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회 민주주의의 죽음
        2008년 12월 19일 10: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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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대한민국 의회 민주주의는 죽었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는 이날 박진 위원장 등 한나라당 소속 의원만 참가한 가운데 회의장 문을 걸어 잠그고 전체회의를 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강행 처리했다. 단 1분 만에 개의에서 FTA 비준동의안 상정까지 모든 절차가 끝났다.

    민주당 등 야당은 상정을 저지하기 위해 안에서 잠긴 회의장 출입문을 해머와 전기톱을 동원해 부쉈고, 이 과정에서 여야 의원과 보좌진이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면서 국회는 난장판이 됐다. 나라의 최고 합의기구라는 국회에 민주주의는 없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 경향신문 12월19일자 1면  
     

    다음은 19일자 전국단위일간지 1면 머리기사 제목들이다.

    경향신문 <여, FTA비준안 단독 상정 / 야당 “의회주의 유린” 반발>
    국민일보 <무법천지 국회…국민은 없었다>
    동아일보 <국민이 보든 말든…전쟁판 국회>
    서울신문 <‘무법의 전당’>
    세계일보 <망치…소화기…폭력…‘난장판 국회’>
    조선일보 <무법의 전당>
    중앙일보 <자본확충펀드 20조 조성 은행에 ‘준 공적자금’ 투입>
    한겨레 <한나라, 회의장 봉쇄 ‘FTA 날치기 상정’>
    한국일보 <막가는 국회>

    한나라, 개의에서 상정까지 1분…야당위원 회의장 출입도 못해

    국회에서 벌어진 6시간에 걸친 난투극은 한나라당 외통위원들이 FTA비준동의안을 야당 외통위원을 배제하고 단독 상정하겠다고 나서면서 시작됐다.

    회의장 안에는 전날 오후 회의장에 들어가 밤을 보냈던 황진하 간사를 비롯해 구상찬 이춘식 정몽준 정옥임 홍정욱 등 한나라당 소속 외통위원 10명이 일찌감치 들어가 있었다. 회의는 오후 2시로 예정돼 있었다.

       
      ▲ 한겨레 12월19일자 1면  
     

    오전 8시20분 민주당 외통위 문학진 간사와 송영길 의원이 회의장에 들어가려다 질서유지권 발동으로 동원된 국회 경위에게 출입을 저지당하자 보좌진 등 300여 명이 외통위 회의장 주변에 모여들어 진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0시30분부터 출입구 문을 떼어 내기 위한 해머, 망치, 정 등 ‘공구’들이 동원됐다. 멱살잡이와 욕설이 뒤섞인 가운데 11시20분쯤 출입구 왼쪽 문이 뜯겨졌다. 안쪽에서는 ‘질서유지권’ 발동으로 동원된 국회 경위들이 소파, 책상, 의자 등 집기들로 바리케이드를 쌓아 야당 측 진입은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일부 민주당 당직자와 경위들이 서로 던진 가구 파편 등에 맞아 손에 피를 흘렸으며, 회의장에 있던 한나라당 정옥임 의원은 공포에 질려 울기도 했다. 민주당은 복도 벽에 있던 소화전을 부수고 소방호스를 꺼내 물을 뿌리며 다시 진입을 시도했고, 회의장 내부의 경위들은 소화기 분말을 뿌리며 맞섰다. 양측에서 “물 대포가 등장했다” “최루탄 아니냐”는 고성이 오갔고, 회의장 밖 대형 유리창이 깨져 한나라당 보좌관이 손을 다쳐 병원에 실려 갔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회의장 안에서는 한나라당 외통위 의원 10명만 참석한 가운데 FTA 비준동의안을 상정했고, 단 1분 만에 처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페트병에 소변보며 견뎌…군사작전 방불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날 FTA 비준동의안을 상정하기 위해 7시간을 회의장 안에서 페트병에 소변을 보며 견뎠다. 김밥과 라면 등도 미리 준비할 정도로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회의장에서 “박정희 유신독재 이래 ‘날치기’를 하더라도 입장 자체를 원천봉쇄하고 처리한 적은 없었다”며 “상정은 원천무효임을 선언한다”고 고함쳤다.

       
      ▲ 국민일보 12월19일자 만평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도 “우리 당 외통위원들이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준안을 상정 처리한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분명히 잘못됐다”고 말했다.

    “박진 개인 단독드리블”이냐 “청와대의 그림자”냐

    조선일보는 이날 FTA 비준동의안 상정은 청와대와 한나라당 지도부가 아닌 박진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의 결정이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3면 <박진 소신대로?> 기사에서 “전초전이 이렇게 일찍, 그리고 이렇게 격렬하게 벌어질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주도면밀하게 추진한 것이 아니라, 박진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이 거의 ‘단독 드리블’로 치고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과연 이번 일이 지도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의원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경향신문은 이번 사태는 청와대의 의중이 실렸다고 봤다. 경향신문은 3면 <여 강공뒤에는 ‘청의 그림자’> 기사에서 “이 같은 강공 배경에는 청와대의 그림자가 비친다. ‘연말까지 정부가 추구하는 모든 법령을 국회에서 반드시 처리해줘야 한다’(홍준표 원내대표)는 지도부의 독려가 단적”이라고 보도했다.

       
      ▲ 경향신문 12월19일자 3면  
     

    경향신문은 “한 달 전만해도 ‘합의가 안돼도 일방적 상정은 않겠다’던 박진 외통위원장이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하며 총대를 멘 것이나, 여당 내부에서도 ‘회의론’이 적지 않은 한미 FTA처리에 대해 ‘목표는 연내 본회의 처리’(황진하 외통위 간사)라며 ‘30일 처리방침’을 정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된다”고 덧붙였다.

