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性의 극한을 보여주는 '볼만한' 영화들
    By mywank
        2008년 12월 12일 12: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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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네마 천국의 한 장면. 

    영화에 대한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면 모든 영화의 키스신들은 마을 신부가 울리는 검열의 종소리에 싹둑싹둑 잘려나간다. 음란하다는 이유로. 그러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한 노인과 소년 사이를 잇는 소통의 영상으로 되살아나면서 그 음란했던 장면들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의 추억으로 전환된다.

    키스신들의 향연이 이어질 때 어른이 된 소년은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현재의 자신을 용서하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도대체 음란하다는 건 뭘까?

    선사시대의 포르노그래피

    포르노그래피는 인간이 이미지를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이래 줄곧 존재해왔다. 선사시대 암각화나 조각에서 거대한 남근을 불끈 세운 남자나 풍만한 가슴과 도드라진 여근이 강조된 여자의 도상을 볼 때, 단순히 생식을 넘어선 성이 인간의 표현 욕구의 바탕에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니 그리스 신화나 구약 성서 같은 초기 서사문학이 거룩한 신의 이름을 빌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관계를 묘사한 것도 성이 가장 원초적, 인간적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유희가 한참 더 정교해지고, 금기 또한 전방위적으로 제도화된 이후 등장한 영화도 ‘성’이라는 주제를 비껴갈 리 없다. 영화란 원래 어두운 공간에 빛으로 이미지를 영사해서 그 어른거림을 즐기는 매체다. 그러므로 가만히 앉아서 들여다보는 영화보기는 본질적으로 관음증적인 행위다.

    이 관음증적인 행위에서 어디까지를 허용할 만한 에로티즘의 세계로 열어둘 것이며, 어디서부터는 난잡하고 음험한 포르노그래피의 영역으로 가둬놓을 것인지는 한 사회의 문화적 성숙도와 도덕성을 빙자한 정치적 판단에 따르게 된다.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잣대로 판단되는 것이 ‘성’이다보니 ‘음란’이라는 판단의 기준 자체가 정당하고 객관적이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무성영화 시절의 포르노그래피

    그렇지만 대중문화인 영화를 가능한 한 최대의 이윤을 뽑아내는 상품으로 유통시키자면 표현의 정도에 따라 시장의 범위와 소구 대상이 달라진다. 거기에 맞춰 나라마다 시대마다 ‘음란’의 기준을 정하고, 표현의 수위를 통제한다. 그러다보니 통제의 한계를 벗어난 성의 표현은 사적인 포르노그래피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정작 공적으로 인정되는 영화의 표현은 메마르거나 과장된 허상이 되곤 한다.

    대부분의 영화사는 무성영화 시절을 뤼미에르의 기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을 보여주는 기록영화나, 멜리에스의 마법과 유희로 흥겨운 오락영화 정도의 순진한 시절로 기록한다. 그러나 사실 무성영화 시절부터 포르노그래피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사창가 대기실에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오빠’들의 흥분을 돋우기 위한 서비스 여흥거리였다는 초창기 포르노그래피 영화를 보면 혼음에서 수간까지 이미 나올 건 다 나온다.

    공적인 영화의 역사에는 제목조차 오르지 않지만 줄곧 엄청난 규모의 영상 소비상품을 양산해왔던 포르노그래피가 필름에서 비디오를 거쳐 인터넷과 만나면서 영상으로 표현되는 성은 점점 더 값싸고 상스러운 것이 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정작 영화는 성의 표현을 우회하면서 인간의 중요한 감각과 의식의 한 부분을 제대로 그려낼 자격을 얻지 못했다.

    서울독립영화제가 이번에 마련한 해외초청 기획전 "감각의 독립, ‘Sex’ – 표현의 자유를 누려라"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문제를 던지면서 영화에서의 섹스를 공론화한다.

    영화제측은 섹스의 표상을 주류 영화에서 멀어지게 하면서 섹스 표현의 게토화, 포르노 영화의 독점화가 진행되었으며, 영화가 노동을 다루거나 삶을 표현하는 것을 기피하면서 점점 영상이 스펙터클화되었던 것처럼 영화가 섹스를, 사랑의 육체적 표현을 예외로 회피하면서 반대로 즉물적인 포르노그래피가 범람하는 현실을 지적한다.

    감각으로부터의 독립

    그러므로 포르노 영화에 밀린 영화의 표현성의 힘을 새롭게 구제할 필요가 있으며, 독립영화는 자본과 권력만이 아니라 감각에서도 독립성을 확보해야만 하고, 그래서 섹스의 표상은 의무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성의 표현에서 예외성을 보여준 영화들, 특히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영화들을 소개하고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기획전에 초청된 영화들 가운데는 이미 다른 영화제를 통해 국내에서 상영된 적이 있는 작품들도 있고, 어둠의 경로를 통해 포르노그래피처럼 유포되고 공유된 작품들도 있다. <숏버스>나 <나인 송즈>가 그 대표적인 예다.

