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농성장의 열혈 네티즌
        2008년 12월 15일 10: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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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즐겁지 않았다. 광화문 그 뜨거운 ‘촛불 광장’에서 발랄한 군중들이 너무 부러워서 슬펐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초라한 농성장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비정규직 싸움을 하는 우리는 왜 외로울까, 그리고 심지어 불쌍할까? -권수정 씨 칼럼 중

    ‘촛불 시민’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 불과 몇 달 전까지는 꽤나 낯선 말이었다. ‘촛불 광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밝혔지만, 이들의 존재와 목소리는 거대한 함성 속에 묻혀버리곤 했다.

    촛불이 잦아들자, “광우병 쇠고기 반대”를 외치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어떤 이는 “촛불을 밝힐 동력이 떨어졌다”며 ‘광장’을 떠난 이유를 밝히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나”고 말하기도 했다.

       
      ▲ 농성장 한편에 앉아 있는 류씨가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손기영 기자)

    하지만 꺼져가는 촛불을 다시 밝히고, 그 불씨를 ‘광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장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는 ‘열혈 네티즌’이 있다. 인터넷카페 ‘안티 이명박’의 부대표이자,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활동에 동참하고 있는 류한림 씨(닉네임: 윤활유, 43)이다.

    “이 대통령의 ‘부도덕성’이 싫다”고 말하는 류씨는 올해 2월 숭례문 앞에서 열린 인터넷카페 ‘안티 이명박’ 집회에 참석한 뒤 카페회원이 되었으며, 지난 5월 2일부터 시작된 촛불문화제에서는 카페 운영진을 맡으며 ‘촛불 광장’을 누볐다.

    그는 지난 5월 2일부터 6월 말까지 매일 카페회원들과 촛불문화제 현장을 찾았으며, 지난 5월 하순 처음으로 벌이진 거리행진한 이후 거리행진에 매번 참여하다시피 했다.

    지난 11일 오후, 가산동 기륭전자분회 농성장에서 류한림 씨를 만났다. 이날 기륭분회 조합원 대부분은 ‘통일문제연구소 후원의 밤’ 참석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지만, 그는 묵묵히 오석순 조합원과 함께 텅 빈 농성장을 지키고 있었다.

    “날씨가 춥지 않나”며 인사말을 건넨 류씨는 기륭분회 조합원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컨테이너박스 안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촛불 광장’에서도 뵌 것 같은데, 농성장에서도 얼굴을 또 뵙는 것 같다”는 농담을 던지자, 그는 잠시 웃더니 한 기륭분회원의 말부터 들려줬다.

       
      ▲ 류 씨는 ‘안티 이명박’,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활동을 돕고 있다 (사진=손기영 기자)

    “한 조합원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촛불집회 때, 우리가 나가도 되는지 망설여졌다’는 말이었죠. 예전에 청계광장이나 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 때 정말 다양한 분들이 참여하셨는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은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시민 분들은 ‘광우병 문제’는 절실한 문제로 생각했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내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현장에 나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 ‘복직 문제 등이 해결되면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팽배했었죠.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할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었죠. 지금도 일부 시민은 비정규직 분들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류한림 씨는 지난 8월, 박원석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 ‘안티 이명박’ 수석부대표인 ‘초심(닉네임)’ 등 ‘촛불수배자’들이 조계사에서 농성을 벌일 때, 현장으로 달려가 수배자들의 농성활동을 돕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비정규직 농성장과 인연을 맺게 된 우연한 기회가 찾아온다.

    “어느 날 조계사 농성장에 송경동 시인과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오셨어요.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제게 ‘촛불 안에는 변호사, 회사원, 비정규노동자 등 모든 국민의 뜻이 담겨있는데, 비정규직이냐 일반 시민이냐 나누는 건 의미가 없지 않나’며 ‘비정규직들과도 연대를 할 수 있지 않나’는 이야기를 했죠.

       
      ▲ 지난 10월 20일 시민들에게 방패를 휘두르고 있는 전경들 (사진=손기영 기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잘 알진 못했지만, 평소 이들과도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죠. 또 그 때 카페회원들과 촛불의 새로운 동력에 대해 고민을 하던 참이었어요. 송 시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어요. 결국 ‘악덕 자본에 맞선 국지적 싸움이지만, 넓게 보면 신자유주의적인 MB정부와 싸우는 의미 있는 전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9월 초 기륭전자분회 농성장과 인연을 맺게 된 류한림 씨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폭거’에 다시 한 번 치를 떨게 된다. 당시 마주친 농성장의 상황을 설명하는 그의 표정은 분노로 가득했다.

