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자학 또는 뉴라이트
        2008년 12월 22일 04: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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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참여사회연구소가 발행하는 <시민과 세계> 겨울호에 실렸다. 필자가 붙인 원제목은 「진보 좌파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인가?」이다. <레디앙>은 필자와 참여사회연구소 그리고 <시민과 세계>를 출판하는 (주)사회평론의 동의를 받아 세 차례로 나누어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주>

    1. 대한민국 긍정론 – 주자학적 역사관의 부활인가?

    요즘 역사 논쟁,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 근현대사 논쟁이 한창이다. 이명박 정부의 한 축인 뉴라이트 세력이 불붙인 이 논쟁 때문에 대한민국사가 느닷없이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뉴라이트는, 대한민국을 긍정하지 않는 역사관은 대한민국에 발붙일 수 없다고 핏대를 높이며 그간의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규탄하고 역사 교과서에 가위를 들이댄다. 또한 이러한 공격이 김대중, 노무현 전 정권에 대한 ‘부관참시’임을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바람이 진보 좌파 내부에까지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소 사회민주주의의 전도사로 자처해온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이 뉴라이트 계간지 <시대정신>에 투고한 글에서 “이제 좌파는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주대환, 2008.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 <시대정신> 제39호).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한국 근현대사 논쟁이 한창일 때 다른 곳도 아닌 뉴라이트 잡지 지면에 자칭 ‘뉴레프트’의 주창자가 이런 주장을 발표했으니 파란이 일지 않을 리 없었다.

    뉴라이트나 주대환이나 모두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무엇을 긍정해야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뉴라이트는 그 긍정의 대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뉴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긍정은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전 정권들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국부 이승만, 중흥조 박정희

    어쩌면 이것이 더 핵심적이다. 아무리 추상적인 수준에서 “나는 자유민주주의자요”라고 해도 뉴라이트에게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 찬다. 반드시 ‘국부’ 이승만, ‘중흥조’ 박정희에 대한 입장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들을 존숭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 송시열 (宋時烈, 1607 ~ 1689)

    뉴라이트는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우익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미국 문명을 숭배하는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국 네오콘과의 유대감도 사뭇 긴밀하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태도를 놓고 보면, 이들은 오히려 17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21세기의 최첨단 외피를 둘러싼 그 이면에 숨은 모습은 송시열과 노론 사대부들의 썩은 시신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역사 속에서 어떤 기원적 사건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정통성의 계보를 작성하는 것은 전형적인 주자학자들의 역사관이다.

    주자학자들에게 지금 이 시대의 올바름은 과거 역사 속 올바름의 계보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계보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이 시대의 올바름도 판가름할 수 있다.

    17세기 조선 사회에서 노론 벌열(閥閱)들이 보수적인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해나갈 때 내세운 이념적 무기들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역사관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정통 주자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사상적으로 결코 주자에서 벗어나선 안 되었고, 역사적으로는 중국 왕조사의 정통으로부터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자와 조금이라도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문난적으로 몰았고, 멸망한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사당을 짓기까지 했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관으로부터 집권의 정당성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승만-박정희 전 정권의 계보와 대한민국 역사를 동일시하고 전자에 대한 긍정만이 대한민국의 현재에 대한 긍정이라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과연 이러한 17세기 조선 주자학자들의 역사관과 얼마나 다른가?

    뉴라이트 역시 이승만의 건국 행위라는 기원적 사건을 출발점으로 삼아 박정희의 산업화, 작금의 세계화로 이어지는 어떤 정통성의 계보를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이 계보의 연장선 위에 서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즉 대한민국 안의 반(反)대한민국 분자(‘친북좌익’)로 몰아붙이고 있지 않은가? 3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정신적 근친성은 참으로 놀랄만하다.

    주자학=뉴라이트=주대환, 기원과 계보 찾기

    그런데 우리는 주대환의 글에서도 비슷한 정신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 역시 남한 좌파의 역사에서 우선 기원적 사건부터 찾는다. 그리고 그 기원으로부터 이어지는 특정한 계보들을 그린다.

    여운형에서 조봉암을 거쳐 자신의 사회민주주의로 이어진다는 계보와, 김일성, 박헌영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또 다른 좌파의 계보들을. 그러면서 전자의 올바름과 후자의 그릇됨을 대비하면서 결국 전자의 계보 위에 자리한 자신의 올바름을 주장한다.

    “우리는 NL은 김일성주의자들이라면, PD는 박헌영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박헌영은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자로서, 소련의 지령을 충실하게 따라서 국민 정서로부터 먼 정치적 판단과 결정을 여러 차례 내렸다. 그러니까 해방 당시로 소급해 본다면 PD파는 박헌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대환, 2008)

    “우리는 민족사의 정통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만 있고 대한민국에는 없다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긍정하면 좌파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긍정하면 우파라는 잘못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사상적 조상, 정치적 족보의 연원을 김일성, 박헌영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여운형, 조봉암에게서 찾아야 한다.” (위의 글)

       
      ▲ 박헌영 (1900 ~ 1955)

    이런 사고방식은 과연 조선 주자학이나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일까? 정말 역사는 이렇게 ‘올바른’ 계보와 ‘그렇지 않은’ 계보들 사이의 쟁투인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이 이 중 어느 계보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찌 해야 하는가?

    이를테면 17세기의 윤휴나 박세당 같은 사람은 어찌해야 하는가? 유학자이면서도 종내 주자학자는 아니었던 정약용 같은 이는 역사의 어느 곳에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가?

    주대환의 박헌영식 정치

    당장 필자 같은 사람만 해도 그게 걱정이다. 필자는 지금의 정치적 입장으로 따지면야 진보 좌파 내에서 주대환과 대척점에 서 있다. 주대환의 역사관에 따르면 필자는 ‘박헌영주의자’다.

    하지만 필자는 박헌영에게서 자신의 올바름의 뿌리를 찾지도 않을뿐더러 박헌영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필자 역시 주대환이 우러러보는 여운형이 당대에 박헌영보다 더 뛰어난 좌파 정치인이었으며 현재 우리의 귀감이라고 평가한다(장석준, 2006. 「한국현대사의 ‘잃어버린 리더십’ – 여운형 ․ 김규식을 중심으로」, <미래공방> 제1호. 2006).

    그렇다면 필자는 한낱 역사의 미아일 뿐인가? 제 계보도 못 찾는 반편이인가? 혹은 윤휴나 박세당처럼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를 각오해야 하는 것인가? 정약용처럼 당대의 정치에는 발도 들여놓지 말 일인가?

    이 대목에서 필자는 도리어 이런 의문을 던져본다 ― 어쩌면 주대환의 역사관은,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박헌영의 정신적 태도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박헌영이야말로 10월 혁명의 기억과 코민테른 동방노력자대학 수학 경험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기원을 찾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원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의 계보를 너무도 소중히 여겼기에 해방 정국에서 소련의 모든 지령을 묵묵히 따랐다. 스탈린주의자 박헌영의 머릿 속에서도 맑스-레닌주의는 조선 주자학의 문화적 DNA와 불건전한 교잡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주자학적 역사 정통론을 동원해 ‘뉴레프트’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논자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박헌영주의’의 기이한 재림을 연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이번에는 ‘소련식 사회주의’의 자리에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가 들어선다 할지라도 말이다.

    도대체가 현실의 어떤 국가(그게 소련이든 대한민국이든)를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는 식으로 질문하고 여기에 답하라 강요하는 것 자체가 전형적인 스탈린주의자의 태도다. 게다가 대한민국을 통째로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부정’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것 역시 전형적인 종교재판 이단 심문관의 물음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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