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신세 조진 거 아니거든요"
        2009년 01월 02일 08: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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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몽룡이 성춘향에게 반해 함께 사랑을 나누고자 애가 달았던 나이가 이팔청춘, 열여섯이었더란다. 춘정에 겨운 두 사람이 어른들 몰래 치른 첫날밤을 춘향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춘향의 허리를 안고 상하의복을 모다 벗겨 병풍 위에다 걸떠리고 도련님도 옷을 벗고 꼭 끼고 누웠으니 좋을 호(好)짜가 절로 된다. 베개가 위으로 솟구치고 이불이 발치로 벗어지고 침병이 뒤처질 제 뜬 눈으로 날을 새이니 동방이 희번이 밝어온다.’

    춘향전과 <과속스캔들>

       
      ▲영화포스터.

    이후로 제대로 합법적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한 두 사람을 둘러싼 우여곡절과 결말은 한국문화에서 지고지순한 사랑의 원형으로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그러니 춘향전 문화의 자장 아래서 자란 <과속스캔들>의 남현수가 중3 때 딱 한 번 겪었던 일의 결과로 느닷없이 찾아온 딸을 만난다거나, 그 딸 정남/제인이 고1 나이에 ‘반항 대신 임신’을 해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나타난다는 것이 영 생뚱맞은 날벼락이라고만 할 일은 아니다.

    몽룡이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급제하고 어사출두를 하기까지 관계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춘향이 지고 고초를 겪어야했듯, 현수의 첫 경험 상대는 홀로 딸을 낳고 키웠다.

    그 딸도 역시 자기 행위의 결과를 감당하느라 미혼모로 살면서 아이의 생부 대신 자신의 생부를 찾아온다.

    그리고 미혼모도 꿈은 있노라며 행복을 찾으려 하는데 그 과정이 스캔들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맺고 푸는 소동을 보여주는 코미디가 2008년 한국영화계의 암울한 기록에 모처럼 웃음거리를 만들고 있다.

    <과속스캔들>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2008년은 혼전 임신에 대한 영화들을 겪었다. 먼저 아카데미 각본상을 비롯해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주노>. 미국의 열여섯 살짜리 여학생 주노는 자발적으로 첫 성경험을 시도하고, 성공한다. 주노가 경험하고자 한 것은 연애가 아니라 성경험이었고, 나름 상큼하게 목적을 이루지만 아뿔싸! 예정에 없던 임신을 하게 된다.

    영화가 혼전 임신을 다루는 방법들

    낙태시술이 큰 논란거리가 아닌 한국이 아니라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자의 낙태 허용 여부에 대한 입장이 당선 가능성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나라 미국에서 청소년의 임신은, 낳느냐 지우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키울 것이냐의 문제가 된다.

    열애의 대상이 아니라 첫경험 상대로 무난해서 점찍고 일을 치른 남자애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두고 신세 망쳤으니 책임지라고 한다거나, 우리 집안 핏줄이니 부모님이 알아서 키워달라고 하는 대신 주노는 아이의 부모를 찾아주겠다고 나선다.

    주노가 처음 뱃속 아이를 위해 찾아주려던 건 완벽한 가정이었다. 생활 수준이나 문화 수준, 부부 사이 금슬까지 다 좋은데, 딱하나 아이가 없어 행복을 완성하지 못한 중산층 부부 마크와 바네사를 찾아낸 주노의 행보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막상 출산이 임박하자 불거진 문제는 내 속으로 낳은 자식 남에게 주지 못하겠다는 주노의 모정도 아니고, 남의 손에 우리 핏줄 못 보내겠다는 주노나 남자애의 집안도 아니다. 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나섰던 부부 중 록밴드며 호러영화까지 주노와 문화적 감성을 공유하던 예비 아빠 마크가 갑자기 나동그라진다.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이 아이 하나로 흐트러질까 두렵고, 아이가 있는 단란한 가정을 소망하는 완벽한 아내를 숨막혀 하며 남자가 떠나버린 후, 주노의 아이를 손꼽아 기다리던 예비 엄마 바네사는 절망한다. 이제 주노는 이런 파탄 난 가정에 아기를 주려고 하지 않으리라고, 남편도 잃고 희망도 잃은 채 오직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어 하는 바네사에게 주노가 다가간다.

    양육 그리고 ‘정상적’ 가정

    ‘바네사, 당신이 아직 거기 있다면 저도 아직 여기 있어요.’라는 주노의 쪽지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소위 ‘정상적’ 가정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자세와 사랑을 쏟는 데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가짐에 있다는 것을 새삼 분명히 한다.

    그래서 아이는 준비된 엄마 품에 안기게 되고, 준비된 엄마 바네사는 충만한 행복으로 웃음 짓고, 주노는 첫 성경험의 상대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신의 나이에 맞는 관계를 맺는다. 열여섯 소녀의 혼전 임신을 통해 소녀와 주위 모든 사람이 겪는 성장이 영화를 흐뭇하게 만든다.

       
      ▲영화 포스터. 

