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비파 특유의 조직문화 싹트다
        2008년 12월 12일 11: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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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억수씨

    동문수학

    ‘관운장이라고?!’

    한번 만난 사람도 늘 잘 기억하며 친하게 지내던 유비는 관운장이라는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상대는 얼굴도 어디선가 한번 본 듯한 얼굴이었다.

    ‘저 말상을 어디서 봤더라?’

    그러고 있는 순간, 그 때서야 약간 정신이 든 장비가 갑자기 화를 내며 유비에게 대들었다.

    “아니 형님은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나만 욕하는 거유, 저 말대가리처럼 생긴 놈이 누군지 알기나 하고 지금 떠드는 거요? 내 저 놈의 목을 당장 날려버려도 속이 시원치 않을 마당에….”

    “어허! 아우는 입을 조심하시게!”

    유비가 좀 더 생각해 보니 그 관우라는 남자는 예전에 노식선생 문하에 있을 때, 아주 잠시 만난 적이 있던 인물이었다. 유비는 다른 건 몰라도 인간에 관한 한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상대를 기억해낸 유비가 그 관씨 성을 지닌 남자에게 미소를 지으며 호기롭게 말했다.

    "아니 관공은 어찌 동문도 몰라보시오!"

    관우는 그 소릴 듣고 갑자기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동문이라고?!’

    못이기는 척 싸움을 끝내고

    사실 관우는 노식 선생 문하에서 공부한 적은 없었다. 단지 아주 오래전에 며칠 동안 노식의 집에서 식객으로 잠깐 머문 적이 있었을 뿐이다. 그 때 잠시 스쳤던 것을 유비가 기억해내 졸지에 동문으로 엮어버린 것이었다.

    유비는 과거의 사소한 인연을 들춰내 결국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둘의 화해를 주선한다는 미명하에 씩씩거리는 두 호걸을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 둘 다 처음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이 싸움을 계속하려 들었지만 벌써 70~80합 째 부딪히면서도 승부를 못낸 두 남자는 속으로 이미 상당히 지쳐 있었다.

    공히 싸움에서는 져본 적이 없는 무사들이라 상대의 강인함에 적지 않게 놀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실 장비가 너무 씩씩거리지만 않았다면 관우도 굳이 이렇게 객지에 와서 모르는 사람과 목숨을 다툴 정도로 진검승부를 벌일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유비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싸움을 그만두고 유비의 손에 이끌려 함께 주막으로 향하게 되었다.

    사실 관우와 장비가 싸우게 된 데에는 그리 대단한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장비와 유비가 손을 잡은 뒤로 누상촌 일대에 힘 꽤나 쓴다는 유협들은 모두 장비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 구역에 관우와 그를 따르는 일련의 낯선 무장집단이 나타나자 장비가 텃세를 부리다가 그만 한바탕 큰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유비, 관우를 형님으로 부르다

    주막에 당도해 자리를 잡자 관우가 정식으로 자기 소개를 하였다.

    " 나는 원래 하동 혜량 태생이나 그곳 토호 놈이 양민을 괴롭히고 백성을 못살게 구는 통에 관아에 들어가 아전 놈들을 몇 놈 때려주고 도망쳐 5년째 강호를 떠돌고 있는 중입니다. 최근에는 조정에서 의병을 찾는다기에 이에 응해보려 길을 구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비는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관우에 대한 맹렬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바로 자신도 얼마 전에 탁현의 현위를 두들겨 팼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하여튼 벼슬 하는 놈들은 다 잡아다 족쳐야 된다니까!"

    그렇게 서로 술잔을 돌리며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다들 취기가 돌아 모두들 형님 동생 하게 되었다. 특히 유비가 갑자기 관우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이를 따져보니 관우가 유비보다 한 살 많았던 것이다. 그 덕에 장비는 자동으로 막내가 되었다.

    유비가 약간 혀 꼬부라진 소리로 관우에게 말했다.

    "운장 형님, 사실 저희들도 황건적 토벌대에 참가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운장 형님도 괜찮으시면 저희들과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혼자 의병이 되는 것보다는 우리끼리 독자 대오를 만들어 움직이는 편이 공을 세우기에도 더 낫지 않겠습니까?"

