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욱의 뜨거운 눈물은 중원을 적시고
        2008년 12월 22일 10: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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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있는 사이에 유비군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교전을 시작했다. 장비가 먼저 달려 나와 언덕이 쩌렁 쩌렁 울리도록 황건군에게 험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춘추시대를 거치고 진, 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 권력투쟁의 이해당사자는 일반 징집병들이 아니라 귀족 출신의 무사계급들이었다.

    어차피 농사짓다가 끌려온 일반 병졸의 경우는 누가 이기건 큰 상관이 없었다. 따라서 병사들끼리의 전투보다는 장수들 간의 결투를 선호하는 지휘관일수록 일반 병졸들에게 존경 받았다. 그것이 권력 다툼과 상관없는 일반 병졸들의 희생을 줄이면서 당사자들끼리의 싸움만으로 승부를 정하는 아주 간편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물론 반역의 목적을 갖고 일어선 농민군의 경우 이런 귀족 시대의 전투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지만 정원지는 순욱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관우-장비, 황건두목 목을 베다

    하여튼 그렇게 장비가 나서서 싸움을 걸자 정원지의 믿음직한 부관인 등무(鄧戊)가 말을 달려 나갔다. 등무는 농민군 봉기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정원지의 든든한 부관이었다.

    그러나 장비는 지금까지 등무가 상대해온 시골 군인들과는 비교할 수없는 맹장이었다. 등무는 정면으로 달려 나가 장비와 한판 붙는가 싶더니만 장비가 휘두르던 장팔사모에 떠밀리듯, 순식간에 말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장비는 말에서 떨어진 적장을 쫓아가며 장팔사모를 마구 휘둘렀다.

    정원지는 그 상황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자신이 직접 말을 몰아 뛰쳐나갔다. 등무는 정원지에게 부관이기 전에 어릴 때부터 한 마을에서 지내온 둘도 없는 동생이었던 것이다.

    적의 총대장이 직접 말을 몰고 거세게 뛰어나오자 유비진영에서는 관우가 같이 말을 몰아 달려 나왔다. 관우는 무게가 팔십이근이나 되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라는 특이한 무기를 쓰고 있었다. 이 칼은 손잡이만 2미터에 달하는 아주 긴 칼이었다.

    관우는 능숙하게 말을 타고 달리면서 왼손으로 말 고삐를 잡고 청룡언월도를 든 오른팔을 완전히 꺾어 뒤로 길게 제쳤다. 그러자 그 긴 청룡언월도는 말 꽁무니 보다도 훨씬 뒤까지 일자로 뻗힌 상태가 되었다. 그 상태로 말을 몰아 달리니, 사람들이 일찍이 본적 없는 참 기묘한 자세였다.

    아우이자 동료의 위기를 보며 눈이 뒤집혀서 달려나온 정원지는 장비에게 달려가다 말고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관우를 발견했다.

    "이 수염 긴 놈아 ! 네놈부터 먼저 죽여주마!"

    목없는 시체를 태우고 날뛰는 말

    정원지는 방향을 바꿔 관우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관우와 거의 부딪힐 때 쯤 회심의 한 칼을 힘차게 내둘렀다. 그러나 관우는 안장 위에서 말발굽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궁둥이를 아래 위로 흔들다가 그 칼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는 뒤로 꺾어 두었던 오른 팔을 내저어 적장의 목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정원지는 관우를 지나치면서 자신이 휘두른 칼보다 한 박자 다음에 날아오는 청룡언월도의 묵직하고 예리한 위협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조치를 취할 새도 없이 그냥 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말과 말이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힘 때문에 도저히 이를 막거나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 그림 = 억수씨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목이 잘린 시체를 태운 말은 자기가 태운 것이 사람인지 귀신인지도 모르고 계속 달렸다. 멋모르는 말은 계속 달려 거의 유비군 앞까지 왔다. 말은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크게 반원을 그리면서 한 바퀴 돌아 이번에는 다시 자기 진영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정원지가 목이 날아가는 순간 온몸에 힘을 주느라 그랬는지 그 목 없는 시체는 아직도 말고삐를 힘껏 쥐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자신들을 향해 호령하던 대장이 순식간에 목 없는 시체가 되어 자기 진영을 향해 돌진하자 그 모습을 본 농민군은 일제히 사색이 되었다. 당황한 대오는 혼비백산해 심각한 붕괴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말은 대오 안으로 뛰어 들어가 더 미쳐 날 뛰었다.

    목 없는 대장 시체가 말을 타고 대오를 어지럽히며 뛰어다니자 순식간에 5만 황건군 진영 전체에 거대한 공포감이 휘몰아 쳤다. 그것은 말 그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 였다. 제32방면 황건군으로서는 봉기 이후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그 때 어디서 누가 소리쳤는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후후..후.. 후퇴!!!!"

    최전선에서 줄을 지어 서있던 농민군 보다 50보 뒤에 떼를 지어 있던 후비군이 먼저 동요를 일으키며 슬금 슬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유비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저 역적 놈들을 모조리 격살하라!"