    <주노>보다 한 주 늦게 개봉된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도 역시 혼전 임신을 다루지만 여기서는 성장이나 행복이 아니라 불편하고 서글픈 현실이 어두운 화면보다 더 마음을 그늘지게 만든다.

    <밀양>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던 해에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마니아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1987년. 루마니아 혁명 2년 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시기 루마니아에서 낙태는 불법이었다. 그러나 어떤 혹독한 규제와 처벌도 젊은 남녀의 이끌림을 막을 수는 없고, 혼전임신 역시 막을 수 없는 일일 터.

    여학교 기숙사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고, 부산하게 짐가방을 꾸리고, 시험공부를 걱정하고, 돈을 빌리러 다니는 이십 대 초반의 여대생 가비타와 친구 오틸리아를 따라다니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들고찍기로 인물에게 바짝 따라 붙지만 정작 그 불안의 원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삼십여 분이 지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불법 낙태 시술이 그 모든 불안과 초조의 배경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낙태율의 정치학

    시골에서 올라 와 기술학교를 다니는 가난한 형편에다, 남녀 간에 함께 했을 성행위의 책임을 임신이라는 육체적 굴레로 감당해야 하는 젊은 여학생에게 기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그 아가씨들의 육체 자체가 참 비루하다. 생리 중이든 바로 낙태 시술을 앞두고 있든 모자란 낙태 시술비용을 몸으로 때워야하는 겨우 그 정도 주변으로 사랑이라니……

    불법적으로라도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임신한 기간을 2개월이니 3개월이니 얼렁뚱땅 넘겨버리는 가비타에게 시술자는 말한다. 3개월까지는 낙태지만 4개월부터는 살인이니 잘 생각하라고. 그래도 낳을 수 없는 아이를 없애려거든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그래서 두 친구는 마련할 수 없는 돈을 몸으로 대신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 카메라는 낙태 당사자인 가비타가 아니라 친구 오틸리아에게 집착한다. 친구의 낙태를 지켜보는 입장에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오틸리아의 고통을 관객더러 지켜보라고 요구한다.

    이런 일은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러니 혼자 두지 말고 곁에서 함께 감당하라고. 그러나 그걸 감당하기에 현실은 너무 잔혹하고, 낙태 뒤에 찾아오는 공복은 지독하게 치욕스럽다. 그래서 영화는 불현듯 끝나버린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의 루마니아는 이미 낙태가 합법화된 시기였다. 이 시기 루마니아의 낙태율은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1989년 차우셰스쿠 처형 이후 가장 먼저 취해진 조치가 낙태 합법화였던 까닭은 독재정권이 생명존중 의식 때문이 아니라 인구를 국가 자산으로 물화시켰던 데 대한 반작용이다.

       
      ▲영화의 한 장면. 

    <과속스캔들>의 당당함과 발칙함

    유신시절, 한국에서는 ‘둘만 낳아 잘기르자’에서 ‘대책없이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를 거쳐 ‘둘도 많다’까지 출산을 조절해서 인구를 적절한 국가자원으로 물화시키려는 표어가 넘쳐났다. 낙태를 부추기는 사회였고, 정관수술을 받으면 예비군 훈련을 면제해주기조차 하는 어처구니없는 조치가 버젓이 시행되곤 했다.

    그러다 지금 출산율이 바닥을 치자 현금에서 출산준비물까지 이런저런 당근을 내밀며 아이를 낳으라고 온나라가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이미 낙태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더구나 독신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천시하고, 합법적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라도 그 양육을 온전히 부모만이 감당해야 하며, 이혼가정이나 부모없는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사회가 함께 하지 않는 현실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과속스캔들>은 어린 나이에 미혼모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엄마도, 나도 신세 조진 거 아니거든요’라고 대드는 당당함과 발칙함으로 웃음을 끌어내지만 딱 거기까지다.

    필요해서 찾아간 아버지는 딸을 파렴치하게 버린 게 아니라 생긴 줄도 몰랐어야 하며, 마침 새로운 가정을 꾸리지 않은 홀몸이어야 하고, 오갈 데 없는 미혼모 딸과 손자를 거둘 경제력도 있어야하고, 그렇게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받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받아야 한다. 연달아 로또 너댓 번 당첨될 확률보다 드문 기적같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영화고, 그러니까 코미디라고 넘겨버리고 말 일이 아니다.

    몸이 다 자라고도 한 몫의 사회적 어른이 되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 성에 대한 유혹과 접근 경로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는데 그걸 감당할 제도도 의식도 전혀 준비하지 못한 채 억누르기만 한다고 문제가 안 생기는 건 아니다.

    <과속스캔들>의 정남/제인이나 기동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웃음 지을 수 있었다면, 그 아이의 성이 엄마 성을 따서 황씨면 어떻고, 아빠 성을 따라 남씨가 되면 또 어떤가.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이 사회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면 출산장려금이나 출산용품 보따리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코미디보다 세상이 더 따뜻하기를 바라는 건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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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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