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의 정치자금과 책사 순욱의 고뇌
        2008년 12월 19일 08: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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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파는 도원결의 이후, 본격적인 군사행동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유, 관, 장 세 사람이 힘을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부족한 것이 많았다. 일단 군사의 숫자가 적었다. 말과 갑옷 같은 병장기와 군량미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유비, 정치 후원금 모으러 나서다

    그래서 유비는 스스로 정치후원을 조직해 볼 결심을 하고 소쌍(蘇雙)과 장세평(張世平) 같은 말(馬)장수들에게 찾아간다. 소쌍과 장세평은 탁군 일대에서 말장수로 유명한 거상(巨商)들이었다. 한족은 본시 농경민족이라 중원 천하에는 말이 귀한 편이었다. 이 때문에 말장수들은 꽤 많은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다.

    유비는 소쌍과 장세평을 찾아가 상인계층에게 황건당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과장된 화법을 동원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렇게 외부위협을 강조해놓고 ‘상황이 이러하니 결국 나에게 힘을 보태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 것이었다.

    그러나 장사치로 닳고 닳은 소쌍과 장세평은 유비의 말을 그대로 다 믿지 않았다. 황건당이 분명 황제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자기들에게까지 해로울지는 아직 판단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둘은 일단 유비를 돌려보내고 자기들끼리 의논을 계속했다.

    "이보시오. 소쌍, 황건당이 정말 상인들에게 그렇게 위험한 집단이오? 황건당이 혹시 반역에 성공할 가능성은 없소? "

    "사실 말하자면야 낙양성에 앉아있는 황제란 작자도 정치를 개판으로 해서 우리 장사에 별로 도움을 못주는 인간인 것은 사실이지 않소. 나는 아직도 관원들에게 쌓인 감정이 많소."

    "그런데 듣자하니 황건당이 처음에는 인기가 좋았으나 요즘엔 식량이 떨어지는 바람에 농가를 약탈하고 있고 그래서 오히려 욕을 먹고 있다하오. 이렇게 되면 성공하기 힘든 것 아니오?"

    "그렇게 민폐를 끼친다면야..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오만…."

    소쌍과 장세팔은 그렇게 유비를 돌려보낸 후에 한참 토론을 벌였다. 상인들은 원래 직업상 여러 가지 소문을 듣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판단을 하기는 힘들었다. 뭐하나 정확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었다.

    유비에게 보험 든 거상들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은 유비에게 정치 후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유비가 유주(幽州)성에 가서 상인들이 자신의 지원요청을 거부했다고 고하면 조정의 미움을 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다시 연락을 받고 찾아간 유비에게 두 상인은 무쇠 1천근과 100필의 말, 그리고 금은 5백냥을 주며 "천하에 처죽일 황건당을 물리쳐 주십시오!" 라는 인사를 했다. 두 상인은 어느 쪽이 이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유비에게 보험을 든 것이었다.

    그러나 유비는 기뻤다. 유비로서는 말 몇 마디로 최초의 정치 후원을 받아낸 것이었다. 이로써 동생들에게 위신도 세울 수 있었다. 결국 유비는 도원결의라는 권력의 원초적 축적을 통해서 소쌍과 장세평에게 정치후원을 받아내고, 최초의 자기 기반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구한 자금으로 유비는 궁수를 모집해 전체 대오를 500으로 늘리고 말과 갑옷 같은 무장을 갖추었다. 신속하게 대오를 갖춘 유비는 황건당에 맞서 유주(幽州)성을 사수하는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드디어 길을 떠났다.

    궁둥이를 이쪽저쪽으로 흔들며 천천히 가고 있는 말위에서 관우가 유비에게 말을 건넸다.
    "유공께서는 황건적이 5만이라던데 두렵지 않습니까?"

    (아직 도원결의를 맺은지 얼마 안되어 관우는 아직 유비를 유공劉公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하하… 어차피 질 것 같은 승부를 이기는 것이 정치의 묘미가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유비가 발휘한 최초의 정치감각 

    유비는 일부러 크게 웃었다. 자기가 내뱉은 말이 스스로 듣기에도 그럴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훈련되고 경험 있는 500명의 전문 군사로 5만 명의 오합지졸을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유비가 발휘한 최초의 정치감각이었다.

