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나만 구속되지 않은 이유들
        2009년 01월 02일 09: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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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글에서 밝혔듯, 나는 프락치 혐의를 받을 당시에 덤덤하게 받아들였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대응했다. 글을 쓸 때도 그랬다. 흘러간 이야기로 치부하며 감정의 기복 없이 편하게 글을 썼다.

    의지에 눌린 감정들

    조그마한 갈등은 있었다.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의미를 두면서 기억하지 않을 것이고,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끄집어낼 필요가 있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레디앙>에 글이 올라간 후, 나는 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에, 또 글을 써서 보낼 때까지도 흔들림이 없었는데, <레디앙>에 뜬 내 글을 검색하며 나는 아팠다. 쓸쓸하고 외롭고 슬픈, 서글픔이 물밀듯 밀려와 이틀 동안 신음했다.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몹시 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운동가로서, 연약한 심성을 들킬까봐, 그래서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전선에서 이탈할까봐, 의지가 감정을 철저하게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렇지 않다고 한 것은 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었고, 스스로를 향한 끊임없는 주술이었다.

    노동운동에 심어진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내가 받았던 혐의다. 그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노-자(정) 대립이 격렬하고, 대의원대회조차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공개 전술과 선봉대의 화염병으로 사수해야 하는 전노협 시절에는 심각한 문제였다. 정보기관이 프락치를 활용해서 터뜨린 조직사건도 여럿 있었다.

    나는 전노협 쟁의부장과 조직부장 등의 역할을 하면서 선봉대를 담당했다. 각종 투쟁의 비공개 전술을 기획하고 투쟁현장에서는 야전사령관 역할을 하는 직책이었다. 지도부와 수배자의 행사장 진입과 퇴로를 안내하는 직책이었다.

    주문을 걸고 살아온 15년

    은밀하게 진행되는 전노협 행사를 원천봉쇄 하도록 만들거나, 단병호 위원장 같은 1급 수배자들을 정보기관에 넘길 수 있고, 투쟁전선의 최선봉에 선 선봉대 동지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가 프락치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혁명시기라면 그 혐의만으로도 즉결처형을 당할 수 있는 그런 위치였다.

    단병호 위원장이 그 말을 믿고 나를 수행에서 제외시켰으면 어찌 되었을까. 현대중공업 동지들이 그 말을 믿고 나를 배척했으면 또 어찌 되었을까. 또 당시 그 말을 들었을 많은 동지들이 선봉대 담당을 바꿀 것을 주장했다면 나는 어찌 되었을까.

    정보기관과 당사자만의 은밀한 관계로 형성되는 프락치 활동의 특성 상, 프락치 혐의라는 것은 결정적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확인이 불가능한 것이다. 프락치 혐의가 전노협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순간, 나는 구석으로 몰리고 매장되었을 수 있다. 혐의가 벗겨지더라도 나는 치욕을 견디지 못하고 전선에서 방황했을 수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억압하고 통제했던 것이다. 진짜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아무렇지 않다는 주문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내 자신이 처량했다.

    지난 글에서 못 다한 두 개의 근거가 남았다. 하나는 안양병원에서의 박창수 열사 투쟁 때, 내가 구속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다.

    내가 그때 구속되지 않은 이유

    1991년 5월 6일, 용두동 전노협 사무실에는 청천벽력의 소식이 전해졌다.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이 안양병원에서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박창수 위원장은 노태우 정권의 전노협 탈퇴공작을 거부하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안기부 직원의 거듭되는 탈퇴 회유와 협박에 자해를 하고,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전노협과 노동운동진영은 즉각 안양병원에 집결해서 영안실 사수투쟁에 돌입했다. 다음 날 노태우 정부는 백골단을 앞세우고 물대포와 해머 등을 동원해서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했다. 또한 항의하는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영안실 벽을 부수고 들어온 백골단. 

    박창수 열사의 가족과 남상헌, 박순희, 김문수, 김창우 등 10여명이 안양병원 6층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병원 마당에서의 항의투쟁과정에서 얻어맞고 기절했던 나도 응급실에서 6층으로 합류했다.

