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대환과 코민테른주의자들
        2008년 12월 23일 10: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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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국가를 바라보는 좌파의 시각

    그럼 진보 좌파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대한민국 안에서 그 한 정치 세력으로서 고민하고 활동하는 좌파에게 과연 대한민국은 무엇인가? 뉴라이트나 주대환 류의 구도에서 벗어나 다시 원점에서부터 따져보자.

    대한민국은 국가다. 자본주의 세계의 한 국가다. 따라서 좌파가 대한민국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이야기하자면, 좌파가 국가, 그것도 자본주의 세계의 국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좌파의 국가관은 두 입장으로 나뉜다. 그 중 한 가지 입장은 좌파가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껏 국가가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봉사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뒤엎을 무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보통선거제도다.

    노동자, 민중 세력 역시 선거를 통해 국가 권력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러면 그간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복무해온 국가기구를 노동자, 민중의 것으로 전취할 수 있다. 그 논리적 결론이 곧 선거 사회주의, 개혁적 사회주의 노선이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뿌리이자 논리적 토대다.

    또 다른 입장은 자본주의 국가는 오직 ‘분쇄’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국가는, 그것이 아무리 민주적 외피를 쓰고 있더라도, 애초부터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맞게 만들어진 기관일 뿐이다. 좌파정당이 선거에 승리해 내각을 구성하거나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국가를 통째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기구는 노동자, 민중의 대표들을 포위하거나 무력화시키고 결국은 기존 국가 운영 방향의 포로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변혁 세력은 자본주의 국가를 철저히 파괴해야 한다. 이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출발점을 이루는 국가관이다.

    장악도, 분쇄도 정답이 아니다

    이 중 어떤 입장이 올바른 것으로 판명되었는가? 역사의 검증 결과는 어떠했는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지난 세기의 역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두 입장 모두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여러 나라에 보통선거권이 도입되자 실제로 많은 좌파 정당들이 선거로 집권당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집권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 변화로 이어졌냐 하면 그렇지 않다.

    물론 복지국가라는 커다란 역사적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본주의 자체의 변화는 아니었다. 더구나 복지국가의 건설 자체가, 스웨덴 정도를 예외로 한다면, 한 나라 안의 선거 정치의 결과였다기보다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 세계적 격변의 산물이었다.

    또한 선거로 집권한 좌파가 일단 몇몇 복지제도 도입 이상의 급진적 조치들을 취하기만 하면, 그들은 반드시 국가기구 내부로부터 격렬한 저항에 맞닥뜨리곤 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칠레, 영국, 스웨덴 그리고 프랑스 등에서 집권 좌파가 겪은 일련의 좌절과 패배가 바로 그 사례들이다. 그리고 이 패배의 잿더미 위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 시작되었다. 이것만 보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국가관이 옳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허나 그들의 성적표 역시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된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파괴한 뒤에 실제 닥친 현실이 충격적인 것이었다. 새로 등장한 당-국가는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억압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혁명 과정의 어떤 일탈(당 관료들의 ‘배반’) 때문이었다고, 그래서 애초의 출발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국가 ‘분쇄’ 이후의 결과를 결코 낙관할 수 없다는 현장 검증 결과를 가리거나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실패했다. 일단 보통선거권이 도입, 정착된 사회에서는 10월 혁명식 대중 봉기가 좀체 재연되지 않았다.

    그런 사회에서는 대중이 선거제도에 냉소를 보내기는 할망정 그것이 국가권력에 접근하는 가장 덜 나쁜 방식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분쇄’ 전략은 그 올바름을 입증하기 이전에 진보 성향의 대중들 사이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데에도 실패하곤 했다.

    물론 범좌파 안에는 여전히 국가 장악론이나 분쇄론 중 어느 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국가관이 아직 채 검증이 끝나지 않았을 뿐이지 근본적으로는 올바른 것이라고 믿는다.

    주대환 그리고 코민테른주의자들

    그래서 주대환은 사회민주주의(그것이 베른슈타인이나 조레스의 사회민주주의인지, 블레어나 슈뢰더의 사회민주주의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를 한국 좌파의 유일한 선택지로 내세우는 것이며, 지금도 우리 곁에는 코민테른형 혁명 정당을 건설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21세기의 좌파에게는 국가 ‘장악’도, ‘분쇄’도 아닌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이전에 발표한 글에서도 계속 주장한 것처럼(장석준, 2007. 「21세기의 현실 대안 – 사회주의」, 참여사회연구소 엮음,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한울 ; 2008. 「진보 좌파의 민주주의, 그 성찰과 전망」, 󰡔기억과 전망󰡕 제18호), 필자가 보기에, 그 출발점은 니코스 풀란차스의 후기 입장이다(Poulantzas, N. 1978. State, Power, Socialism, New Left Books. (국역: 박병영 옮김, 󰡔국가, 권력, 사회주의󰡕, 백의, 1994).

