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야, 명박병법은 읽어봤니?"
        2008년 12월 25일 03: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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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억수씨.

    유비군이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유주태수 유언은 반색을 하고 유비를 반겼다. 유비군은 유주성 전투에서 수천 명의 농민군을 죽이고 나머지는 도망가게 놔두었다.

    유비의 병력이 너무 적어 그 많던 농민군을 추격할 수도 없었고 포로로 잡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유주성을 공략하던 황건당 부대는 워낙 멀리서 원정 온 부대라 재집결이 불가능했다. 제32 방면군 전체가 단 한 번의 전투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제32방면군, 단 한 번 전투로 사라지다

    이로써 유언은 유비파의 군사적 실력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유언은 유비에게 다음 임무를 준다. 그것은 농민군에게 포위된 청주성을 지원하라는 임무였다.

    유비는 유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 3형제가 포위된 청주성을 구원하겠습니다."

    유주 태수 유언은 이번에는 유비를 그냥 보내지 않고 5천의 병마를 빌려주어 내보냈다.
    "유 장군은 병마 5천을 거느리고 청주성을 구하라."

    유언(劉焉)은 이미 유비를 장군이라 부르고 있었다. 유비는 군사를 졸지에 5천으로 늘려 청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말머리를 동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청주(靑州, 산둥반도 일대)성을 포위하고 있던 황건 농민군은 유주에서 만났던 황건당과는 많이 달랐다. 청주 지역의 황건당은 비교적 성실하게 군사적 봉기를 준비해온 황건당 내 정예 부대였다. 황건군은 유비군이 지원부대로 오자 긴장했다. 청주성을 포위만 하고 함락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포위군의 외곽에 또 다른 적군이 나타나게 되니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당할 위험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지원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안 농민군은 당황하지 않고 청주성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은 채 별도로 1만 군사를 빼내 청주성 외곽에서 유비군과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황건군의 병사 중심 전투와 유비의 매복 작전

    유비는 지난번 싸움에 고무되어 이번에도 적을 쉽게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첫 전투와 크게 달랐다. 이번에는 적장이 누군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청주지역 황건군은 장수 중심이 아니라 일반 병사 중심의 전략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유비군은 오히려 황건적에 밀려 30여 리나 뒤로 물러났다.

    지난번에는 5백 군사로 5만을 해산시켰으나 이번에는 5천 군사를 데리고 왔는데 1만 명을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유비는 현명했다. 유비는 이번 청주의 황건당이 지난번 유주의 황건당과 이름만 같을 뿐, 질적 수준이 완전히 다른 군대라는 사실을 신속하게 간파했다. 그래서 유비는 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전술 전환을 하기로 작정했다. 정면 대결을 벌이기보다는 유인-매복 작전을 쓰기로 한 것이다.

    유비는 장비와 관우에게 군사 1천씩을 나누어주고 협곡의 좌우에 매복시킨 다음, 자신이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적과 싸우는 척하다가 퇴각하여 황건군을 매복 지역으로 유인해왔다. 두 동생들에게 비교적 안전한 임무를 맡기고 자신이 위험한 일을 맡은 셈이었다. 장비와 관우는 궂은 역할을 자기가 맡는 유비의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유인-매복 작전은 성공이었다. 황건군은 유비(劉備)라고 쓰여 있는 대장기가 직접 나와 싸우자 유인이라고 생각을 못하고 신나게 추격하다가 협곡에서 매복군을 만났다. 장비와 관우의 매복군은 돼지피와 개피를 얼굴에 칠하고 숨어 있다가 도깨비처럼 나타나 황건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유비군은 황건군에게 매복 공격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힌 다음, 여세를 몰아 청주성 바로 밑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포위되어 있던 청주성 안의 관군까지 성문을 활짝 열고 호응해 나와 함께 황건군을 내몰기 시작했다.