    “제가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농성장에 오니까 눈물부터 났어요. 사용자면 최소한 ‘직원의 생계는 책임진다’는 생각은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기륭전자 사용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자신의 부를 위해 움직이는 ‘기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기륭의 현실을 보니까 자본가들이 더 미워졌어요. 건설회사 사장 출신인 MB처럼 말이죠.

    그리고 양심 있는 자본가들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 돈을 벌어도 지탄하지 않는 세상이 더 문제에요. 경제 수치를 올리기 전에 노동자들을,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폐기처분하는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성숙한 자본가, 사회적 인식이 이뤄져야 한다고 봐요.”

    류한림 씨는 지난 9월 초부터 1주일에 2~3번 씩 기륭분회 농성장을 꾸준히 찾으며,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류씨에게 ‘농성장 활동기’를 부탁하자, 머리를 긁적이면서 “명박이 끌어낼 때까지 술을 먹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여기에 오니 사람들이 좋아 술만 느는 것 같다”며 쑥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애썼다.

       
      ▲ 지난 10월 20일눈 주위에 부상을 당해, 응급실로 이송되고 있는 류씨 (사진=손기영 기자)

    “제가 솔직히 말주변은 별로 없지만, 기륭분회 농성장에 ‘자유발언 연대’는 많이 한 것 같아요. 특히 농성장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경찰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죠. 그 중에 ‘집 잘 지키라고 머슴을 부렸더니, 머슴이 키우는 개가 주인을 물었다’는 발언이 기억에 남네요.

    또 볼리비아 헌법을 보면 ‘인권을 짓밟는 등의 행동을 상급자가 시켰더라도 이를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어요. 촛불집회나 농성장에서 경찰들이 상급자가 시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자비한 진압을 벌이기도 하는데요. 상급자가 인권을 탄압하는 행위를 지시하더라도 거부할 수 있는 공무원이 우리나라에는 왜 없을까요?”

    잠시 열어놓은 농성장 컨테이너박스 출입문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류씨는 잠시 눈을 비비며, “햇빛을 바로 보면 안 된다”고 말한 뒤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그는 지난 10월 20일에 발생된 기륭농성장 침탈사건 때, 현장에 투입된 전경이 휘두를 주먹에 왼쪽 눈을 맞아 시력을 잃은 상태다.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그의 표정을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이날 오전에 농성장이 침탈당하고, 오후에 이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어요. 집회가 끝나고 정문 앞에 김소연 분회장이 올라갈 철탑이 세워졌죠. 철탑이 쓰러지지 않게 다른 시민 분들과 아래를 잡고 있었는데, 전경들이 저희들을 공장 안으로 끌고 들어갔어요. 끌려간 시민들은 용역들한테 마구 맞았고요.

    저는 재빨리 정문 옆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경이 공장 안으로 끌려가는 한 시민한테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했어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무슨 욕을 그렇게 심하게 하나’고 항의했죠. 잠시 후 그 전경은 제 눈 부위를 주먹으로 가격했어요. 저는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의식을 잃었고 잠시 뒤 깨어나니, 눈이 떠지지도 않았고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 사진=손기영 기자

    류한림 씨는 당시 큰 부상을 당했지만 그 이후로도 꾸준히 기륭분회 농성장을 찾고 있다. 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촛불네티즌 단체’들을 모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연대모임을 구성하는 데 분주하다.

    “사실은 한 목소리인데, 서로의 차이점만 드러내는 게 속상해요. 현재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의 활동을 돕고 있는데, 앞으로 이 단체를 중심으로 더 많은 단체들이 참여하는 ‘비정규직 연대모임’을 만들고 싶어요. 모임이 잘 구성되면, 예전에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에 버금가는 큰 힘이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리고 촛불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통해서요. 이제 ‘촛불 시민’들에게도 비정규직 연대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퍼진 상태에요.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촛불 시민’들에게 다가가려고 많은 노력을 했어요. 그 성과들이 지금 조금씩 나타나고 있어요.”

    인터뷰 말미에 문뜩, 류씨가 ‘윤활유’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연이 궁금해졌다. 농성장에서도 그의 이름보다는 ‘윤활유’라는 닉네임을 부르는 조합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혹시 본인의 이름(류한림)과 어감이 비슷해, 그런 닉네임을 쓰나”고 묻자, 그는 손사레를 치며 “나름 의미가 있다”며 웃음을 지었다.

    “기계처럼 사회에도 윤활유가 없으면, 삐걱거리게 되잖아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연대하려면,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해야 하잖아요.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서, 윤활유라는 닉네임으로 활동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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