    실제 혼음으로 이루어지는 정사장면과 적나라한 성기노출이 문제가 되었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나면 따뜻하고 행복한 소통과 자존감의 회복을 꿈꾸게 만드는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의 <숏버스>도 그 중 한편이다.

       
      ▲숏버스의 한 장면. 

    <숏버스>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 엑스트라extra가 아니라 ‘섹스트라sextra’의 명단이 오른다.

    섹스트라로 호명되는 순간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찾기 위해 영화 속의 비밀스런 숏버스에서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던 무명의 배우들은 영화를 위해 스쳐 지나가는 인간 소품이 아니라 새로운 영화를 통해 나름의 가치를 부여받는 적극적인 주체가 된다.

    아홉 번의 콘서트 장면과 아홉 번의 클로즈업된 섹스 장면이 교차하면서 아무리 절절한 몸과 몸의 부딪힘, 살과 살의 파고듦으로도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의 거리를 쓸쓸하게 인정하도록 만드는 마이클 윈터버텀 감독의 <나인 송즈>에서는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는 성기 못지않게 사이사이 연주되는 밴드들의 콘서트 장면이 인상적이다.

    정사만이 아니라 공연도 실제다. 아무리 생생한 살떨림과 아무리 열정적인 록 콘서트로도 뜨겁게 서로를 확인할 수 없는 인간의 외로움은 결국 살을 에는 남극의 혹한으로 영화를 식혀버린다.

    섹스도 록 콘서트도 외로움을 못 넘는다 

    그런가하면 생전에는 자신도 그다지 세간의 도덕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던 장 폴 사르트르로부터 ‘미치광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죽은 후에는 미셸 푸코에게서 ‘이 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광기와 에로티즘의 작가 조르주 바타이유의 미완성 소설을 원작으로 한 크리스토프 오노레 감독의 <내 어머니>는 금기와 위반의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표현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성의 한계를 시험에 들게 한다.

    원작자인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의 성행위를 동물적 성행위와 구분해서 에로티즘이라고 일컫는 근거는 인간이 동물과는 달리 내적 삶을 문제 삼는 것, 즉 종교적 양상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노동, 죽음의 의식, 성에 관한 금기에 대한 인식이 인간을 동물성에서 벗어나게 한 근거이자 인간이 종교성을 획득하게 되는 지점이다. 에로티즘과 종교의 근본에는 금기와 위반이라는 모순적 개인 체험이 요구된다.

    금기를 어기려는 충동과 금기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고뇌를 동시에 느낄 때 비로소 에로티즘의 내적 체험이 가능하며, 그것은 욕망과 두려움, 짙은 쾌락과 고뇌를 긴밀히 연결짓는다는 점에서 종교적 감정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는 삶을 파열시키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데 그 하나는 노동 또는 이성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의 세계다. 폭력은 죽음의 원인이고 죽음은 폭력의 상징이다. 죽음의 폭력은 살해와 살해자를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해의 금기는 폭력의 금기에 속하는 특수한 하나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금기는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 그 위반에 대한 매력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어떤 행위가 금기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위반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위반하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충동을 극한까지 밀고 가는 영화가 바로 <내 어머니>다.

       
      ▲나인 송스의 한 장면. 

    갓 청년이 된 아들과 아직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사위기 전의 어머니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정극을 보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매혹적인 경험이 아니라 소름끼치는 폭력을 겪게 만든다.

    영화보다 사회가 더 부도덕하다

    이런 부도덕한 영화가 예술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 우리 현실을 돌아보라. 한 집안에서 할아버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사촌 오빠까지 일가족이 몇 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장애가 있는 십대 소녀를 범하고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세상이다.

    심지어 소녀는 자신의 친아버지조차 그런 행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아예 처벌에서 제외되었다. 더구나 이들 일가족은 서로서로 이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대한민국 사법부는 ‘정상을 참작해서’ 집행유예라는 시늉만의 처벌을 내렸다.

    그러니 어머니가 아들을, 아들이 어머니를 진저리치도록 탐하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를 음란하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하기보다 차라리 이 사회가 더 외설스럽고 파렴치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옳다.

    영화가 이런 표현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고, 공공의 스크린에 걸지 않는다고 섹스와 욕망, 금기와 위반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교묘하고 더 추잡한 그림자를 드리울 뿐. <소돔 : 120일>의 작가 사드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방종을 억누를 수는 없다……방종자의 욕망에 불을 지르고, 그 욕망을 다양하게 하려면, 그를 제한하는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서울독립영화제2008은 12.11~19일까지 계속되며, 이 기획전뿐 아니라 독립영화의 다양한 판을 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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