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하다
        2008년 12월 28일 11: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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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E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은 정당론 고전으로 갈등, 이익, 정당, 민주주의가 이 책의 키워드다. 첫 키워드 ‘갈등’에는 가담자와 구경꾼이 있고 이 구경꾼이 늘어날수록 갈등의 성격은 크게 변하며 갈등의 사회화가 이뤄진다. 이러한 갈등은 파당적인 성격을 갖고 중립적일 수 없으며 균형은 언제든지 변한다. 여기서 정치역할은 이러한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다.

       
      

    갈등의 종류를 줄이거나 혹은 바꾸거나 배제하는 등 갈등을 이용하려는 것이 정치다. 저자는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 최고의 권력수단”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대안의 정의는 갈등의 선택을 의미하고 갈등의 선택이 권력을 배분하기 때문”이라고.

    갈등을 관리하거나 대안을 정의할 이로 ‘정당’과 ‘이익집단’을 상정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익집단 체제를 말하는 다원주의자들을 비판한다. 여기서 두 번째 키워드 ‘이익’이 등장한다. 이익집단의 편향성은 상층계급적 성향을 보이고 농촌 지역 조직에 참여하지 않은 농민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임을 보여주면서 책에서 그는 대략 인민의 90% 정도는 이익집단 체제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다원주의자들 주장처럼 이해관계자 개념이 강조될 경우 갈등은 협소해질 것이고(가담자와 구경꾼의 관계에서 구경꾼은 배제될 것이며)다수의 지배와는 멀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익집단 정치의 종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익집단 정치를 갈등의 사회화 중 하나로 보며 특수(사적)이익을 형성하고 약자들의 작은 이익들은 갈등의 사회화와 힘의 균형을 변화시키기 위해 공적 권위를 기대한다. 공적 권위의 기능은 갈등의 범위를 넓혀 사적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 번째 키워드 ‘정당’은 이익집단 정치의 대안카드로 나타난다. 저자의 관점에서 정당의 역할은 유권자들이 선택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정부를 제대로 운영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정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공동체를 어떻게 조직해야 보통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느냐고 묻는 저자의 네 번째 키워드 ‘민주주의’로 넘어온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리더십과 조직의 역할이며 대중이 개입할 수 있고 공공정책 대안들이 부상하게 하는 갈등이 근간”이라 말한다. 민주주의 이론에서 현명한 출발은 보통 시민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 정치에 있어 갈등ᆞ경쟁ᆞ리더십ᆞ조직이 핵심이며, 정당과 정치지도자가 사회화된 갈등과 좋은 대안들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최대의 인민주권이다.

    한국의 ‘정당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샤츠슈나이더의 고언

    이 책은 현 정치이슈 측면에서나 민주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갈등은 없애야 할 것이며 정당정치는 패거리 정치란 주류정치담론이 팽배한 지금, 갈등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고 정당 없이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정당론 고전을 대표하는 한 학자의 주장에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다.

    다원주의의 영향에 의한 이익집단 중심의 정치에 대해서는 소수의 상층계급집단과 친기업 집단만 체제에 들어갈 수 있다고 비판한다. 이는 10%에도 미치지 못할 수준의 노조 조직률(한국의 노조조직에는 상층노동자 중심으로 기층노동자들은 배제되어있다)과 한 재벌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해 정책을 집행하는 대비되는 두 현실의 암울함을 잘 설명하고 있다.

    정당을 멀리하고 이익집단 정치를 활성화하는 것이 답이라는 이들에게 저자는 “이익집단 정치의 영향력 행사 범위는 정당정치에 비해 제한되어있고 규모가 작아 정치적 동원 효과도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선거에서 기업가는 공화당을 지지하고 노동자는 민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듯 이익집단의 힘만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

    저자가 강조하는 경쟁의 측면에서도 정당이 이익집단보다 더 경쟁적이며 선거에서 유일하게 승리할 수 있는 조직이다. 기업과 정당의 관계에서 미국의 공화당이 이익집단에 ‘압력’받는 게 아니라 먼저 친기업적 태도를 취했을 뿐이며 ‘압력’이 아니라 이익집단이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이 삼성공화국을 만든 것도 총선 직후 내걸었던 ‘기업하기 좋은 나라’란 친기업적 태도에 적용할 수 있다. 기업계 역시 한나라당에 ‘압력’을 넣는 것으로 보이지만 저자의 관점대로 전경련과 같은 기업집단들은 한나라당이 자신들과 다른 정책을 추구하더라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정당은 이익집단의 지지를 얻으려고 경쟁하는 게 아니라 다른 정당과 경쟁하기 때문이자 미국의 기업과 공화당의 관계, 조직 노동과 민주당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적 정당체계와 전국적 정당체계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지역주의와 전국정당화가 민주화 이후 정치담론 전면에 나타났던 한국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주의가 정당조직의 약화와 억압을 가져온다면 정치의 전국화는 전국적인 정치조직 수요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갈등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전국적인 차원의 정치가 발전함으로써 나타난 결과 가운데 하나는 “특정지역에 편향되지 않은 전국적인 유권자와 전국적인 다수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정당들의 짧은 수명과 허약한 정당체제, 민심과 괴리되면서 다수의 지지에 기반하지 않은 한국 정당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정치체제의 한계로 ‘투표 불참’ 문제를 제기한다. 투표율이 나날이 낮아지는 한국에서 그가 제기하는 ‘투표 불참’ 문제는 시대적인 시사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높아지는 투표 불참에 대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데 시민들의 상당수가 정치체제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며 정치 세계의 확장을 제한하는 투표불참이 큰 영향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서 이 원인을 찾아내는가. 정치, 정당, 정치인에 대한 공격에서 찾았다. 미국에서는 저자가 평소 비판해왔던 1920년대 진보주의 운동이자 지난 10년간 한국정치에 팽배한 반 정치담론을 투표불참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의 경쟁이 정부와 기업간 균열이란 균열AB를 대표하고 지배담론이 됨에 따라 대안적 균열이자 억압된 균열인 CD를 원하는 사람들이 투표불참 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여기서 투표불참 한 이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다. 한국의 균열에는 민족문제가 대표균열이 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문제, 사회경제적 문제에 의한 균열은 한국의 기존정당에 의해 억압된 현실과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오바마 당선자가! 배제된 이들을 일정부분 동원해냈지만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노력 통한 억압된 균열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이들은 배제될 것이며, 한국은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균열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보수적인 유권자들만 행복한 선거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2008년의 절반의 인민주권,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하다

    「절반의 인민주권」은 인민주권이 직접민주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혹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태동의 관점에서 보장되는 게 아니라 대안과 갈등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에 의해서 최대의 인민주권을 이뤄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촛불집회에 많은 교훈을 준다.

    지금과 같이 시민이 정부를 통제하지 못하는 데는 갈등이 제대로 조직되지 않아서라는 그의 지적은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정당의 역할로 경쟁하고 갈등을 관리하며 유권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들을 제시한 것은 현 한국정당들의 과제를 제대로 지적했다. 정당의 이러한 역할을 통해 배출한 지도자나 정부는 ‘제 갈 길 가는 대통령’이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정부’가 될 것이다.

    내가 저자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기업국가의 결정타 ‘삼성공화국’ 문제와 현재 한국에서의 이익집단 정치, 론스타와 같은 외국 투기자본, 다국적기업과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고언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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