    풀란차스에 따르면, 국가란 장악하거나 분쇄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세력관계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계급과 계급분파들 사이의 세력관계의 물질적 응축”이다. 즉, 국가는 사물이 아닌 관계다.

    여기에는 당연히 지배 계급의 권력이 관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피지배 계급이 완전히 부재한 것은 아니다. 피지배 계급의 힘 역시 각인되어 있다. 따라서 지배 계급조차도 국가라는 무대에서 끊임없이 피지배 계급에 대한 자신들의 힘의 우위를 확인함으로써만 현존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피지배 계급도 국가라는 무대를 통해 자본주의의 지배를 불안정하게 만들 힘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민중투쟁이 국가의 제도적 물질성 안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민중투쟁은 표면화된 그리고 다양한 투쟁의 흔적을 남기는 물질성에 각인된다.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투쟁은, 보다 일반적으로 권력장치에 대한 모든 투쟁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대해 외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국가의 전략적 배치에 의존한다. 결국 국가는, 모든 권력기구와 마찬가지로 관계의 물질적 응축인 것이다.” (Poulantzas, 1978)

    플란차스의 ‘근저적 변형’

       
      ▲ 니코스 플란차스(Nicos Poulantzas)

    이런 국가관은 무엇보다도 현대의 민주공화국에 들어맞는다. 우선 국가 장악론과 견주어보자.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민주공화국이라 하더라도 지배 계급과 다수 대중의 힘이 서로 불균등하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피지배 세력의 이해와 영향력을 국가기구 안에 쉽게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은 유치한 환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를 분쇄의 대상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누구보다도 대중 스스로 자신들의 투쟁을 국가라는 무대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권력에 접근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주역이라고, 혹은 주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무대 자체를 파괴하자는 데 동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럼 이러한 새로운 국가관을 뒤따르는 좌파의 정치 전략은 무엇인가? 풀란차스는 국가의 ‘장악’도, ‘분쇄’도 아닌 그 ‘근저적 변혁(변형)’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변형’이란 “국가 조직망에서 대중이 항상 가지는 분산적인 저항의 중심이 국가라는 전략적 지형에서 실질적인 권력의 현실적 중심이 되는 형태로 새로운 저항의 중심을 창출, 발전시키고, 보급, 발전, 강화, 지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및 자유(인민대중이 획득한 성과)의 확대, 심화와 직접 기층 민주주의의 확장 및 자주관리적 거점의 분산, 확대를 접합”한다(Poulantzas, 1978).

    앞으로 필자의 논의는 이러한 후기 풀란차스 이론에 바탕을 둘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 자원으로도 채 풀리지 않는 국가 문제의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 위의 시각들은, 사회민주주의나 레닌주의의 국가관이든 풀란차스의 그것이든, 모두 맑스주의 전통에 입각해 있다. 맑스주의 전통은 국가를 항상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 접근해왔다. 즉, 시민사회라는 토대로부터 국가에 접근하곤 한다.

    ‘바깥으로부터’의 국가

    그런데 실제 국가는 시민사회로부터 규정될 뿐만 아니라 국가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국가는 국가 내부의 여러 세력관계들의 응축일 뿐 아니라 그 국가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관계의 응축이기도 하다.

    즉, 국가는 ‘아래로부터’나 ‘안으로부터’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바깥으로부터’도 접근해야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이 자본주의-국민국가 형성에 가장 앞섰던 나라(영국) 혹은 나라들(영국-프랑스)과의 경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만 돌이켜봐도 이미 분명하다.

    현존 국가들 중 다수가 2차 대전 이후 비로소 독립한 나라들이고, 이들 나라의 등장이 탈식민지 성향을 갖는 미국 헤게모니의 부상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는 점 역시 그 한 사례다.
    사실 맑스, 엥겔스도 당대 국제 정세를 분석한 짧은 신문 기고용 원고들에서는 국가 간 체계의 존재와 그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착상을 이론 수준으로까지 정연히 전개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약점은, 1917년 당시 레닌의 세계혁명 전망과 같은 몇몇 예외에도 불구하고, 이후 맑스주의 전통에서 그대로 반복됐다. 최근 들어서야 비판적 지구정치경제 이론 등을 통해 뒤늦게, 국가 문제에서 국가 간 체계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주목받기 시작하는 형편이다(Cox, R. 1996. Approaches to World Or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Gill, S.(ed). 1993. Gramsci, Historical Materialism and International Rel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아무튼 이제는, 어떠한 국가도 전 지구적인 권력 사슬을 시야에서 지운 채 그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도 여기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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