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너 프락치지?"
        2008년 12월 28일 12: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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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해를 평가하고 새해를 설계하는 연말이다. 대다수 사람이 평가와 설계는 뒷전인 채 술독에 빠져 심신을 갉아먹고 있겠지만, 어쨌든 송구영신한다는 연말이다.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이 여러모로 복잡한 시기다. 그래서 이번 글은 가볍게 넘어가려 한다. 나와 관련된 이야기다.

    내가 받은 그 숱한 혐의들

       
      ▲ 필자

    나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숱한 혐의를 받아왔다. 사노맹 때는 극단주의, 좌익편향 등의 혐의를 받았고, 중앙파 구성원이 되고서는 패권주의, 개량주의, 기회주의, 사민주의 등의 혐의를, 민주노동당 분당 때부터는 종파주의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 때는 낙인찍히는 것에 대해 분노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딱지를 붙이는 그들의 행위와 실천이 과연 나에게 그런 딱지를 붙일 만큼 신실한가, 하는 점에서 의구심을 버릴 수 없지만…….

    하지만 내가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노동운동가로서의 나의 삶이 나의 뜻과 무관하게 중도하차할 수 있었던, 그런 이야기다. 나는 한 때 어떤 집단에 의해 프락치로 의심받았었다.

    한국 현대운동사에서는 한 정파가 다른 정파를 향해 미국CIA 첩자라고 했던 일이 있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한 NL그룹이 민중의 독자후보를 주장하며 백기완 후보를 내세운 제헌의회파와 일부 PD그룹을 향해 미국CIA 첩자로 비판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오늘 나의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다.

    장면 1.

    1993년 어느 날, 단병호 위원장 수행을 마친 민동원과 나는 소주잔을 기울였다. 당시 전노협 쟁의부장이었던 나와 서노협 쟁의부장 민동원은 현총련 파업 건으로 수배된 단병호 위원장 수행임무를 맡고 있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민동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단 위원장님 수행하는 것에 대해 ***위원장이 반대했다.”
    “……. 왜?”

    민동원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위원장이 단 위원장에게 “한석호는 프락치로 의심 간다는데, 수배 중인 단 위원장의 수행을 맡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면서, 다른 사람으로 바꿀 것을 권고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단 위원장은 “구속되어도 내가 구속되는 것이니, 한석호에게 계속 수행을 맡기겠다.” 고 했다.

    화내고, 슬퍼하고, 어이없어 하고

    장면 2.

    사귀는 여성과의 결혼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있던 1995년 어느 날이었다. 결혼을 하기로 한 그녀가 힘들게 말을 꺼냈다.

    “###이 나에게 한석호와 사귀지 말라고 했어요. 프락치이기 때문이래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던 그녀는 ###에게 소문의 진원지를 물었고, 그 소문의 진원지가 000이란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그리고 000을 만나서 따져 물었다고 했다.

    장면 3.

    1998년 어느 날, 울산의 한 술집에서 나는 현대중공업의 윤재건, 김원필 등과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그 때 재건 형이 말했다.

    “석호야,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000이 너랑 어울리지 말라고 했었다. 석호 네가 프락치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 말 믿지 않았고,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말라고 했었다.”

    나에게 그 말을 할 때, 민동원은 화를 냈고, 그녀는 슬퍼했고, 재건 형은 어이없어 했다. 그들은 그런 류의 이야기가 한석호에게 치명타를 줄 것이라고 판단하며 무척 걱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운동가로서 나의 삶, 그리고 내가 속한 전노협 입장에서, 그것도 노-자 간 대립이 격렬했던 당시 노동운동 상황에서,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운동을 하면서 프락치로 지목되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었고, 실제 프락치에 의한 국가보안법 조직사건도 많이 있었다. 그런 소문은 한사람의 노동운동가를 전선에서 배제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담담하게 그러려니 했다. 나는 당시 누가 나에게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하면 몹시 불쾌해 했지만, 그보다 더 치욕스럽고 위험한 프락치 혐의라는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소문의 진원지인 000에게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지금까지만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라도 프락치가 될 소지가 있는가.” 라는 화두를 놓고, 내 자신의 행동과 마음을 분석해 보았다. 아무리 분석해도 그럴 소지가 없었다. 나는 현장과의 결합력이나 역할을 종합할 때, 그런 소문 정도는 가볍게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파 이해가 결부되어 있다는 판단도 했다.

    전노협 사무총국 차원에서도 관련 논의는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 비공식적으로 이야기를 했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수배 중인 자신의 수행으로 한석호를 포기하지 않은 단병호 위원장의 판단이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현대중공업 현장 활동가들도 나를 배척하지 않았다.

    "나중에 술 한잔 하지, 내 사과할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99년 초, 나는 소문의 진원지였던 000에게 “그 때 왜 그렇게 판단했었냐.” 고 물었다. 내가 그 말을 끄집어낼 줄 몰랐던 그는 순간 당황하고 미안해하면서 이유를 설명했다.

       
      

    전노협 초기에 내가 안기부 담당을 만났던 것이 근거였다. 박창수 열사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뒤 안양병원에서 투쟁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격렬하게 투쟁했던 내가 구속되지 않은 것도 근거였다. 사노맹 사건이 터졌는데 구속되지 않은 것이 세 번째 근거였다.

    나에게 프락치 혐의를 씌운 그의 판단은 틀렸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었겠다.” 나는 말했다.
    “나중에 술 한 잔 하자. 그 때 정식으로 사과할게.” 그가 말했다.

    그는 술 한 잔 사겠다고 했고, 나는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지켜지지 못했다. 두 사람의 뜻과 전혀 무관하게, 영원히…….

    안기부 직원을 만나다

    이 글을 마치기 위해 그 혐의의 근거들에 대해 쓰고자 한다. 먼저 1990년 초 안기부 직원을 만났던 이야기다.

    나는 1990년 1월 22일 전노협 출범과 함께 선봉대 담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운동 시절의 내가 속한 학교를 담당했던 안기부 직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박종철 열사가 죽기 1주일 전인 1987년 1월초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고문당했던 기억과 당시의 격렬한 노동운동 상황은 나를 망설이게 했다. 계속 연락이 왔고, 나는 까짓것 별일이야 있겠냐는 마음으로 약속에 나갔다.

    만나러 나가는 날 당시 전노협 김준용 사무차장에게 말했다. “내가 여차저차해서 누구를 만나러 가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뒤처리 부탁합니다.”

    약속 장소인 청량리 맘모스 호텔 2층 커피숍에 갔더니, 처음 보는 사람이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전노협 담당 안기부 직원이었다. 그가 나에게 말했다. “집안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노협 회의 자료와 결과 등의 정보를 넘겨주면, 매달 얼마의 돈을 통장으로 넣어주겠다.”

    "집이 어렵다면서요?"

    만남이 끝나고 전노협 사무실에 돌아간 나는 김준용 선배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형님, 안기부가 다시는 그런 장난을 치지 않도록 뭔가 대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는 말도 덧붙였다. 김준용 선배는 그 직원을 알고 있다면서 씩씩댔고,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다. 그 뒤 다시는 내게 그런 전화나 제안은 없었다.

    나는 사무총국 많은 사람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그런 제안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것이 뒷날 나의 프락치 혐의의 한 근거가 되었다.

    그 일이 다른 근거와 연결되면서 앞뒤 이야기는 모두 빠진 채, 안기부 직원과의 만남만이 남은 것이었다. 한석호가 그 제안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사무차장에게만 조용히 보고하고 처리했으면 그렇게까지 연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행동은 옳았다. 그런 문제는 될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떠들고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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