    민주주의 깬 한나라당보다 문 부순 민주당이 나쁘다?

    사태가 이런데도 동아일보는 회의실 문을 걸어 잠근 채 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 처리한 한나라당보다 회의장 문을 부순 야당의 폭력성에 초점을 맞췄다.

       
      ▲ 동아일보 12월19일자 2면  
     

    동아는 2면 머리기사 <‘문 부순 행위’ 특수공무방해죄? 공용물파괴죄?> 기사를 실어 “국회의사당에서 공사장 해머로 회의장 문을 부순 일부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인사는 형사처벌을 받게 될까.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18일 ‘용서하지 않겠다. 이미 채증이 끝났다’며 이 사안이 흐지부지 끝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문제가 된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실 안팎에서 비디오카메라 3대로 가담자의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에서는 문을 걸어 잠가 날치기 상정을 하면서 밖에서는 문을 부술 것을 예상하고 증거를 채집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한나라당은 해머 등으로 문을 부순 행위가 형법상 특수공무방해죄, 공용물 파괴죄, 폭력행위처벌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3면에서도 <공사장 해머에…빠루(쇠지렛대의 속칭)…‘무기급 도구’ 등장> 기사와 <박살난 명패…짓밟힌 신뢰 / 민노, 여 의원 명패 바닥 내동댕이쳐 민주, 나뒹구는 파편조각 발로 밟아> 기사 등에서 야당의 폭력성을 강조했다.

    동아 “민주당과 민노당 의원, 촛불 불법시위 주동자 닮아”

    동아일보는 사설 <망나니 국회…망치 들고 싶은 건 국민이다>에서 “민주당 상임위원회 활동 전면 보이콧으로 나흘째 공전하던 국회가 결국 망치소리에 무너지고 말았다”며 “어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 앞은 극소수 불법·폭력 세력이 쇠파이프와 쇠구슬총으로 법과 질서를 유린하던 촛불시위 현장을 빼닮았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한미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 상정을 막기 위해 회의실 문을 뜯어내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밧줄로 경찰차를 끌어내던 불법시위 주동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며 “망치와 전기톱으로 선거 민의를 깔아뭉개려는 두 당의 국회 내 폭력이야말로 의회민주주의의 유린이며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덧붙였다.

    세계일보도 <폭력 난무하는 ‘난장판 국회’, 없느니만 못하다>에서 “거친 욕설과 몸싸움도 모자라 망치까지 동원해 문을 부수는 민주당의 행위는 흡사 시정잡배 같았다”며 책임을 야당에 돌렸다.

    조선일보도 민주당을 비난했지만 그나마 이번 사태를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촛불시위와 연결해 논리적 비약을 저지르고 있는 동아일보 사설보다는 논쟁거리를 준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조선일보는 사설 <한미 FTA는 어느 정권이 체결했는데 해머 들고 날뛰나>에서 “민주당은 한미 FTA를 추진하고 타결한 주체세력”이라며 “이 시기에 한미 FTA를 비준하는 것이 이로운지 해로운지는 따져볼 여지가 많고 그걸 따지려면 일단 안건은 상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조선일보 12월19일자 사설  
     

    조선일보는 그러나 “단독 상정을 강행한 한나라당측 논리도 설득력이 있는 게 못 된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우리가 먼저 FTA를 처리해야 오마마측이 재협상을 못하도록 압박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오바마 당선자가 부시에게 FTA 비준안을 의회에 내지 말라고 한 것은 미국 자동차 산업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었고, 지금은 미국 자동차업계 상황이 더 악화돼 오바마 정부가 재협상 카드를 꺼낼 가능성은 더 커졌다고 진단했다.

    조선일보는 “이런 상황에서도 한나라당 주장은 여전히 믿을 만한 것인가”라며 “상황이 이러하다면 정부, 여당은 우리가 먼저 비준할 경우 재협상 요구는 사라지는 것인지, 미국 정부와 의회의 FTA 처리 방침과 구상은 어떤지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부터 내놓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향 “과거 FTA협상 때와 지금 상황 달라져…신중한 검토 필요”

    경향신문은 사설 <한나라당, 대통령만 바라보고 돌격하나>에서 “한나라당이 또 힘자랑을 했다”며 “제1야당인 민주당을 뺀 채 내년도 예산안을 강행 처리한데 이어 연말 들어 두 번째 독주”라고 한나라당을 비판했다.

       
      ▲ 경향신문 12월19일자 사설  
     

    경향신문은 “한달여 전 미 의회 FTA 비준 기류를 점검하겠다며 미국을 다녀온 한나라당 인사들은 ‘미측이 별 관심 없어 하더라’며 당초 제기된 선 비준론을 접었다”며 “그런 한나라당이 최근 이명박 대통령과 박희태 대표의 조찬회동 이후 돌변했다. 대통령 한 마디에 돌격대를 자임하고 나섰다는 의구심을 살 만한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경향신문은 이어 “미 자동차 회사인 크라이슬러 북미 전 공장이 한 달간 공장 가동을 중단키로 하는 등 비상사태를 맞은 마당에 ‘자동차 조항’을 문제 삼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가 어떤 입장을 취할지 예단할 수 없다…지난해 협상 때 계산한 경제효과가 현 위기 국면에 비춰볼 때 독이 될지, 약이 될지를 포함한 산업영향평가를 재점검할 필요도 있다”며 파국을 감수하며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고 밝혔다.

    한겨레는 사설 <날치기 악령까지 불러낸 한나라당>에서 “독재정권 시절의 날치기 악령이 다시 살아났다”며 “비준안을 단독으로, 그것도 폭력적으로 상정했다는 것은 앞으로 반대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고 가겠다는 선언”이라고 비준안 날치기 처리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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