    유비의 욕심

    황건군은 자신들이 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졸지에 성의 앞 뒤 로부터 오히려 역포위를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들은 결국 성의 안팎에서 협공하는 양면 공격의 불리함을 이기지 못해 청주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위가 풀리자 청주태수 공경(公卿)은 유비 측 군사를 성안에 불러들여 공을 크게 치하하였다. 공경은 술과 고기를 내와 세장수와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이 때 유비는 욕심이 생겼다. 유비가 보기에 대세는 기운 것 같았다. 직접 싸워보니 황건 농민군에 대한 진압은 시간문제인 듯 보였다. 그래서 유비는 이 대목에서 뭔가 더 크게 날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반란 진압 이후 더 큰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유비는 ‘아예 황건당의 주력부대와 맞붙어 보는 것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일이 잘 풀릴 때 계속 밀고 나가야한다는 유비 특유의 모험 중심 정치 감각이 이번에도 발휘되었다.

    ‘벌써 두 번이나 황건당을 물리치지 않았던가?’
    그런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눈치는 빨랐다. 이미 유비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은 그 전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일단 유비가 황건당 주력군이 있는 광종 지역으로 말머리를 돌리겠다고 하자, 유주태수 유언에게 빌려온 5천의 군사들이 그럼 자기들은 유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유비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최초의 자기 대오이던 500군사만을 데리고 광종지역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청주태수 공경(公卿)도 더는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광종 지역에는 황건군 총대장인 장각이 화북 지역 황건군 15만을 총집결시켜놓고 있었다. 사실상 황건군의 주력 부대였다.

    황제의 공포

    재미있는 것은 이에 맞선 관군의 대장이 유비의 어린 시절 스승이던 노식(盧植)이라는 사실이었다. 노식은 황건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의 부름을 받고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광종 땅에서 황건적의 총대장인 장각과 대치중이었다.

    노식이 진압군의 장수가 된 사정은 대충 이러했다.

    농민반란이 크게 일어나자, 당시 황제이던 영제는 큰 위협을 느꼈다. 원래 400년 전 한고조 유방이 나라를 세울 때도, 유방 자신이 농민출신이었고 그 주력도 농민군이었기 때문에 이 반란에 대한 한 황실의 충격과 공포는 컸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보다 더 큰 공포가 있었다.

    원래 반란이 발생했을 경우 황제가 걱정하는 정말 최악의 경우는 반란을 진압하러 나간 장수가 오히려 반란군에 가담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아군의 주력이 완전히 넘어가기 때문에 정권이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황제들은 늘 진압군을 내려보낼 때, 한 명의 장수에게 모든 병권을 다 주지 않고 두세 명에게 권한을 나눠주었다. 만약 한 명에게 모든 병권을 주어 대규모 군사를 맡기게 되면, 설사 그가 당장은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귀환하는 과정에서 민심을 얻거나 군권을 장악해 그 후에 정권이 크게 휘둘리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련한 권력 관리자 입장에서는 반란 자체보다도 그 반란이 초래할 후속 파장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반란의 진압과정에서부터 권력 분립과 상호견제를 설계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환관과 외척 세력들은 상황발생 초기부터 이점을 신경 쓰고 있었다.

    재야인사 노식, 장군이 되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농민 ‘반란’을 접한 한 영제(靈帝)는 십상시라 불리는 10명의 고위 환관들과 논의 끝에 한 명이 아닌 세 명의 장군들에게 고루 군대를 나누어 주었다. 그 세 명은 황보숭(皇甫崇), 주준(朱雋), 노식이었다.

    여기서 특히 노식이라는 재야 인사가 특이한 인사였다. 노식은 군부에 기반이 없는 학자 출신이었다. 그는 한때 태수 벼슬까지 했지만, 중간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고향에 내려가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성격이 고지식하여 충신이니 뭐니 하는 유학적 이념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즉 황실 입장에서는 군사적 능력은 모르겠으나 일단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노식은 고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졸지에 중랑장(中郞將)이라는 중책을 맡고 황제에게 불려가서 이제 15만 황건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 유비야! 돗자리 소년 유비로구나! 네가 이젠 어엿한 대장부가 되었구나!"

