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화국을 위해 대한민국 넘어서자
        2008년 12월 24일 09: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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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대환은 사회민주주의자는 민주공화국을 바람직한 정체(政體)로 생각하며 따라서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긍정해야 할 그 ‘대한민국’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그것은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 같은 과거 정권들의 정통성인가? 대한민국 헌법 조문들인가? 대한민국의 국가기구들인가?

    어쩌면 주대환 류의 사고방식은 국가 장악론과 뉴라이트식 역사관의 기묘한 조합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어떤 사물이다. 그리고 선거로 집권한 세력이 이 사물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그 물질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아마도 보통선거 같은 몇몇 제도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뉴라이트가 하는 것처럼 상상의 계보를 작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논리의 귀결이 결국 대한민국을 ‘긍정’ 혹은 ‘부정’할 수 있다는, 그런 이분법이 가능하다는 사고방식이다.

    번지수 잘못 찾은 주대환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가는 도무지 그런 물건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이란 무대일 따름이다. 우리가 사는 나라를 ‘민주’ ‘공화’국이 되게 하는 것은 헌법 조항도 아니고, 국가기구도 아니다.

    그것은 공화국 시민이다. 인민 대중이다. 투표 행위로 나타나기도 하고 개인적 항의로 나타나기도 하며 대중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그들의 권력 행사다. 이러한 민중의 권력이 국가 안에 새겨지고 그래서 국가의 이곳저곳에서 지배 세력의 권력과 끊임없이 맞설 때 우리들의 나라는 ‘민주’ ‘공화’국이 된다. 국가는 투쟁이자 타협이고 세력관계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공화국의 긍정에 뒤따라야 할 것은 대한민국의 긍정이 아니라 그 권력의 최종 근거인 대한민국 시민(인민)의 힘의 긍정이다. 뉴라이트 기관지에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발표할 일이 아니라 2008년 늦봄과 초여름 거리에 메아리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노래에 목소리를 더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뜻밖에도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 훌륭히 표현돼 있다. 헌법 전문은 명확한 개념들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들보다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로써 인민 주권의 심오한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문장이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심오한 뜻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법통’이라는 고색창연한 말부터 주목할지 모르지만, 이 문장을 꿰뚫는 기본 정신은 그런 제한된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두 사건 모두 그 당시의 현실 국가에 맞선 대중 봉기였다.

    3‧1 운동 당시 국제법으로 인정받던 한반도 내 합법 정부는, 우리는 인정할 수 없지만, 일본 정부 기관(조선 총독부)이었다. 3‧1 운동은 이에 맞선 혁명적 봉기였다. 4‧19는 또 어떠한가? 당시의 이승만 정부, 제1공화국 체제에 맞선 대중 혁명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역설에 맞부딪힌다.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의 헌법이 이 나라의 역사적 뿌리로 제시하는 사건들은 그 당시의 국가에 맞선 대중 운동들이었다는 것. 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이를 “‘불완전한 국가’를 국민 주권의 힘으로 끊임없이 부정하고 극복”하려 한 사건들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참된 헌법 정신”이라고 단언한다(2008. 8. 18. 참여사회연구소 등 공동 주최 토론회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에서).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좌파가, 혹은 모든 민주파가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근본 관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국이게 만드는 것은 당대의 국가(4월 혁명 당시에 그것은 분명 대한민국 정부였다)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대중의 힘이라는 것, 민주공화국의 참된 긍정은 그 현존 형태를 부정하는 힘을 긍정하는 데 있다는 것 ―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역설이다.

    대한민국의 검인정 교과서가 가르쳐주는 명제도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대중들이 스스로 이 역설을 깨쳐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광주 항쟁, 6월 항쟁, 노동자 대투쟁 등이 그 과정의 중요한 계기들, 즉 또 다른 헌법적 사건들이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다면,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현존 국가의 불완전성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대중 행동이 보장받고 적극 행사되어야 한다. 즉, 시민(인민)의 제헌적 권력을 이 나라의 미래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되불러내야 한다. 이것은 “이제 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언명으로는 도저히 감싸 안을 수 없는 역동적인 진실이다.

