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 재구성 없이 부활은 없다
        2009년 01월 07일 08: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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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사람들의 오래된 저주 중에 이런 게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대에 다시 태어나버려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대란 대개 격동의 시대다. 기존 질서는 무너졌는데 새로운 질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아 혼란과 시행착오, 긴장과 고난이 지배하는 시대. 그런 시대에 태어나 고생 좀 실컷 해보라는 저주이겠다.

    작년에 우리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이 저주의 당사자임을 깨달았다. 우리 시대가 바로 격동의 시대임이 드러난 것. 지구 행성 전체를 뒤덮은 미국 발 금융 위기라는 신호탄의 작렬 앞에서 이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좌파 재구성은 대중운동 폭발 없이 힘을 얻을 수 없다. 그리스 청년봉기 사진.

    격동과 저주

    그리고 불과 3개월 뒤, 세상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다. 벌써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차라리 학살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고, 한때 이라크에 ‘정의’의 응징을 가했던 그 나라들은 학살자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저 사태를 방관하기만 할 뿐이다.

    영국 태생의 저명한 좌파 작가 존 버거는 가자 침공이 ‘방어전’이라고 우겨대는 이스라엘의 논리를 너무도 간단명료한 목숨 값의 교환 법칙으로 요약했다. ‘이스라엘인 한 명의 목숨 값 = 팔레스타인 사람 300명’.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교환 법칙이다. 하지만 마치 전혀 생소한 일인 양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이해하기 힘든 게임 규칙들이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금융 위기의 폭발을 통해서도 밝혀진 공공연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와 전쟁, 아니 민간인 학살은 우리 시대, 이 격동의 시대의 두 얼굴이다.

    격동의 시대, 혼돈에 빠진 좌파 정치

    운동권 초보 교양 과정 수준의 상식으로 바라보면, 이러한 시대일수록 진보좌파에게는 기회일 것만 같다.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서 새로운 시대의 등장을, 혹은 어떤 ‘좌파적’ 계기를 찾고자 한 이들의 마음속에 자리한 것도 이러한 상식의 실현에 대한 낙관이었으리라.

    하지만 상황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좌파’임을 자부하는 정치세력의 상당수가 혼돈의 한 가운데에 스스로 발을 담그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을 주도하는 것은 우파 카디마당만이 아니다. 군사 명령의 1차 책임자인 국방장관은 바로 이스라엘 노동당(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속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소속의 에후드 바라크다.

    고든 브라운의 영국 노동당 정부는 금융 위기에 대한 기민한 대응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영국 경제가 금융 위기에 취약하도록 만드는 정책을 앞장서서 펼쳐온 것은 다름 아닌 노동당(혹은 스스로 칭하는 대로 ‘신노동당’) 정부 자신이었다.

    그것은 블레어 노선이었다고, 그것은 이제는 과거지사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그 당시 재무장관이 고든 브라운 자신이었음을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 있겠는가?

    독일에서는 사회민주당이 대연정을 통해 앙겔라 메르켈의 기독교민주연합과 집권 책임을 함께 나누고 있다. 물론 사회민주당은 메르켈 총리의 정책들에 대해 간혹 비판적인 언사를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중 상당수가 슈뢰더 총리 시절 사회민주당 자신이 추구하던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언사는 그저 립 서비스로 들릴 뿐이다.

    자본주의에 너무 깊이 연루된 세계 좌파

    자본주의 중심부만 그런 게 아니다. 칠레에서는 민주화 이후 장기 집권해온 ‘콘세르타시온’(기독교민주당, 급진사회민주당, 민주주의를 위한 당, 사회당으로 이뤄진 상시적 정당연합)의 재집권 전망에 어두운 구름이 끼어 있다.

    피노체트 정권의 적자임을 자임하는 우파 세력의 지지율이 급성장하고 있다. 피노체트의 경제 정책 틀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집행해온 집권 좌파로서는 이러한 전세를 역전할 무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세계 각국의 좌파 정치세력들 중 상당수가 그간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움직임에 너무나 깊이 연루돼왔다. 그래서 막상 세계 자본주의에 위기가 닥치자 위기의 대안으로 나서기는커녕 그 한 주역임을 드러내며 혼돈의 격류에 휩쓸리는 실정이다.