    노식은 유비를 보자마자 10년 전 제자를 금방 알아보았다. 유비와 노식은 곧장 서로 지나온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노식은 첫눈에 젊고 야심에 찬 옛 제자가 유주성과 청주성 싸움에서 이긴 다음, 왜 애써 여기까지 왔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어차피 무위로 끝날 농민 반란이 완전히 기세가 꺾이기 전에 뭔가 전공 욕심을 차리기 위한 행보임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식과 장각의 전선은 교착 상태였다. 이때 노식은 5만의 군사로 장각의 15만 대군과 대치 중이었는데 장각은 세 배나 많은 대군을 갖고 있으면서 지세가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노식은 함부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만 까먹고 있는 중이었다.

    명박병법 또는 어청사병법

    노식은 유비에게 말했다.

    "이쪽 전선은 교착 상태라네, 자네가 전공을 세워 세상의 주목을 받으려면 여기보다는 ‘영천’이 나을 것 같네. 영천에는 황보숭과 주전 두 장군이 장각의 아우 장보, 장량과 맞서고 있는데 머지않아 관군의 총공세가 있을 예정이네. 그곳으로 가서 뭔가 두드러지는 전공을 한번 세워보게. 반란 진압 이후에 전공을 인정받아 벼슬길로 나가기에는 그쪽이 유리할 것 같네."

    유비가 아쉬움 섞인 대답을 했다.

    "스승님, 적이 아무리 15만 대군이라 하지만 제가 직접 부딪혀보니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이었습니다. 저들은 진법(陣法)조차 모르는 오합지졸이옵니다. 한번 적극적인 공략을 해보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러나 노식은 방어에 치중하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유비야, 혹시 명박병법을 읽어 보았느냐?"

    유비는 처음 듣는 병서였다.
    "명박병법 이라고요?"

    ‘명박병법’이란 정규전에 관한 병법이 아니었다. 이는 주로 민중반란 상황에서 대응하기 위한 계략을 집대성한 특수한 병서(兵書)였다. 지은이와 작성연대는 미상인데 책이 처음 발견된 장소가 어청사(御廳詞)라는 사당이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어청사 병법이라고도 불리었다.

    "명박병법의 기본 원리는 크게 3가지다. 첫째,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 한다는 원칙이다. 민중봉기의 경우 초반에 사기가 높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는 무조건 적을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적을 진정시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고로 화공(火攻) 보다는 수공(水攻)을 위주로 해서 불화살을 쓰기보다는 물을 주로 써야 한다. 셋째, 적의 사기가 떨어지면 곧바로 아주 비열한 보복전을 벌여야 한다. 물론 3번째 단계를 위해 사전에 적의 정보를 충분히 수집해 두어야 한다."

    노식의 제자 사랑

    노식의 주장인즉 지금 적은 사기가 아직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소나기를 피하는 단계라는 것이었다. 이 명박병법 때문에 노식은 수십개의 수레를 길게 이어 붙여서 황건군이 진 치고 있는 산 밑에 장애물을 둘러 쳐놓고, 싸움을 질질 끌고 있었다.

    유비는 스승이 너무 확신에 차 얘기를 하자 딱히 반박할 수 없었다.

    노식은 따뜻한 정치적 조언과 함께 유비에게 1천의 군사를 잘라주고 영천으로 가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15만 대군과 대치하는 중이라 군사가 적은 상황이었으나 노식은 옛 제자의 장래를 위해 1천 군사를 전선에서 빼준 것이었다. 이것은 군법상 중요한 문제였지만 노식은 이런 부담을 감수하였다.

    유비는 노식의 충고에 따라 새로 얻은 1천 군사를 몰아서 그날로 영천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비가 영천을 향해 출발했을 무렵에는 이미 황보숭과 주준이 황건당 화남 집중군을 한참 섬멸하고 일을 때였다. 화남집중군의 지휘관은 장각의 동생이던 장보와 장량이었다.

