3천여 명에 이르는 난민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정작 게릴라들은 이미 떠난 곳에서 기독교 팔랑헤 민병대원들이 노인과 여자들, 심지어 아이들까지 도살당하는 동안 감독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공포와 절망을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수용소에 고스란히 되돌리는 유태인의 모습을 온전한 정신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서 망각의 그림자에 묻어버렸던 것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의 인물들은 이 전쟁에서 어린 게릴라를 죽이기도 하고, 민간인이 탄 차에 대고 총을 난사해 일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하고, 자신들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공격당해 공포에 떨기도 하고, 기습을 당해 동료들이 픽픽 쓰러지는데 혼자 살겠다고 도망도 가고, 죽은 자들의 시체를 밟고 서서 총질을 하기도 하고, 난민촌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돕기 위해 어두운 밤하늘에 밤새 조명탄을 쏘아 올리기도 한다.

이들이 가는 곳곳마다 이미 죽은 바시르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바시르는 피를 피로 갚도록 하는 주문이고, 이 주문에 홀려 쏘아대는 총질은 인간성을 상실한 왈츠가 된다.

   
  ▲영화의 한 장면. 

<바시르와 왈츠를>은 전쟁과 학살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애니메이션과 음악을 통해 기묘한 비현실로 그려낸다. 그 가운데 베이루트로 진격하는 병사들이 부르는 노래는 ‘나는 한국을 폭격했네 I bombed Korea’라는 곡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을 폭격했네’

한국전쟁 당시 폭격기 조종사의 입장에서 전쟁이 인간 자체와 무관하게 생명을 앗아가는 상황의 부조리함을 노래하는 원곡에서 한국이 레바논으로 바뀐 것이다. 엔딩 크레딧에서 Korea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의 섬찟함이라니. 코리아가 레바논이기도 하듯, 레바논은 광주이기도하고, 르완다이기도 하고, 가자지구이기도 하다.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수용소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른 끔찍한 도살은 반이스라엘 투쟁의 중심세력이자 자살폭탄테러의 원조인 헤즈볼라를 탄생시켰다. 이스라엘은, 그리고 감독은 그날 그곳에서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 모든 참극의 배후에 바로 이스라엘과 자신이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폭탄을 쏟아 붓고 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이 지속되는 지금, 사브라와 샤틸라에서 유태인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벌어지는 학살에 대해 그 실체를 제대로 알려하지도, 바로잡으려 하지도 않는다면 우리 역시 밤마다 꿈속에까지 따라붙는 처절한 눈빛의 개들에게 쫓기게 될까봐,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방조자로서의 죄책감으로 사무치는 나날을 맞이하게 될까봐 정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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