    "유공, 사실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저도 이번에 공을 세워 하동에서 관속들을 폭행한 죄를 사면 받고 정착해서 살아볼 계획입니다."

    "그렇다면 잘 되었습니다.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내일 당장 다시 모여서 거병(擧兵)을 도모해 봅시다. 우리 집 뒤편에 복숭아밭이 있는데 두 형님들 모두 그리 모이시오."

    성질 급한 장비의 말이었지만 농민군이 시시각각 진격해 오고 있는 상황이라 급한 결정을 하자는 제안이 맞는 말이었다.

    도원결의와 세 명의 이해관계

    이로써 이들 세 사람의 이해관계는 급속하게 맞아 떨어졌다. 어차피 관우와 장비는 둘 다 관원을 폭행한 전력이 있었고 이 기회에 그 오점을 털어버리고 싶어했다. 또 유비는 패(牌)를 형성해 세력을 얻고 싶은 오랜 욕망이 있었다. 그렇다면 각자 개인자격으로 의병에 응할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부대를 형성해 큰 공을 세우는 편이 모두에게 유리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미 일정하게 전문적인 무력을 갖고 있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초고속 의기투합을 이루었다. 관우와 장비가 불과 몇 시각 전에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는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봤다면 정신분열을 일으킬 정도로, 그 인간들은 벌써 친분이 두터운 형제들로 바뀌어 있었다. 싸우고 나서 친해지는 딱 그 꼴이었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관우가 아침에 일어나 전날의 일을 곰곰 되짚어 보니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 위상을 정하는데 그냥 나이 순으로 정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누군가 벼슬을 해도 그렇고 정권을 잡아도 그렇고 분명히 문사(文士)인 유비가 맏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은 장비도 마찬가지였다. 무식한 장비가 봐도 관우가 맏형이라는 것이 좀 이상했다. ‘아니 그렇다면, 전투를 벌일 때 무사인 관우형님이 지시를 하고 선비인 유비형님이 명령을 받아 뛰쳐나가 싸워야 하는가? 게다가 관우는 갑자기 외부에서 나타난 인물이 아닌가?’ 그런 고민이 생겼다.

    그래서 다음날 정작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눈치 빠른 관우가 스스로 유비에게 형님이 되어달라고 청했다. 사실 유비도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이 맏형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단지 술 먹고 기분이 좋아 잠시 관우를 형님이라고 불렀던 것일 뿐, 사실 속내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삼국시대 100년 동안 유비가 관우를 형으로 불렀던 단 하루가 있었던 셈이다.

    유비파의 출범

    그렇게 전날의 어이없던 술자리를 다시 정리하고 세 사람은 본격적인 거병(擧兵)행사를 시작했다. 모든 제사 준비는 약간의 재물을 모아두었던 장비가 했다. 유비는 자신이 손수 지은 결의문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달랑 입만 달고 왔고, 관우도 자신을 따르는 약간의 무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빈 손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복숭아밭에 찾아 왔다.

    그렇게 유비, 장비를 따르던 인근의 유협들과 관우를 추종하던 일단의 전문적 무장 세력들이 총동원되어 한자리에 모이니 3백이 넘었다. 유일하게 그나마 저축해둔 재물이 있던 장비는 흰말 한 마리와 검은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이들 300명의 무협집단에게 큰 잔치를 벌여 주고 유비파의 출범을 자축했다.

    유비가 제문을 읽었다. 형식은 제문이었지만 실질은 일종의 관계 강령이었다. 그 강령에는 천하와 이 사회에 대한 꿈과 이상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자기들끼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 우리 세 사람은 오늘로 형제의 의를 맺게 됨을 이제 천지신명 앞에 고합니다."

    유비는 그렇게 우선 삼형제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시작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세상은 모름지기 신뢰의 연결관계 입니다. 신뢰의 붕괴는 모든 것의 붕괴입니다. 우리 삼형제는 오늘 이후 내가 다른 형제로부터 먼저 배신당하지 않는 한, 내가 먼저 형제를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배신이 확인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서로의 신뢰관계를 지킬 것임을 맹세 합니다. 우리 삼형제가 오늘 맺은 형제의 의를 굽어 살펴주시고 지켜주시옵소서."