    이들은 아무래도 병법의 기본에 충실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마른 들판에 진을 치고 있다가 관군이 화공(火攻)을 벌이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지휘관의 전문성 부족으로 수만의 농민군이 마치 화롯불 위의 쥐포 타들어가듯이 타죽거나 관군의 창칼에 찔려 죽었다. 장보와 장량은 절반도 안 남은 대오를 이끌고 패주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유비, 열받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장보와 장량이 패잔병을 이끌고 허겁지겁 패주하고 있을 때 웬 젊은 장수가 5천의 마보군을 이끌고 나타나 뒤를 치는 바람에 퇴각하던 황건군은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다. 이 때 갑자기 나타난 젊은 장수는 바로 조조(曹操) 였다.

    유비가 군사 1천 5백을 거느리고 나타났을 때는 이렇게 이미 조조에 의해 잔당들까지 다 흩어진 마당이었다. 본군의 총대장 황보숭은 유비를 보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오느라 수고했지만, 다시 노식 장군에게 돌아가는게 좋겠소.!"

    황보숭이 가만 보니,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시골의용군이 작전이 거의 끝날 때 쯤 들어와서 전공을 나눠먹으려는 것 같았다. 자신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유비가 밥숟갈만 들고 들어오는 것 같아 그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비도 슬슬 열 받기 시작했다. 방을 붙여 의용군을 모집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한시름 덜게 되니까 벼슬 없는 의용군들은 왠지 막 무시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벌써부터 대세를 읽은 관군의 장수들은 반란 진압 이후의 공 다툼을 노린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이미 반란 진압 이후의 정치적 계산이 분주히 오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유비군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장비랑 관우는 매일 말 위에서 반란 이후의 상황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일반 병졸들도 전투에는 관심이 없고 쉬는 시간만 되면 삼삼오오 모여 반란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벌써 농민반란군 진압 자체는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농민이 농민군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

    어찌되었건 장량과 장보의 황건 농민군이 어이없는 실수로 크게 패하자 이를 분기점으로 농민반란의 대세는 한풀 꺾이게 되었다. 장보와 장량이 지휘하던 하남 집중군이 거의 괴멸상태가 되었고, 장각이 지휘하던 하북 집중군은 노식과 대치하며 정체에 빠져있었다.

    청주 방면 황건당도 청주성 공략에 실패한 뒤로 내부 수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엎친데덮친 격으로 총 지휘관인 장각에게 깊은 병이 들어 사실상 지휘체계의 공백이 생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모든 사실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식량문제 때문에 황건당이 민심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황건당은 "왜 농민이 농민군을 지지하지 않느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먹고살기 힘든 마당이 되면 될수록 농민이 농민군을 배척하는 현실은 더 심해져만 갔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 패주하던 장보, 장량 부대를 괴멸 시킨 조조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온 것일까? 여기서 잠시 조조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조조 이야기

    조조는 벼슬길에 오르기 전 태평도에 잠시 심취한 적이 있었으나 이내 다시 고관대작의 아들로 돌아가 낙양북부교위라는 벼슬을 얻어 관직을 시작한다. 낙양북부교위는 도읍인 낙양 북부지역의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는 그리 높지 않은 벼슬이었다.

    조조는 취임하면서 ‘초반에 기강을 잡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조조는 부임 후 처음 석 달 이내에 몰아치듯이 기강을 세우지 못하면 조직은 물론, 관내를 장악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초반에 분위기를 잡고, 기강을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던 조조에게 마침 태평도의 부적이 떠올랐다. 태평도는 "쓰면 이루어진다."는 교리를 갖고 있었고 그 교리의 연장선 속에서 교주이던 장각은 ‘부적’으로 사람들의 고통과 걱정을 치료해주는 시술을 행했었다.