    황건군의 대혼란

    500명 짜리 군대의 지휘관이 5만 적군을 눈앞에 두고 내린 회심의 명령이었다. 이 소리와 함께 유비군 대열의 양쪽에 서있던 100명의 궁수들은 줄지어 앞으로 걸어가면서 화살을 쏘아댔다. 방패도 없이 앞줄에 서있던 황건군들이 일제히 인간 표적이 되어 쓰러지기 시작했다. 화살 하나에 한 명씩 쓰러지는 것 같았다. 소쌍이 준 자금으로 모집한 전문 궁수들의 위력이었다.

    기병 200기도 저마다 창과 극을 휘두르며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다시 보군(步軍)들이 뛰어서 쫓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총공격이었다. 유비 자신도 쌍고검을 휘두르며 진격에 앞장섰다.

    앞에 있던 관우와 장비는 자기 진영에서 대대적 진격을 시작하자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 말 위에서 싸우는 마군(馬軍)의 경우 긴 창을 든 보병에 대해선 불리하지만 검 같은 비교적 짧은 무기를 든 보군(步軍)에겐 훨씬 유리했다. 광우와 장비는 적진 깊숙이 돌진해 이미 등을 보이고 있는 황건군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유비군이 길게 옆으로 뻗은 대열의 한가운데로 치고 들어가자 황건군의 진중에서는 대혼란이 발생했다. 원래 농민군은 유비군을 포위하기 쉽게 횡렬로 길게 펼친 진영을 짰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핵심지도부가 궤멸되고 대열의 중간이 확 끊겨버리자 대혼란이 발생했다. 지휘 체계의 순간 붕괴가 발생한 것이다.

    그 와중에 일부 지휘관은 공격명령을 내리고 일부 하급 책임자들은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진격하려는 농민군과 퇴각하려는 농민군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최전선은 후퇴도 못하고 진격도 못하면서 유비군에 의한 일방적인 학살 현장이 되고 있었다. 갑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죽창 따위의 짧은 무기를 든 농민군은 말위에서 긴 철제 무기를 휘두르는 유비군에게는 좋은 사냥감에 지나지 않았다.

    일찍이 무예를 익힌 적이 없던 백면서생(白面書生) 순욱도 갑작스런 상황에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원지가 목 없는 귀신이 되어 말 타고 다닐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쉬웅- "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순욱의 눈앞에 커다란 까만 점 하나가 잠시 보이는가 싶더니만, 갑자기 뭔가가 순욱의 가슴을 강타했다. 마치 쇠망치로 갈비뼈를 때리는 듯 한 강한 충격과 함께 순욱은 뒤로 나자빠졌다. 적진에서 날아온 화살이었다.

    순욱의 회한과 눈물

    다행히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라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화살은 갈비뼈 사이에 손가락 한마디만큼 이나 꽂혀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또 다시 수 발의 화살이 날아오며 같은 황건군의 기병 하나가 쓰러져 있는 순욱의 옆에 홱 고꾸라지는 것이 보였다. 순욱은 기수를 떨어뜨린 말 위에 오르기 위해 한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일어나 말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죽을 힘을 다해 말에 오르는 순간 방금 땅에 처박힌 그 농민군이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구해달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순욱은 그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말 뒤에서 창검소리 비명소리 함성소리가 마구 뒤섞여 아비규환을 이루었지만, 순욱은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죽어간 농민들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순욱이 그렇게 빨리 말을 몰아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20리나 쉬지 않고 말을 달려 도망가면서 순욱은 내내 한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한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흐르는 피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지만 순욱의 가슴이 찢어졌던 것은 화살 때문만이 아니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순욱의 머리는 혼란하기만 했다. 분하고 억울한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다.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전조직이 겪어야 했던 억울한 패배, 그리고 태평균등협약세상의 꿈을 안고 태평도에 투신했던 어린 시절의 회한 같은 온갖 잡생각들이 한꺼번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순욱은 되도록 패주하는 농민군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달아났다. 혹여 관군 토벌대가 추격을 시작하면 황건당과 전혀 관련 없는 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 이미 순욱의 머릿속에는 흩어진 황건군을 다시 규합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순욱은 달리는 말 위에서 황건당의 표식이던 누런 머리띠를 벗어던졌다.

       
      ▲그림=억수씨

    누런 머리띠가 바람에 날아가는 순간 순욱은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을 느꼈다. 젊음을 바쳐 사랑했던 조직을 떠나야 했던 아픔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슬픔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조직으로부터 반쯤은 버림을 받고, 반쯤은 내가 그 조직을 버려야 했던 그런 아픔이었다. 그 때 순욱은 세상에 마치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었다.

    황건농민군 제 32방면군 부대 행정, 작전 참모 순욱은 그렇게 가슴에 맺힌 패배의 추억을 부여잡은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말 한필에 의존해 쉬지도 않고 20리를 도망가는 동안 순욱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은 바람에 날려 그가 사랑했던 세상, 중원 천하에 뿌려지고 있었다. (6편, 조조 관상을 보다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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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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