    집안에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늘 각종 불만을 속으로 삭이며 살아온 유비였지만, 이런 측면에서는 결코 우유부단하지 않았다. 유비는 사실상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기 감각을 믿었다.

    물론 병력의 수적 차이가 워낙 커서 유비도 긴장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유비는 유주성으로 가는 말 위에서 계속 같은 생각을 하며 자기 마음을 다잡았다.

    ‘이 시점에서 삶의 전환점을 만들지 못하면, 계속 집에서 엄마랑 돗자리를 짜야 한다. 어차피 이 세상은 배짱 좋은 놈들의 것이다!’

    그렇게 약해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여잡으며 유비는 유주성에 도착했다. 유주성에 도착하자 유주태수 유언(劉焉)이 유비와 그 의용군 500명을 반갑게 맞았다. 그러나 유언은 사실 유비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충 보니 시골장정들에게 갑자기 군복을 입혀서 데려온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유비군을 정규군에 편입시키기보다는 방패막이로 써먹기로 했다. 유언은 유비에게 선봉을 제안한다. 말은 선봉장이었으나 사실은 아무 지원 없이 혼자 나가서 한번 싸워보란 뜻이었다.

    작전참모 순욱과 지휘관 정원지

    이즈음, 황건당도 유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실제로 5만에 가까운 대오를 천천히 이동시키고 있었다. 이 부대는 순욱이 작전 참모로 참가하고 있던 그 황건군 부대였다.

    순욱은 황건당의 최초 봉기 이후 유주방면으로 진격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황건군 36방 중에 정원지(程遠志)가 지휘하는 제 32방면군이었다. 순욱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지략을 인정받아 이 부대에서 사령관을 보좌하며 군대의 전략과 작전, 행정 등을 책임지는 군사(軍師)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바로 이 부대가 유주성을 향해 진군하던 중 유비군과 맞붙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황건 농민군은 겉보기에는 승승장구 하고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가 쌓여가고 있었다. 일단 진격속도가 너무 느렸다. 훈련되지 않은 농민 반란군인데다 식솔들까지 데리고 나온 신도들까지 마구 뒤섞여 있다 보니 지휘 계통이 잘 먹히지 않고 중구난방(衆口難防)이었다.

    지방 군,현의 소규모 관군부대와 싸울 때는 머릿수로 막 밀어붙이면 그만이었지만 이렇게 느린 진격 속도는 대규모 중앙 진압군이 대오를 갖출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그래서 황건 반란군 사령부에서는 연일 ‘빨리 진격하라!’고 통문을 보내왔다.

    그러나 순욱은 황건군의 느린 진격 속도가 어차피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한 지역을 점거하면 잠시 동안 그 지점에서 민심을 얻어 해방구로 만든 다음,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전략을 건의 했다.

    그러나 지휘 책임자였던 정원지는 생각이 달랐다. 진격속도가 늦으면 늦을수록 적이 군대를 정비할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이라 판단했다. 정원지는 무조건 빠른 진격을 원했다.

    농민군이 폭도로 변한 이유

    문제는 식량이었다. 이미 봉기할 때 가지고 나온 식량은 다 바닥이 났고 대오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들을 먹여야 할 식량을 어디서 조달해야하는지가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원지는 빠른 진격을 위해 농민군에게 민가에 대한 약탈을 허용한다. 사실 점령지에 진주해서 군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오래된 관습이었다. 정원지는 무예를 연마한 적이 있고 소규모 군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있어 지휘관으로 발탁된 사람이었다. 정원지는 과거에 자기가 듣고 배웠던 식으로 군사를 움직였던 것이다.

    물론 이런 방침은 순욱과 의견 충돌을 빚었다. 점령지를 안정시켜 민심을 얻으면서 차츰 차츰 나아가자는 순욱의 ‘점진 진격전략’과 신속하게 군량미를 확보해 최대한 빨리 낙양으로 쳐들어간다는 정원지의 ‘신속 진군전략’이 충돌한 것이었다. 이것은 민심의 확보를 주된 목표로 할 것인지, 아니면 적의 타도를 주된 목표로 할 것인지의 고민이었다.