    대한민국 탄생과 세계질서

    우리가 민주공화국을 사랑하면서도 대한민국 긍정론에 무작정 따를 수 없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앞 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든 국가는 전 지구적인 권력 사슬로부터 규정받는다. 대한민국도 그렇다. 대한민국의 탄생은 2차 대전 후 미국 헤게모니의 등장 그리고 그것과 소련 사이의 대립 없이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과거 한반도에 등장했던 그 어떤 국가의 영토 구성과도 다른 두 국가(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가 등장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밖에 없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탄생과 이후 성장은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더 강력하게 세계 질서로부터 규정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두 분단국가의 등장이야말로 여운형이나 김규식 같은 사람이 가장 피하고자 한 역사의 전개 방향이었다. 주대환이 자신의 이념적 뿌리로 드는 여운형에게 대한민국은 오히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국가’였다는 이야기다.

       
      ▲ 여운형

    물론 이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둘 다 양대 진영의 피후견 국가였고, 따라서 그 탄생 신화는 결코 남에게 내세울만한 게 못 된다.

    다행히도 이러한 기원이 이후의 역사를 홀로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달리 대한민국은 그래도 ‘민주’ ‘공화’국됨에 어느 정도 충실한 궤적을 보였다. 위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역설적으로 현존 국가에 대한 대중적 부정이 반복적으로 분출한 덕분에 이렇게 될 수 있었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이러한 부정이 없었다 ― 적어도 아직까지는.

    가장 심원한 단절 계기

    허나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이제 한반도에 가장 적합한 국가 형태로서 절대적인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60년 역사의 가장 강력한 배경 역할을 한 미국 헤게모니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2008년 가을의 금융 위기는 그 결정적 신호탄이다. 이 위기와 혼란 속에서 어떠한 새로운 세계 질서가 그 모습을 드러낼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전환의 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헤게모니와 운명을 함께 한 대한민국 60년 역사에 닥친 가장 심원한 단절의 계기일지 모른다.

    과거에 남한 좌파는 남북이 하나의 민족국가로 통일돼야만 한반도에 ‘정상 국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故) 박현채 선생은 굳이 남한 국민경제와 구분되는 ‘민족 경제’라는 경제 단위를 설정하기까지 했다(박현채, 1989).

    즉,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구성이 불안정하며 모순적이라고 보고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 구성을 상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을 단지 대한민국을 ‘부정’한 것으로 이해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 논리이자 흑백 이분법이다.

    물론 한반도에 하나의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것(통일)이 과연 최종 해결책일 수 있을지는 이제 의심의 대상이다. 앞으로는 남북의 통일도 아시아 차원의 보다 폭넓은 통합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만 적극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국가 구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구성 자체가 무슨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뭔가 새로운 정치 구성체들(한반도 연방이든 아시아 연합이든)이 다층적으로 등장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박순성, 2007; 구갑우, 2007; 진보정치연구소, 2007)

    이 대목에서도 우리는 어떤 역설과 만나게 된다. 오늘날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기에 대한민국은 ‘자기 변신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 즉,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아닌 것을 지향해야 한다. 탈남한의 연방, 탈한반도의 지역 통합을 상상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 남한 진보 세력 일각에서 난데없는 대한민국 긍정론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보다 더 퇴행적인, 시대와의 어긋남을 상상할 수 있을까? 하필 봄기운이 완연해질 무렵 두꺼운 겨울 외투를 찾는 기행(奇行)이 유독 분단 체제의 저 북쪽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증거인 셈인가?

    4. 민주공화국을 위해 대한민국을 넘어서자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남한 진보파 일각에는 민주공화국을 긍정한다면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이에 반해 필자처럼, 민주공화국을 긍정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대한민국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좌파도 있다.

    전자 입장에서 자신의 역사적 뿌리로 여운형, 조봉암을 들곤 하는데, 필자는 오히려 후자의 시각에서 보아야만 이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운형, 조봉암의 진면목

    여운형이 누구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이 등장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보려 한 사람이었다(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등장 역시). 대한민국과는 다른 영토와 인민으로 구성되며 또한 상이한 국제적 맥락에 놓인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 한 사람이었다. ‘여운형’이 상징하는 것은 한반도에 대한민국과는 다른 민주공화국이 출현할 수 있었던 소실된 가능성에 대한 안타까움이자 되살아나는 희망이다.

