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사 야식에 자장면이 안되는 이유
        2008년 12월 20일 01: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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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종합병원>으로 의사들의 생활, 병원의 모습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실제 병원에선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이 한가롭게 잔디밭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대화하고, 환자들을 일일이 챙겨줄 시간이 없다. 물론 없는 시간을 쪼개 환자들을 보살피는 이들도 없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환자들을 위한 이들의 따뜻한 감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

       
      

    『인턴일기』(홍순범 저. 글항아리. 1,2000원)는 ‘아직’ 의사가 아니지만 의사가 되어가는 과정, 의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의학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복잡한 의학 전문용어들이 들어가지 않아도, 피가 굳지 않게 만드는 헤파린을 묻힌 주사바늘 하나에, 파란 수술실 복장이 왜 잠옷으로도 그만인지 얘기해준다.

    눈 수술을 받기 위한 환자들 중 속눈썹을 밀어야 하는지 마는지 고민하기, 야식 주문에서 ‘자장면을 주무하면 왜 죽음인지’, 시신 기증을 한 죽은 자의 안구를 떼어내는 일, 주사기가 칫솔꽂이로 변하는 크고작은 여러 일들은 ‘병원 밖’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전달해준다.

    의학드라마나 병원생활을 다룬 영화 들을 보면 항상 나오는 광고 카피. ‘지금까지 이런 것은 없었다‘. 『인턴일기』야말로 지금까지 없었던 의사가 빚어지는 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책 곳곳에 숨어있는 구절구절은 가슴에 그냥 ‘확’ 들어오거나, 뱀이 칭칭 감아버리듯 마음에 찰싹 달라붙는 감동들을 쉬지않고 전해준다. 

    “(중환자실 당직 때 야식을 먹으며)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식당 안에 그리운 모닥불 한송이가 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우리 중에 누구도 한숨짓지 않았지만 식당 안의 공기는 누군가의 한숨으로 가득 찬 것만 같다.

    몇몇 레지전트 선생님들은 툭하면 이렇게 내뱉곤 한다. “지겨워.” 불경스럽지 아니한가! 생명을 돌보는 이들이 일하면서 지겹다는 생각을 하다니, 혹자들은 당장 의사들을 비난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 환자 상태가 좋아졌을 때 3년차 선생님의 해맑은 웃음.

    지겹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고, 환자나 보호자에게 별로 친절하지도 않았던 그 얼굴이, 환자상태가 좋아졌을 때 순간 어떻게 변하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저자의 인턴 시기 1년 동안 15권의 수첩에는 이렇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일들이 빼곡하게 기록돼 있다. 그렇다고 병원에는 따뜻한 일들만 있는 건 아니다.

    초보 의사는 이성과 감성을 감당하기 힘든 불의와 모순, 병원 시스템의 부조화도 그대로 드러낸다. 응급실 교통정체가 벌어진 날, 애매한 환자를 두고 서로 자신이 담당이 아니라고 미루는 의사들, 아는 사람을 통해 온 환자가 아니면 아무리 응급환자라도 자리가 없다는 핑계로 다른 병원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인턴에게 내리는 어떤 레지던트 등등.

    또 있다. 심각한 뇌출혈 환자를 큰 병원에 보내는 것까진 좋은데 설마 되돌려 보내랴 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밀어붙이는 일부 지방병원, 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무조건 의사 잘못이라고 따져들고 고소를 불사하는 사람들과의 전쟁같은 일들도 초보 의사에게나 독자들에 그냥 넘기긴 힘든 대목들이다.

    그래서 『인턴일기』는 병원 밖 사람들에게도 손을 놓지 못하게 하지만, 병원 안 사람들도 꼭 읽어야 할 ‘강제 필독서’로 추천돼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5년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인턴 1년과 레지던트 4년을 모두 마치고 정신과 전문의로 개업하고 있는 저자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의사생활을 하고 있을지가 정말 궁금해진다. 『인턴일기』를 재밌게 다 읽을 즈음 아마 당신은 병원에 대한, 의사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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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적 프랑스에서 뛰놀며 프랑스, 스페인, 모로코, 알제리, 모리셔스, 사모아, 이란, 중국 등지 출신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행운을 누렸다. 당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빵 광주리 나르며 다른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다가, 귀국해 학교에 처음 간 날 교장 선생님 앞에서 잔뜩 긴장하며 조아리는 선생님들을 목격하곤 인간과 환경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또 프랑스에선 줄곧 아이디어 좋다는 칭찬을 듣다가 우리 교실에선 너는 왜 교과서에 없는 질문을 하냐며 교과서나 열심히 보라는 핀잔만 듣게 되자 몹시 당황한다. 교실 밖에선 국적, 인종, 종교, 성별, 나이, 진로에 상관없이 잘 어울려 놀았는데, 돌아와선 학교 운동장에서 선배들에게 순진하게도 같이 놀자고 했다가 에워싸여 두들겨 맞자 충격을 먹는다.

    그래도 곧 학교생활에 적응했고, 언제부턴가 ‘고통’이라는 화두에 심취해 의과대학까지 가게 되었다. 그리고 전문의가 된 지금 인턴 시절의 일기를 다시 읽으며 어렵사리 출판을 결심했다.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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