    즉 먼저 당하기 전까지는 무조건 의심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논리적 약속’이었다. 우회적 표현을 배제한 다소 노골적인 결의문이었다.

    노골적 결의문

    제문을 읽고 잔을 한 잔 올리자마자 유비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전면적이고 무조건적인 관계를 나는 얼마나 기다렸던가?’ 유비는 감개무량했다.

    유비파가 명시적인 합의보다는 무형의 신뢰로 움직이는 특유의 조직 문화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 부터였다. 그들은 어차피 끊임없는 감시와 불신으로 조직이 오래 갈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신뢰라 함은 어떤 근거를 갖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작정 믿는 것이었다.

    유비는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황실의 먼 친척이라는 것도 어떤 증거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단지 유씨라는 것 말고는 정확한 사실은 나 자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이걸 누가 확인할 것이란 말인가? 그 놈의 종이 쪼가리나 문자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믿음일 뿐이다.’

    유비는 사실 전형적인 빈대형 지도자였다. 유비는 자신을 따르는 세력들에게 어떤 물질적 보상도 해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유비는 늘 후배들에게 얻어먹고 다녔다. 장비를 살려준 뒤로는 거의 장비가 유비를 먹여 살리다시피 했고 도원결의 할 때 비용이나 그 후 몇 백명의 사병을 운용할 때 들었던 비용을 모두 장비가 부담했다.

    빈대형 지도자, 유비

    그러나 장비에게 유비는 소중한 형님이었다. 유비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처음 정치를 가르쳐 준 사람이기도 했다. 장비에겐 유비와의 인연이 고맙기만 했다. 유비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저잣거리에서 패싸움이나 하고 다닐 판이었다.

    그래서 유비는 장비에게 꿈이자 희망이었고 사실상 삶의 전부였다. 장비는 전 재산을 털어 이날 출범한 유비파의 모든 물적 기반을 혼자 다 제공했다. 몸 바치고 돈 바쳐서 유비의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래서 장비는 스스로 유비파의 최대 지주라는 생각이 있었고 그만큼 보상심리도 강했다.

    관우도 새로 알게 된 유비를 맘에 들어 했다. 황건적을 진압해 공을 세우자는 계획도 괜찮았다. 유비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아랫사람들을 우대하였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으며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욕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또 작은 일에도 칭찬을 자주 해 심지어 장비도 춤추게 하였다. 이런 성격들이 관우에겐 맘에 들었다.

    그래서 관우는 어쩐지 유비와 함께 한다면 평생 대우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우는 형식적으로는 정치적 상하관계를 분명히 했지만 사실상 유비의 동업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관우는 무엇보다 대의명분을 중시하여 남들에게 ‘내가 지금 이런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이 때문에 관우는 유비가 명분상 유 황실의 후손이라는 점도 무척 맘에 들어 했다.

    어찌되었건 이로써 유비는 생애 최초의 권력기반을 갖게 되었다. 맨 주먹으로 시작한 작은 출발이었지만 권력의 시작이란 모름지기 원래 이렇게 작은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 실망할 일이 아니었다.

    신뢰의 축적 체제

    오히려 무엇보다도 지속적인 신뢰의 축적을 이룰 수 있는 ‘축적 체제’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유비의 삶에서 분명히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향후 수없이 반복된 인류 역사의 그 모든 도원결의를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유비는 도원결의를 마치며 다시한번 자신의 작은 성공에 뿌듯해 했다. 그리고 흙바닥에 전부터 좋아하던 글귀를 적어 보았다.

    ‘패이밀리(牌以密理)’ 패로써 이치에 다가간다..

    유비는 이때부터 두 형제인 장비, 관우와 함께 자고 함께 먹었다. 이것은 유비가 두 동생들에게 물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 미안한 마음을 몸짓으로 대체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먹고 자기를 함께 하는 것은 가족의 행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때부터 무조건적인 신뢰로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정치적 가족을 패이밀리(牌以密理) 라 부르게 되었다. (계속, 5편은 유비와 황건당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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