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에서 사회주의까지
    2008년 12월 16일 10: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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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금융위기와 관련하여 금융규제와 금융감독의 실패가 많이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어 상업은행 업무와 투자은행 업무의 겸업을 금지해왔던 글래스-스티걸법에 의한 규제를 폐지한 것도 그 중의 하나로 지적된다.

전통적인 상업은행의 대출업무와 달리 각종 증권발행과 M&A 업무 등을 주로 취급하는 투자은행 업무는 높은 레버리지(부채)를 기초로 고위험 투자를 함으로써 고수익을 추구하는 것을 그 본성으로 한다.

그런데 낮은 위험의 안정적 수익을 추구하는 대출업무와 고위험 고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은행업무의 겸업이 허용되자 투기적인 투자은행 문화가 상업은행 문화를 압도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또한 2004년 4월경 대형투자은행들이 부채비율을 자기자본 대비 12배에서 30배까지 늘릴 수 있도록 건전성 규제를 완화하자 리먼브라더스를 비롯하여 고수익을 추구한 대부분의 투자은행들은 30배까지 레버리지 비율을 높여 고위험 비즈니스를 추구했고, 이러한 투자은행들의 높은 레버리지는 거품이 생산되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나아가 그린스펀 등 신자유주의적 시장주의자들이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의 도입을 막고 이를 시장의 자율에 맡기자고 한 것도 큰 실수로 지적된다. 세계 1위의 보험회사였던 AIG는 전통적인 보험업무가 아닌 파생상품 보증업무를 통해 고수익을 추구하다가 망하고 말았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차이

하여튼 스티글리츠가 지적하듯이 경제적 인센티브가 주어지는 경우 사람들은 그러한 인센티브를 중심으로 자신의 행동을 조율한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단기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봉쇄해왔던 규제가 폐지되면 사람들은 사회에 장기적으로 유익한 합리적 행동을 하기보다는 불합리하지만 자신에게 사적으로 단기적 이익을 제공하는 위험한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맹자의 성선설보다는 순자의 성악설이 인간행동 규제에 관한 철학적 원칙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투자은행들이 폭탄 돌리기 게임(거품조성게임)을 해온 과정을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장기적으로는 사회 전체에 매우 위험할 수도 있는 폭탄 돌리기 게임을 하지 않으면 투자은행들은 연간 10 정도의 정상이익을 취득할 수 있고, 이러한 경우 사회가 입을 피해는 없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폭탄 돌리기 게임을 하게 되는 경우 투자은행들은 연간 50의 단기적 이익을 취득할 수 있는 반면,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적으로는 매우 큰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자. 다만, 폭탄이 언제 터질지는 알 수 없고, 상당한 기간이 소요된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폭탄 돌리기 게임이 시작된 이후 폭탄이 터지기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렸고, 폭탄이 터짐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 발생한 손실이 1000이며, 그 중 투자은행들이 100의 손실을 부담했다고 하자.

그 결과 10년의 게임기간 동안 투자은행들은 게임을 하지 않은 경우에 비해 300이라는 순이익을 더 취득하였고, 손실의 대부분인 900을 사회가 부담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하자.

이러한 구조라면 투자은행으로서는 사회에 900의 손실을 끼치게 되더라도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무조건 이득이다. 규제에 의해 게임이 금지되었을 경우 투자은행들은 10년간 100의 순이익만을 취득할 수 있지만, 규제가 없는 상태라면 사회 전체적으로 900의 손실을 떠안기더라도 300의 순이익을 취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손실은 사회화되지만 투자은행 임직원과 주주 등 게임의 수익자들은 300의 순이익을 사적으로 취득한다.

투자은행의 게임법칙, 위험의 사회 전가

현재 미국 금융위기로 발발한 세계자본주의의 공황상태가 1929년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가 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향후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쇠퇴하고 정부에 의한 규제를 선호하는 케인즈주의가 다시 득세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케인즈주의가 어느 정도 득세하더라도 계급타협과 자본이동 규제까지 포함한 케인즈주의 좌파의 수준까지 갈 가능성은 높지 않은 상황이다.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가 대립하는 핵심적인 지점은 정부규제에 대한 양자의 대립되는 입장이다. 시장이 자기조정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정부의 규제는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신자유주의라면 케인주주의는 시장의 자정능력을 믿기 어려우므로 시장의 실패를 막기 위해 정부가 적절한 규제를 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규제라는 측면에서 사회주의가 가장 철저하고, 신자유주의가 가장 느슨하며, 사민주의가 그 중간인데, 케인즈주의 좌파의 입장 정도가 사민주의의 이론적 기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본성의 선함을 신뢰하지 않고, 성악설적 입장에서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가장 철저하게 규제함으로써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 사회주의였다면, 인간이 자율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는 성선설적 환상에 기초하여 시장에 의해 운영되는 조화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이 신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사민주의는 기본적으로 성악설적 관점에 기초하면서도 이데올로기적 믿음보다는 역사적 현실에 부합하는 규제를 통해 자본주의를 제어하고자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시장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폐한 다음 계획경제를 도입했다. 법적인 형식에서 사회주의 체제는 사적 개인 사이의 거래를 규율하는 민법(상법)이 아니라 정부가 정한 기준인 행정법에 의해 지배되었다.