    조봉암은 또 어떤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이 내세웠던 핵심 공약 중 하나는 ‘평화 통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밖에 안 된 당시에 북진 통일도 아닌 평화 통일이란 곧 제헌 과정을 새로 시작하자는 것, 국가를 새로 구성하자는 이야기였다.

    이승만 세력이 여기에서 공산주의 선전 선동보다 더 불온한 냄새를 맡은 것은 어쩌면 과잉 반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이승만의 국가 건설 노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조봉암’이 상징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민주공화국의 불발된 가능성에 대한 추념이다.

    그렇다면 여운형, 조봉암의 정신에 충실한 진보 좌파가 할 일은 대한민국 60년 역사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일 수 없다. 우리가 아낌없는 사랑을 바쳐야 할 것은 지난 60년의 역사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공화국’이다. 이 미래의 민주공화국에 대한 열망만이 현실의 대한민국을 조금이라도 앞으로 이끄는 힘이 될 수 있다.

    미래의 민주공화국이라?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미 위에서 우리는 그 최소한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근거들을 살펴본 바 있다.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그 첫째는 현실의 국가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가운데 더 나은 정치적 구성체를 만들어내는 제헌적 힘을 지닌 대중이다.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인민 주권이다. 촛불 운동은 이것을 대중 스스로 재발견하는 출발점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아직 출발점 수준일 뿐이다. 비정규직 문제 등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도전하는 대중운동 과정에서 이 힘은 더욱 거대하고 심원하게 증폭될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두 번째는 지금 현재의 국가 구성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며 인민 주권의 보다 효과적인 실현을 위해 그것은 끊임없이 변경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다시 반복하지만, 우리는 지금 세계사의 대전환기에 들어서고 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낳았던 한 시대가 이제 완전히 저물어가고 있다. ‘국가 만들기’를 놓고 이승만, 김일성의 정치와 여운형, 김규식의 정치가 경합하던 신화의 시대가 다시 동터오고 있는지 모른다(장석준, 2006). 진보 좌파라면 이러한 새로운 혼란 혹은 가능성의 시대를 예비하는 정도의 안목과 예지, 깊이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대한민국을 낳은 제헌의회에서 조봉암은 이승만의 대통령중심제 주장에 반대해 내각책임제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헌법 조문을 심의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국민’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겼다.

       
      ▲ 조봉암

    “총강에 특징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표시와 인민을 일률적으로 ‘국민’이라는 어구로 표시된 점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했는데 소위 민주공화국에 대한(大韓)이란 대(大) 자는 아랑곳없습니다.

    한(韓)이란 말이 꼭 필요하다면 ‘한국’도 좋고 우리말로 ‘한나라’라고 해도 좋을 것을 큰 대자를 넣은 것은 봉건적 자존비타심의 발로이요 본질적으로는 사대주의 사상의 표현인 것뿐입니다. (중략)

    그 다음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발한다’ 하여 세계 공통의 ‘인민’이라는 말을 기피했습니다.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 헌법에서는 모두 인민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피플’이라 표시했고 ‘네숀’이라고 아니하며 불국에서도 ‘퍼퍼’라 하며 소련에서도 ‘나로드’라 해서 모두 인민으로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공산당 측에서 인민이란 문구를 잘 쓴다고 해서 일부러 인민이란 정당히 써야 될 문구를 쓰기를 기피하는 것은 대단히 섭섭한 일입니다. 이 헌법 초안의 불비와 보수성은 이러한 불필요한 완고하고 고루한 생각에서 퍼져 나오기 때문에 소위 입법자의 태도로는 용허할 수 없는 편견입니다.”(조봉암, 1999)

    민주공화국에 ‘대한(大韓)’은 어림도 없고 ‘국민’이 아니라 ‘인민’이 합당하다는 이 한 마디. 어찌 보면 용어 문제를 시시콜콜 트집 잡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근저에는 현실의 국가(이미 이승만이 건국을 주도하던 그 국가)를 조금이라도 민주공화국의 보편적 이상에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려는 선각자의 혜안과 열정이 꿈틀대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근본성’이며, 그것이 한 선각자의 몸짓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대중의 움직임으로 환생하는 새로운 제헌적 과정(좁은 법학적 차원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기틀 놓기라는 차원에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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