    유독 중요한 선거가 많은 2009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선거에서 기존 주류 좌파정당들이 어떤 성적을 거둘지가 그다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월에는 남아공에 대통령 선거가 있고, 5월에는 인도에서 총선이, 6월에는 유럽의회 선거가, 9월에는 독일과 노르웨이에서 총선이 있다. 또한 10월에는 우루과이에서 대선이 있고 두 달 뒤인 2009년 마지막 달에는 칠레에서 대선이 있다. 일본도 9월 전까지 중의원 선거를 치러야 한다.

    물론 과연 독일 사회민주당이 자당 주도의 새로운 연정을 구성할 수 있을지, 혹은 노르웨이 노동당이 재집권할 수 있을지, 우루과이와 칠레에서도 좌파정부가 지속될지 등에 대해 관심이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허나 이런 변수들이 과연 우리 시대의 위기 양상을 교정하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제도 정치가 삶의 위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질적 처방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냉소주의만 더욱 부추기는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

       
      ▲경찰에 화염병을 던지는 그리스 시위청년 모습. 

    “하나, 둘, 더 많은 그리스를!”은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고 변화의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좌파 정치세력 자체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들로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 주자가 독일 좌파당과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이다. 둘 다 좌파의 재구성을 천명하고 있고, 모두 해당 국가에서 일정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성격은 서로 조금 다르다.

    독일 좌파당은 사회민주주의 좌파부터 구 공산당, 트로츠키주의 분파들까지 포괄하고 있다. 자본주의 반대를 천명하고 사회민주당의 우경화를 준열히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은 아니다. 당 안에는 오히려 개혁적 사회주의의 정통을 견지하기 위해 사회민주당을 탈당한 흐름과 혁명적 사회주의의 후계자들이 공존하고 있다.

    반면 프랑스의 반자본주의 신당은 대중정당이면서 동시에 혁명정당을 지향한다.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혁명적 공산주의 동맹’(LCR)이 중핵 역할을 맡고 있으며, 사회당이나 공산당 등 기존 좌파정당에서 탈당한 흐름은 결합하지 않고 있다.

    각각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모델이 더 바람직하다고 지금 당장 평가하기는 힘들다. 다만 필자의 관심은 독일 좌파당 쪽에 더 기울어져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독일 좌파당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최근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급진좌파정당들, 가령 네덜란드의 사회(주의)당,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좌파당, 아이슬란드의 좌파녹색운동 등과도 공유하는 바가 많다.

    주목되는 유럽좌파당

    9월 독일 총선에서 좌파당이 어느 정도까지 약진할 수 있을지(지금으로서는 15% 정도를 예상한다)도 관심거리이지만, 독일 좌파당을 비롯해서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재건당, 스페인의 통합좌파, 그리스의 ‘생태 및 운동 좌파 연합’이 유럽 차원의 단일 정당으로 결성한 유럽 좌파당이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도 주목할 만하다. 유럽 좌파당은 유럽의회 내 원내교섭단체 수준을 넘어 대중정당 수준에서 유럽 단일 정당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다.

    유럽뿐만 아니라 다른 대륙에서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좌파정치 내부의 도전과 격변이 나타나고 있다. 가령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일정하게 좌경화하자 그 내부의 우파가 탈당하여 새로운 정당을 건설했다. 이것이 ANC가 과거의 신자유주의 정책 노선과 더욱 확실하게 단절하는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우루과이에서도 집권 좌파정당인 ‘확대전선’ 내에서 타바레 바스케스 현 대통령의 사회자유주의적 노선을 이어받으려는 세력과 이에 반발하는 세력이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격돌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좌파 재구성은 대중운동의 폭발 없이는 힘을 얻을 수 없다. 그 점에서 좌파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지배 세력, 기득권 엘리트들의 관심은 작년 말 그리스를 덮쳤던 것과 같은 대중의 도전이 과연 자신들에게도 예정된 운명인지 여부에 쏠려 있다.

    선거 일정과는 달리 이것은 결코 그 누구도 점괘 풀듯이 미리 내다볼 수 없다. 그래서 필자 역시 이 짧은 글 안에 그 전망까지 담을 수는 없다. 하지만 위에서 다룬 예측 가능한 정치 일정들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 시대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은 “하나, 둘, 더 많은 그리스를!”의 실현 가능성에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결국은 언제나 그랬듯이 대중의 각성 없이는 일이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 없이 새로운 시대는 열릴 수 없다. 2009년은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하게 이 진실을 다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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