행정법에 의거하여 과도한 규제를 하다 보니 사회는 관료화되었고, 암시장과 텃밭이 계획경제의 필수 보충물이 되었다. 일반적 행동자유에 대한 과도한 제약은 결국 사람들에게 거의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의 규제 경직성

의식주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욕구를 포함하여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과도하게 규제하려다 보니 사회주의는 경직된 이데올로기적 훈육시스템과 위반자를 제재하기 위한 정교하고 억압적인 통제수단들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러한 통제수단들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정교해질수록 대중은 수동적으로 되어간 반면 체제운영에 필요한 노멘클라투라와 같은 상층관료계급이 득세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결국 과도한 규제는 전반적인 비효율성을 초래했으며, 역사적으로 실패한 실험으로 끝나고 말았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현실에 있어서 경제적 강자와 약자로 분할되어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에는 눈을 감은 채 인간에 대한 성선설적 자기 기만에 기초하여 모든 규제를 폐지하고 합리적인 인간이 시장을 통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규제를 철폐하면 조화로운 이상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자유롭고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비현실적 가정과 이러한 가상적 인간들 사이에 공정하고 효율적인 거래가 가능하다는 비현실적 논리는 결국 실제 현실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 자본과 소수 지배계급에 의한 독과점적 시장지배와 노동착취 그리고 불공정한 거래현실을 기만적으로 미화하는 자기도취적 환상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이란 “자기증식하는 가치”로서 정의된다. 죽은 노동에 해당하는 불변자본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며, 오로지 산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 그리고 산 노동이 창출한 가치 중 임금 몫으로 분배되는 부분을 초과한 잉여가치가 지대, 이윤, 이자의 원천이 된다.

시장에서의 경쟁과 수요, 공급의 법칙 등을 매개로 평균이윤율이 형성되고, 산 노동에 의해 창출된 잉여가치는 이러한 평균이윤율을 기초로 지주, 산업자본, 상업자본, 금융자본 등 다양한 유형의 자본 분파에게 배분된다.

결국 지금 전세계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은 금융자본은 직접적으로는 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이라고 볼 수 없으며, 자금중개기능을 통해 이윤을 배분 받는 기생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0여 년의 기간에 걸쳐 금융자본 주도로 IT 기술의 발전과 규제완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 등에 기초하여 전 세계적으로 자본의 금융화, 증권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물자본의 금융자본에 대한 종속이 심화되고, 투자를 매개로 한 비임금 자본이득의 규모가 커져온 반면, 임금소득의 비중은 점점 낮아지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실물과 괴리된 극단적 자본 분파인 금융자본이 대출업무를 중심으로 적정한 이윤을 배분받는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고 투자은행업무를 중심으로 전 세계 노동자들이 실물경제를 통해 창출한 잉여가치 이상의 몫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금융위기가 배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화폐에 의해 지배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에서 인간이 그 합법칙적 본성으로서 가지게 되는 과도한 탐욕이 근본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성선설

성선설적 인간관에 기초한 신자유주의적 규제완화 이데올로기는 위와 같은 과정을 합리화한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규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할 경우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이 가진 평범한 욕망은 그 고삐가 풀리고 반드시 과도한 탐욕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 번 금융위기가 증언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무너지고야 말 바벨탑을 열심히 쌓아올리는 인간의 탐욕 자체가 바로 지금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인간들의 본성이라는 사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회의 희생 하에 오로지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모래 속에 처박은 타조와도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오히려 재벌과 건설자본의 탐욕을 부추기는 규제완화정책을 열심히 추진하려고 한다. 부유층에 대한 세금감면, 재벌관련 규제 완화, 금산분리 규제 완화, 교육과 의료 영역의 시장화, 개발을 위한 환경관련 규제 완화 등과 같은 정책들이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추진되고 있다.

미국 금융위기의 참혹한 결과를 보면서도 머리를 타조처럼 모래에 묻은 채 한국사회의 재벌과 부자들의 탐욕을 풀어주어 이들로 하여금 한국사회에 거대한 바벨탑을 쌓는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민폐를 끼친 미국의 투자은행들과 이명박 정부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단임 대통령제가 단기 업적에 대한 강박관념의 유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실용주의적 잔머리 굴리기 차원이 아닌 확고한 신념에 가까운 것 같다. 신념 또는 믿음이라는 것은 비판과 토론을 불허하며, 심지어는 명백한 잘못도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조차 그 존재를 부인할 정도로 무서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한국사회는 장기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굳은 신념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키고 한나라당으로 하여금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해준 국민들로서는 뼈아픈 경험이 될 것 같다.

민주주의가 대중의 집단적 지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현실, 역사는 그렇게 시차를 두고 우회하면서 헤겔의 이성의 간지처럼 자신의 길을 냉혹하게 가는 것일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 자체가 이명박 정부 탄생의 일등 공신이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초래한 재앙은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할 것인가. 향후 어떤 정부를 원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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