    경찰은 6층을 호시탐탐 노렸고, 농성자들은 투신하겠다는 배수의 진을 치고 버텼다. 경찰이나 정보원이 올라오면 삽과 소화기 등을 휘두르며 구타를 해서 내쫒기도 했다.

    5월 9일 밤, 대책위에서 보낸 변호사가 농성장에 올라왔고 논의를 통해, 다음 날 농성을 자진 해산하기로 했다. 가벼운 논쟁이 있었지만 가족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농성자들의 신변을 보장하겠다는 전언도 있었다. 그 결정을 한 뒤, 나는 변호사를 따라 먼저 내려왔다. 1층 입구의 경찰에게는 변호사 사무실 직원이라고 속였다.

    중환자실의 아버지

    내가 먼저 내려온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아버지는 순천향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자진해산이라는 결정과 신변보호 약속이 먼저 내려오는 나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남상헌 지도위원의 재촉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경찰은 농성자 가운데 전노협 사무총국의 기길동, 이병학, 김종배와 부산노련 선봉대장 고현석을 구속했다. 나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으면 구속이었다.

    나는 사무총국 동지 몇몇과 경찰서로 구속자 면회를 갔고, 그들은 나에게 조심하라고 했다. 경찰이 “삽을 들고 설치면서 직원들을 가장 심하게 두들겨 팬 사람을 찾는다.” 고 했다.

    그 후 경찰은 내가 6층에 있었다는 심증을 굳혔고, 언론을 통해서는 수배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나는 그 건으로 구속되지 않았고 사건은 유야무야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근거였다. 경찰이 구속할 것을 미리 알고 먼저 내려간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그런데 이 근거는 오히려 많은 동지들이 나의 프락치 혐의를 동의하지 않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그 시대는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경찰을 두들겨 패는 것으로 잘 구속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가 사진이 찍히고 연행이 되어도 잘 구속되지 않았다.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화염병을 던지는 것이 집회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전노협과 사노맹

    세 번째 근거인 사노맹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다. 1990년 10월 사노맹 중앙위원 남진현을 비롯한 54명이 검거되었다. 전노협 선전부장 차익종은 곧바로 지하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사노맹의 전노협 책임자였고, 나의 지도선이었다.

    얼마 뒤, 차익종은 나에게 말했다. “압수당한 남진현의 컴퓨터에서 약어로 된 전노협 그림이 나온 것 같다. 도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도피할 수 없었고, 구속되더라도 남아 있겠다고 했다.

    안기부 손에 있는 문서가 실명이 아니라면 1987년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고문당할 때처럼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가입원서를 쓴 정조직원이 아니고 후보였기에 감옥살이를 많이 하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도피를 위해 전노협을 그만두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는 것도 판단의 한 근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은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였다. 운동한답시고 아버지 가슴에 대못질만 했는데, 갑자기 사라지면 아버지가 눈을 편하게 감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구속되더라도 아버지의 장례를 위한 귀휴는 가능하지 않겠냐는 판단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며 나는 눈물을 쏟았고, 나를 설득하지 못한 차익종 선배는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그 뒤 92년 4월 백태웅, 차익종 등이 구속되면서 사노맹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많은 동지들이 구속되었으나, 나는 그 때도 구속되지 않았다.

    지난 연말 차익종 선배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내가 왜 구속되지 않았는지 물었다. 차익종 선배가 말했다. “남진현의 컴퓨터에 있던 전노협 내용에 대해 안기부에서 큰 비중을 두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이 나의 프락치 혐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나 마음 깊은 곳의 슬픈 상처

    나는 이번 글을 통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던 슬픈 상처를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프락치 혐의를 씌웠던 그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에게 사과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들을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내 뜻이나 행동과 무관하게 그들이 나를 그렇게 의심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또한 그러한 식의 프락치 혐의 씌우기는 시대의 아픔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의 아픔이 아니었다. 레디앙에 글이 뜬 뒤에 어떤 술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그녀는 운동가가 아니지만, 훌륭한 관점과 시각으로 진보운동에 힘을 보태는 사람이다.

    “실은 나도 프락치 혐의를 받았어요. 가두시위에서 경찰에 붙잡혀 동료들은 모두 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나는 현장에서 풀려났어요. 학교 동료들이 나를 프락치로 의심했고, 그래서 학생운동을 그만 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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