    그러나 결정권자는 정원지였다. 황건 농민군은 점령지의 민가에서 식량을 마음대로 꺼내먹기 시작했다. 황건군이 지나간 곳은 메뚜기 떼가 휩쓸고 지나갔다고 할 정도로 곡식의 씨가 말라버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정원지 부대뿐 아니라 거의 모든 황건 반란군에게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순욱에게는 이 때부터 황건당의 명칭이 ‘황건적’으로 대중화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순욱에게 이것은 ‘고상한 목표를 위해 천박한 수단을 동원하는’ 오류였다.

    ‘농민을 위한 반란을 위해 농가에 대한 약탈을 허용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한 태평세인가? 이것은 썩은 조정과 싸우다가 바로 그들을 닮아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욱의 고뇌

    순욱이 동의할 수 없는 문제는 또 있었다. 황건당은 일단 점령한 지역의 관리들은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순욱은 아무리 관원이라도 불필요한 살상을 하면 안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으나 이미 황건당 내부는 모든 관원을 구분 없이 타도해야 할 적으로 생각하는 관성이 지배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순욱은 "내가 이 꼴을 보려고 황건당에 투신했는가?" 라는 심각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는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반역의 시간이었다. 순욱의 불만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순욱은 황건군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가슴에 품은 채 몸은 계속 정원지의 지휘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황건 농민군이 유주성 코앞까지 진격해 오자, 유주 태수 유언은 성이 포위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유비에게 성 밖에 나가 황건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졸지에 선봉이 된 유비는 500명의 정치적 가족들과 성 밖으로 나가 황건군과 대치를 시작한다.

    유비가 대흥산(大興山) 밑의 작은 언덕에 올라 멀찍이 서있는 적진을 바라보니 적의 숫자가 5만이라고는 하나 제대로 무장을 갖춘자는 수천에 불과한 것 같았다. 나머지는 농기구를 날카롭게 갈아서 만든 이상한 무기들을 하나씩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갑옷을 입은 자는 거의 볼 수 없었고, 특히 활을 든 궁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말을 탄 자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황건군은 진법(陣法)에 대한 기초상식도 없는 것 같았다. 황건군은 군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병과(兵科)의 구분도 없이 그냥 넓게 퍼져 있었다. 유비는 속으로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터에서의 논쟁

    그것은 사실이었다. 5만명 중 절반이 아이와 노인 등으로 이뤄진 일종의 피난민 집단이었다. 이들은 실제 전투부대라기 보다는 솥과 식량을 들고 다니며 밥 짓고 빨래하는 등의 지원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은 절반의 절반도 점령지에서 징집해온 군사들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끌려와 별로 소속감도 없었다. 말이 군사였지 복장도 농민복이었고 궁수와 기병, 검병과 창병 같은 조직적 분화가 없는 군대였다. 황건당은 이러한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상대를 지레 겁먹게 만드는 전술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전투에 앞서 순욱이 정원지에게 건의했다. "장군! 적은 숫자가 적으나 정예군이고, 우리는 숫자가 많으나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입니다. 장수들 간의 결투를 회피하고 막바로 엉겨 붙어 싸워야 숫자상의 우위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정규군의 군사행동을 따라하지 말고 농민군의 특성을 살려서 우리에게 유리한 전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부터 의견 대립을 겪던 정원지는 순욱의 건의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게다가 순욱이 같은 편을 오합지졸이라고 하니 말은 맞는 말이지만 은근히 부하가 치밀어 올랐다.

    "이보시오 책사! 전쟁터에 나온 장수가 목숨을 아껴서 어쩌겠다는 거요. 장수가 모범을 보이지는 못할망정 힘없는 농민들을 앞에 세우고 나는 뒤에 서서 지시나 하란 말이오? 나는 인생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소."

    정원지는 그렇게 순욱의 의견을 확 잘라버렸다. 순욱은 자기의견이 한칼에 무시되자 갑자기 큰 상실감이 밀려왔다.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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