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야유
    2008년 12월 28일 1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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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경동 시인. 

시를 쓸 수 없다
5류지만 명색이 시인인데
꽃이나 새나 나무에 기대
세사에 치우치지 않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

자리에만 앉으면
새들도 둥지를 틀지 않을 곳에서 목을 매단
이홍우 동지를 위해
겨울 바닷가 조선소 100m 공장 굴뚝에 올라
며칠째 굶으며 또 고공농성 중인 이들이 먼저 떠오르고

한 자라도 쓸라치면
약자와 소외된 자들을 생각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는
병원 안 성탄미사 자리에서 쫓겨나
병원 밖에서 눈물 시위를 하던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들의 눈물이 먼저
똑똑 떨어지고

한 줄이라도 나가볼라치면
1년 내내 삭발, 삼보일배, 고공농성
67일, 96일 단식을 하고서도
다시 초라하게 겨울바람 앞에 나앉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동지들의
한숨이 저만치 다음 줄을 밀어버리고

다시 생각해보자곤 일어나 돌아서면
그렇게 900일, 400일, 300일을 싸우던
KTX, 코스콤, GM대우, 재능교육 비정규직 동지들의 쓸쓸한 뒷모습
못 다 이룬 반쪽의 꿈을 접고 현장으로 돌아가야 했던
이랜드-뉴코아 동지들이 먼저 보이니

미안하다. 시야.
오늘도 광화문 청계광장 변에서 달달달 떨고 있는 시야
서울교육청 앞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시야
YTN 앞에서, MBC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야
까닭모를 경제위기로 생존권을 박탈당하며
이 땅 어느 그늘진 곳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수천만의 시야

나도 알고 보면 그냥 시인만 되고 싶은 시인
하지만 이 시대는 쉽게, 시를 쓸 수 없는 시대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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