    조조는 "쓰면 이루어 진다."는 태평도의 교리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조조가 생각해보니 ‘쓰면 저절로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쓰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조조가 생각한 ‘쓰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바로 춘추시절 법가가 말했던 ‘법령’을 염두에 둔 의미였다.

    "모름지기 우리가 그린 아름다운 세상이란 다 종이 위에 쓰여진 세상일 뿐이다. 책속에 그려진 세상대로만 된다면야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겠는가? 하여 나의 이상은 종이 위에 쓰여진 그대로 세상이 굴러가도록 집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이상이기도 하거니와 벼슬아치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 조조는 취임하자마자 각종 법령을 매우 엄격히 집행하면서 기강을 세우기 시작했다. 특히 권세있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명무실하던 법령들을 강력히 집행했다.

    조조, 낙양 일대에 명성을 떨치다

    그리고 이러한 엄격한 법집행 과정에서 조조는 중앙정계의 거물급 환관의 일족들까지도 오색 방망이로 매질을 하게 된다. 이로써 조조는 ‘법령을 어긴 사람은 권문세가까지도 엄하게 다스린다’는 평판을 받아 낙양 일대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효과도 있었다. 이 사건 때문에 조조는 일부 환관들을 정치적 원수로 만들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반대파’의 상소로 인해 조조는 4년 뒤 관직을 잃고 잠시 낙향하게 된다. 조조로서는 ‘고정적이고 지속적인 반대파’를 형성한 것이다.

    조조는 의욕을 부리다가 정계에 ‘반대파’를 만드는 바람에 실각하고 보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반대파를 괜히 만들었나?’ 하는 후회스런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날은 평소답지 않게 관상쟁이를 찾아가 관상을 보게 되었다. 그 관상쟁이는 허자강이라는 당대의 유명한 관상쟁이였다. 조조는 허자강에게 관상을 보아주기를 청했다. 조조가 주로 알고 싶은 분야는 물론 ‘관운(官運)’ 이었다.

    허자강은 그러나 조조의 관상을 제대로 말하려 하지 않았다. 조조가 여러 번 청한 끝에야 허자강은 아주 간략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치세(治世)에는 능신(能臣)이며 난세(亂世)에는 간웅(奸雄)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조조는 큰 소리를 내며 껄껄 웃었다. 조조는 원래 웃음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얼핏 들으면 기분 나쁠 이야기를 듣고 크게 웃은 이유는 그 말이 묘한 감각의 새로운 표현법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결국 똑똑한 놈이라는 뜻이군. 하하하. 사실 따지고 보면 어차피 치세의 능신이건 난세의 간웅이건 그 말이 그 말 아닌가? 너무 일방적으로 칭찬만 하면 낯 간지러울 텐데 이렇게 표현해주니 한결 좋구먼. 저 관상쟁이가 유명해진 이유는 남의 운명을 잘 예측한다기 보다는 남의 운명을 잘 표현해주기 때문이군.’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조조는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조조는 의랑이라는 벼슬을 제수받아 일하다가 황건 반란이 발생하자, 기도위를 제수받아 황보숭의 휘하에서 장수로 발탁된 것이다.

    조조는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태평도의 진압군 입장이 되고 보니 약간 마음이 울적하기도 했으나 곧 기왕 이렇게 된 것, 확실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참으로 인생의 악연이로다. 젊은 시절 내게 정치의 영감을 주었던 그 이념을 내손으로 짓밟아야 하다니.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한 가지 선택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쪽에서 공격을 받아 이것도 저것도 안 될 것이다.’

    조조는 이렇게 된 것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거봐라 이놈들아 옛날에 날 무시하더니.. 차라리 잘 됐다.’

    조조가 한 때 같은 배를 탔었던 황건당의 뒤통수를 쳐서 거둔 전과는 대단했다. 비록 적장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조조는 황건군 1만 명을 베고 황건농민군 화남 집중군에게 회생불능의 타격을 입혔다.

    (계속, 7편 반란 이후의 반란, 십상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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