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가 다가오고 있다
        2008년 12월 29일 08:5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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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사망한 가자지구(gaza strip)의 한 어린이를 보며 울부짖는 아이들 

    어제와 오늘, 노르웨이 일간지에서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맹폭으로 죽은 아이들의 시체 사진들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과 계속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우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해줄 것이니 인간은 본래 선심"이라고 한 맹자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입니다.

    성현을 보고 ‘거짓말쟁이’라 하기에 뭐하지만, 어쨌든 ‘거짓에 가까운 과장’이라고 하면 맞을 듯합니다. 인간에게 분명히 선심도 내재돼 있습니다. 그러나 선심 말고 더 내재돼 있는 온갖 욕망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겁을 낼 줄 아는 동물

    예컨대 공포 말씀입니다. 굳이 인간을 규정하자면 ‘겁을 낼 줄 아는 동물’, ‘겁쟁이 동물’이 제일 정확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 과연 무엇인가요? 죽음이라 하겠지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게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예컨대 전장에서 극복한 사람들이야 고금동서의 역사에서 부지기수입니다.

    사실, 신라 7세기의 소나나 죽죽, 관창처럼 적진에 홀로 쳐들어가 겁없이 수많은 적의 머리들을 베어버리고 선혈이 낭자한 그 현장에서 장렬하게 죽는 혈기왕성한 젊은 전사란, 인간 보편의 남성성의 이상형 중의 하나입니다. ‘죽음을 겁내지 않는 젊은 전사’…

    그러한 서사시가 없는 세계의 종족 하나를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없습니다다, 없어요. ‘나’의 소속 집단, ‘나’의 가족과 애인, ‘나’의 소속 집단의 수많은 여인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다른 남성을 멋있게 때려눕힐 수 – 내지 적대적 집단의 남성을 죽일 수 – 있다면 죽음의 가능성을 각오하고서도 앞으로 ‘돌진’할 남성들이 많을 것입니다. 통증도 죽음도 공포스럽긴 하지만 제일 공포스러운 게 아닙니다.

    ‘공포 많은 동물’, 인간에게 제일 공포스러운 게 소속 집단으로부터의 축출입니다. 굶어죽을 것 같아서만 아닙니다. 사실, 예컨대 지금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만행을 지켜보다 못해 어떤 이스라엘 지식인이 "나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이민 수속을 시작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국적 포기 의사를 밝힌다면 그가 꼭 굶어죽는 것은 아닐 듯합니다.

    가장 공포스러운 일

    예컨대 IT쪽 사람이면 다른 나라에서 족히 일을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에 징집을 거부하려는 젊은이가 여기 노르웨이에 와서 망명을 신청할 경우에는 그를 받아줄 가능성도 높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대한 노르웨이인들의 분노의 정도로 봐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모태, 우리의 소속 집단을 그렇게 쉽게 팽개치지 못합니다. 소속 집단이 미친 짓을 골라서 한다 해도, 그게 마음에 거슬려도 그냥 침묵하고 "통과"하면서, 넘어가고 맙니다. ‘나’의 양심보다 소속집단의 위력이 더 큰 것입니다. 생화장된 아이들의 시체를 봐도 그래요. 맹자의 내재적 선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나’와 ‘나의 집단’을 끈끈하게 연결시켜주는 끈이란 결국 고립, 외로움에 대한 공포라고 봅니다. "어진 이가 외롭지 않다"는 성인의 말씀이 계시지만 우리는 대개 어질지도 못하고 어짊이란 뭔지도 잘 기억 못합니다.

    온 천하가 미쳐도 ‘나’ 혼자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 바로 어짊이지만, 그런 이들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적어집니다. 예컨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감옥에 있으면서 한 번도 황궁을 요배하지 않았던 – 작년에 서거하셨던 – 일본 공산당의 미나모토 겐지(宮本顕治) 선생은 분명히 어진 구석이 있었어요.

       
      ▲ 미나모토 겐지의 장례식

    온 나라가 ‘영미 귀축’을 규탄하는 소리로 가득 차도 그가 감옥의 독방에서 혼자서 ‘전쟁 반대, 만국 노동자 단결’의 정신을 간직한 것입니다. 군국의 ‘비국민’이 돼서도, 군국의 무리로부터 추방되어서도 말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공포

    그러나 그는 외롭지 않았어요. 위로는 투쟁에서 먼저 전사한 선열들의 영(靈)이 게셨고, 좌우로 세계 만방의 감옥에서 동시에 고생하는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아래로 언젠가 자본주의의 지옥의 문을 파(破)할 후배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외로움이 절로 없어졌을 것입니다.

    선열, 동지, 후배에 대한 믿음, 언젠가 지옥의 문이 무너지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비국민’ 선고를 받아도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어짊이란 결국 그러한 유의 믿음에 기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종교인이란 바로 언제나 자신의 믿음이 명하는 바대로 자신의 소속집단에 "아니오"라고 하여 따로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민족이든 국민이든 그 어떤 정파나 종파든, 바르지 못한 일을 하는 집단보고 "너네들이 틀렸다"라고 하여 가버릴 수 있는 사람,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나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나 예수처럼 ‘외로움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인간들은 요즘 이스라엘에서 많이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공포의 바다가 이스라엘의 혼을 잠기고 말았습니다. 근대와 민족국가가 가져다준 ‘발전’인 모양입니다.

    "나는 두려워한다, 고로 나는 산다." 이건 근대의 제1원칙입니다. 이스라엘이 시온주의의 광신도의 나라라고 보시면 오판입니다. 광신도들도 많지만 대다수는 군대라는 국가의 기축 집단이 하는 일에 대해 감히 토를 달지 못하는 순응주의적 겁쟁이들뿐입니다.

    불가능한 범죄는 없다

    즉, 이 시대의 일반적인, 너무나 일반적인 인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열강 대다수는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열강들의 지배자들이 때가 왔다 싶으면 이 겁쟁이 무리들 보고 서로 박살내기를 명할 것이고, 그 때에 가서 그 명령을 거부할 이들이 또 극소수일 것입니다.

    나머지 대다수는 집단에 대한 공포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시 한 번 극복할 것이며, 인간으로서 불가능할 범죄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것입니다. 사실, 여태까지의 인류의 역사를 보면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진리인데 말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 기적적으로 들고 일어나 지옥의 문을 파(破)하는 쪽으로 같이 가지 않는다면 머지 않은 미래에 새로운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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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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